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이 싸기 때문에, 비수면내시경을 선택했다.

 정신과에 다니며 식이장애가 있다는 환자에게 ‘젊은 사람이 웬 정신과냐. 나중에 취직 못하니 가지 마라’며 다그치던 의사는, 그 환자와 나에게 위내시경을 포함한 똑같은 절차의 검사를 처방했다. 나이든 의사는 우리 둘 다 병은 없으며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장담했고, 그렇다면 왜 굳이 그 검사들을 받아야 하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이튿날, 밥을 굶고 다시 내원했다. ‘정말 일반(비수면)으로 할 거냐’고 되묻는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고민했다. 왜 비수면내시경인가. 다음 스케줄에 지장이 갈 수도 있다는 걱정, 의사가 몸을 더듬을 수도 있을 거라는 의심, (그 의심은 초음파 검사를 하는 도중 의사가 내 허벅지를 이유 없이 손바닥으로 두드림으로서 무게를 얻었다) 그런 생각이 앞섰지만 결국은 값이 싸기 때문에 아니 수면내시경이 할 수 없이 비싸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젖혀 국소마취제를 목젖 언저리에 머금고 몇 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곤란한 질문을 이어왔다. 학교는 안다니니, 그럼 뭐하니, 대답을 하려고 하자 목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으그르륵” 간호사가 다시 물었다. “머금고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구나?”

 “그런데 왜 일반내시경을 하니? 여리게 생겨가지고. 너 겁 많지?” “으르르륵” “가끔 학생들이 일반내시경을 하는데, 하기 전에 내가 이렇게 말해준단다. 이걸 하고 나면 어른이 되는 거야, 하고.” 그 말이 참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목젖을 툭툭 쳐 보였다. “으그르르륵” 약품이 끓으며 튀어서 엉뚱하게 혀가 마비되기 시작했지만, 대답하지 '않음'이 아닌 ‘못함’은 대단한 안도감을 주었다.

 

“삶의 선택과 행동은 떠밀림의 연속”

 어쩌면 내 삶의 숱한 선택과 행동은 그런 떠밀림이었다.

 작년 봄, 18살이던 나는 집을 나와 살고 있었다. 시급이 4000원이고 월급이 50만 원이 될까말까한 편의점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그리고 한 친구가 운이 좋으면 하룻밤에 20만원까지도 벌 수 있다며 ‘보도’를 같이 하자고 제안해왔다. 그 친구는 비청소년이었고, 며칠 일을 해보니 신분증 검사를 안 하더라고 했다. 나는 곧 수락했고, 며칠 뒤로 함께 밴을 탈 날짜를 잡았다.

 왜 하려느냐고 묻는 룸메이트에게 ‘돈도 필요하지만~’으로 시작해 여러 이유를 댔다. 경험이 나중에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느니 그런 말들. 그 룸메이트는 분명 그 거짓말을 꿰뚫어보았다. 그날이 지나고 언젠가, 요구사항을 듣지 않을 거면 보증금을 제 가족이 댔으니 나가라고 협박하고서, 내가 그 말을 문제 삼자 ‘너는 돈에만 반응하니까’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밴은 다른 사람들을 일터에 내려주고, 나와 친구를 태운 채 번화가의 은행으로 향했다. ‘매니저오빠’라고 불리는 그는 아무 설명 없이 우리를 은행에 들어가게 했다. 은행 안에는 몇 남성들이 더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남성이 주민등록등본 발급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문 찍어봐.’ 지문을 찍어서 등본을 뽑아보라는 말이었다. 어쩔 줄 몰라 그 앞에서 멍하니 친구와 기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가 “뭐하고 있어?”라며 손을 기계 쪽으로 휘두르며 재촉했고, 몇발짝 다가가기는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백하면 화를 내고 해코지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달리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온갖 생각이 스치고, 어쩌면 나는 친구만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 같다. 친구가 입을 열어 말했다. “사실 걔 열여덟 살이에요.”

 나는 혼자 그 우두머리 남성의 차로 옮겨 타게 되었고, 그는 나에게 불편한 질문과 우스갯소리를 몇 가지 던진 것 외에는 아주 무사히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것이 밤 10시 경이었다.

