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라는 이름과 가장 가까운 단어를 뽑으라면 아마 효녀일 것이다. 심청은 효녀의 대명사일 정도로 효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자식이다. 눈먼 아버지를 지극히 봉양하고, 아버지가 얼떨결에 약속한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이 희생적이고 효심이 지극한 심청은 조선이 정해놓은 틀에 완벽히 부합하는 모습이다.
심청은 그 시대의 이상 그 자체였고, 지금까지도 심청은 효녀다. 그러나 심청은 과연 ‘진짜 효녀’인 것일까. 부모가 주신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효도였던 유교 사회에,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어찌 진정한 효도란 말인가. 이야기 속에서는 심청이 죽지 않았지만 현실에서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누구나, 아마 조선의 사람들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심청이 효녀가 된 이유는 기득권 세력들 때문일 것이다. 심청을 효녀로 만듦으로써 그 비합리한 희생을 미화하고 정당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약자들의 희생도 정당한 것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리어 왕의 자애가 뒤틀렸기에 ‘리어 왕’이 비극이라면 심청의 효가 뒤틀렸기에 ‘심청전’도 비극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기득권들의 바람대로 심청은, 이 사회의 약자들은 희생을 강요받아왔고, 그 희생은 줄곧 고귀한 것으로 미화되어왔다. 그러나 그 뒤틀린 자애와 효만큼 추한 것이 또 있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 심청이 더 이상 없는 것은 다행일지 모른다. 아직도 자식이 부모를, 혹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물 속에 뛰어든다면 그 사회는 효와 자애가 넘치는 곳이 아닌, 그저 끔찍한 곳일 뿐이다. 효와 자애가, 아직까지도 약한 자들을 가두기 위해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것들이 뒤틀린 자애와 효는 아닐지.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소녀가 물에 뛰어드는 것을 막으려면 말이다.
이수아 <경신중 3년, 아나키 인문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