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홍도에 왔는데, 늘 보던 풍경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울림을 만났다. 홍도의 식생을 살펴보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고, 우리 일행의 시선은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리꽃 위에 앉아 꿀을 빨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삶의 가장 아름다운 근원처럼 느껴졌다. 그 풍경 앞에서 우리 일행은 모두 입을 닫고 한참을 눈으로만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느 곳에는 내가 있어서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그가 살 수 없고 반대로 그가 살아있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는 아주 절실한 `상생’의 관계다. 호랑나비와 나리꽃의 관계가 역시 그러한데, 둘은 `그’가 있으므로 `내’가 빛나는 사이다. 만약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다른 하나 역시 오래지 않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식물과 곤충의 세상에서는 서로 상호 조응하는 그런 관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호랑나비는 나리꽃에 앉아 먹이를 얻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리꽃은 제 것을 호랑나비에게 아낌없이 내준다. 여기까지는 나리꽃이 손해 보는 장사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리꽃을 옮겨 다니는 호랑나비의 다리에는 나리꽃의 꽃가루가 묻어나고, 호랑나비는 그 꽃가루를 다른 나리꽃에게로 옮기며 수정을 해준다. 호랑나비가 나리꽃의 중매쟁이인 셈인데, 조금 더 거창하게 의미부여를 하면 나리꽃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제 몸 안에 각인시켜 놓은 유전자의 부름에 대해 호랑나비가 응답을 해주는 것이다.

 그 장엄한 풍경 앞에서 어떤 말도 더 필요치 않다. 호랑나비가 나리꽃을 떠나고 나서야 이런 상생이 인간의 세상에서는 왜 점점 더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밀려왔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 과연 인간의 사회에서 내가 있어서 그가 세상에 있는 그런 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반대의 풍경은 너무 많이 만날 수 있다. 밤의 편리를 위해 도시에 켜놓은 가로등은 별빛을 삼켜버리고, 강에 보를 막으면서 강물의 생태계를 완전하게 파괴시키며, 간척의 명목으로 바다를 막아 갯벌 생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인간이다. 지금 새만금에 가보면 갯벌에 수놓아져 있던 무수한 생명들의 문장은 모두 소멸했고, 막혀 신음하는 바닷물의 거친 호흡만 감지할 수 있다.

 나리꽃에 앉은 호랑나비를 보며 나는 인간 세상에서도 `그’가 있으므로 `내’가 빛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꿈꿨다. 전고필 <북구문화의 집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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