 알바도 빼고 보낸 그날 하루가 스쳐지나갔다. 어떤 옷을 입어야 어른스러울까 고민하다 시내에서 옷을 샀던 것. 이른 저녁부터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진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고데기로 말던 것. 차 안에서도 운전석에 앉은 남성과 다른 여성들에게 성적 매력이 없거나, 활달하지 않거나, 어리게 보이거나, 얕보이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던 것. 그날 친구는 몇 번이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았다. 친구의 책임이 어쨌건 들인 노력이 억울할 만도 한데 그냥, 안도 밖에 들지 않았다. 나의 하지 못함, 가로막힘이 다행스러웠다.

 

“나의 하지 못함·가로막힘이 다행스러워”

 어른이 되는 일은 모르겠고,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었다. 관이 뱃속을 헤집는 짧디 짧은 몇 분간 분노도 서러움도 어떤 감정도 없이 눈물만 미간과 뺨을 타고 쪼록쪼록 흘렀다. 살게 해달라고 발악하듯이 뱃속이 스스로 구역질을 했고, 관을 뽑았을 때 토하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소매와 뺨이 끈끈하고 투명한 액체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잘하더니 마지막에 토를 해버렸어”라며 간호사가 수건으로 액체를 닦아주었고, 나는 액체를 손에 묻혀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내 위에는 이상이 없었다. 내시경 이후에는 목 속이 쑤시고, 트림이 많이 났다. 왜 나는 위내시경을 했을까, 그건 여전히 알 수 없다. 나와 함께 내시경을 한 그 환자, 그는 왜 끔찍한 말을 듣고도 다시 병원에 왔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태어남이 그랬듯 떠밀리며 시간과 흘러갈 뿐이다.

 단 몇 개월이 흐르면, 나는 성노동을 할 수 있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몇 개월이 지나도 아마 같을 것이다. 여느 아침과 다를 바 없는 신정을 줄곧 맞아왔던 것처럼. 다른 점이라면 그 때의 나에게 더 돈이 절박했다는 것이랄까.

 가끔 미성년자 성매매는 성폭력이라며, 사탕발림에 넘어간 순진한 여학생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캠페인을 보면 화가 난다. 그 캠페인의 주체들은 우리와는 다른 조류의 영역에서 헤엄치면서, 단지 거기에서 보이는 우리의 모습을 액자 속에 건다. 성매매인지 모르고 따라갔다가 성폭력을 당한 청소년, 성폭력을 당했는데 억울하게 성매매로 판정받은 청소년…. 그런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내거는 플랜카드에, 뭐가 뭔지 정확히 알았던 그러나 면밀한 계산 끝에 그것을 선택한 우리는 가려져버린다.

 몇 달 전에는 조건 만남을 한 여성 청소년이 모텔에서 지갑을 훔쳐 달아났다며, 얼굴이 찍힌 cctv사진을 올려 신상을 알려달라는 게시물을 sns에서 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그녀의 다른 얼굴사진과 페이스북 계정 캡처사진과 함께 ‘줘도 안먹겠다’, ‘이 얼굴로 조건을 어떻게 하냐’는 등의 폭언을 퍼붓고, 그녀의 주변인을 태그하고, 욕 메시지를 보낸 것을 인증하는 캡처사진을 올렸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지쳐 쓰러졌던 날들”

 나는 도망친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제발 그 댓글과 메시지들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어떤 제어나 안전망도 없는 조건만남에서는 이용자가 화대를 주지 않거나 약속보다 적게 주는 일이 허다하다. 설령 그런 이유 없이 지갑을 훔쳤더라고 한들, 그의 훔침이 그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 보도, 바, 룸살롱 등 더 체계 있는(?) 성노동에서 거부당한 청소년들은 조건만남밖에 할 수 없다. 이들에게 가로막힘은 더 어둡고 위험한 곳을 향한 이정표였으리라.

 나는 가로막힘에 안도했지만, 그 대신으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매일 지쳐 쓰러지는 나날 또한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들이 폐업한 후, 나는 아직 안전하지 않은 집으로 돌아왔다. 전보다는 덜 잦지만, 여전히 내가 하는 실수나 무신경한 표현에 혹은 예상할 수 없는 불시에 폭력이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하다.

 그때 가로막히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더 나았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무엇을 선택하건 언제나 그랬듯 그저 떠밀려 흘러갈 뿐이니.

밀루



‘밀루’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탈학교청소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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