‘부부’·‘자녀’로 이뤄진 ‘가족’만이 자연스럽고, ‘정상’인가?

 청소년기의 나에게 가족이란 나의 생각을 감춰야 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공동체였다. 초등학생 때는 학습지를 풀어야만 외출을 허락받을 수 있었고, 부친이 출제한 한문 시험에서 틀린 개수대로 엉덩이를 맞는 게 당연했으며, 부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은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눈치껏 말하지 않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어른한테 말대꾸야”라거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라는 혼남과 비꼼을 들으며 신체적·물리적 폭력과 위협을 경험해야 했으니까 나는 살기 위해 참아야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뒤 중·고등학생 때에는 입시 이외에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삶을 살았고, 나의 생각과 선택은 입시와 관련해서만 용인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 해도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사회는 청소년에게 ‘보호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역할 구분, 잃어버린 ‘개인’

 그래서 나는 가족 내에서 ‘딸’로서, ‘청소년’으로서 당연하게 요구되는 역할들을 수행해야 했다. 물론 이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동일한 행위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와 언니, 동생은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생물학적 남성인지 여성인지, 동생인지 누나인지 등에 따라 요구받는 모습들이 달랐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보호자’의 경우 성별에 따라, 버는 돈의 액수 등에 따라 각기 역할이 달랐다.

 예컨대 학생 청소년의 시기에는 입시에 집중해야 한다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빨래와 요리·설거지 등 가사노동에서 배제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렇게 누군가 해야 했던 가족 내 노동은 대부분, 부친처럼 임금노동을 하는 모친의 것이 되었다. 물론 모친이 집에 있지 않은 경우에는 가족 내 생물학적 남성인 부친과 남동생을 제외한 나와 언니가 해야 했지만.

 물론 이런 나의 경험은 지극히 ‘정상가족’의 테두리에서 나이와 젠더에 따른 권력적 불평등이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여성운동 진영 등에서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을 자연스럽고, ‘정상’인 것처럼 여기게 하고, 그 이외의 ‘가족들’을 어딘가 부족한 것으로 여기고, ‘정상’이 아닌 것처럼 여기도록 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문제제기 해온바 있다. 그리고 그에 고민하며 모두에게 행복한 가족, 새로운 가족들을 상상하자고 이야기 된 적도 있다. 문제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나 역시 새로운 가족을 상상해봤지만 어쩐지 나는 현재 존재하는 많은 ‘가족들’ 안에서도, 가족과 관련한 여러 담론들 안에서도 청소년이 배제되거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위치는 그대로인 것 같아 서글퍼졌다. 이건 모두에게 행복한 게 아니니까.

 

정상가족 이름 아래 평등과 자유 박탈

 ‘가족들’은 다양했고, 계속 다양해지지만 그 안에 청소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은 제한적이다. 물론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청소년에게 가족을 구성하거나 해체할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혈연적 의미의 가족은 모두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규칙을 만들거나 강한 발언권을 갖는 것은 오로지 ‘어른’ 뿐이다. 청소년을 보호자의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없는 가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1인 가정도, 동거도 모두 늘고 있지만 모두 청소년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청소년이 집에서 나와 살고 싶어도 제도적으로 경제적인 권리를 스스로 행사할 수 없도록 하고 있고, 집을 계약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집을 나올 수밖에 없는 청소년에게 사회는 ‘가출청소년’이라는 이름을 붙여 쉼터로 보내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도록 요구한다. 청소년의 자율성과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 모두에게 행복한, 새로운 가족은 과연 가능할까?

 앞서 말한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지 못해 상상하기 힘들지만, 만약 모두에게 행복한 것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정말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청소년 역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와 해체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어른’들 앞에서 동등하게 얻을 수 없는 발언권과 그들의 선택과 결정이 ‘보호자’의 테두리 안에서만 허락 가능한 제도와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가족’은 모두에게 행복할 수 없다.

빈둥

 

빈둥님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을 일상적으로 어떻게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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