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거즈 원조 에이스 이상윤 선수
`굿바이 무등’ 타이거즈 원조 에이스 이상윤의 추억담
“비 조금만 와도 경기 못해…컨디션 안좋으면 악용(?)

 지난 8일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개장하면서 1965년에 건립된 무등경기장 야구장은 30여 년만에 프로야구 ‘현역’ 무대에서 은퇴했다.

 무등경기장 야구장은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타이거즈 홈구장으로 사용하면서 광주시민과 함께 호흡했던 공간이다. 광주 초중고교 야구선수들은 이곳에서 뛰면서 프로선수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래도 무등야구장에서 가장 빛났던 별들은 해태·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이다. 그 중엔 프로야구 초창기 타이거즈를 이끌었던 ‘원조 에이스’ 이상윤 선수가 있었다. 이상윤 선수는 1982년부터 1988년까지 활동하면서 타이거즈의 5회 우승을 일궈냈으며, 1989년부터 2004년까지는 코치로 뛰면서 9회 우승에 이바지했다.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난 8일 광주 새 야구장 개장 기념으로 열린 ‘타이거즈 레전드’와 ‘광주지역 고교야구 올스타’와의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며 간만의 추억을 선사하기도 했다. 본보는 지난 19일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는 산증인 중 한 명인 이상윤 씨를 만나 무등야구장에 얽힌 추억과 새야구장에 대한 기대를 들어봤다.



▶당시 야구선수는 아이돌 스타 

 이상윤 선수가 무등야구장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서림초등학교 시절이다. “고교야구 열풍으로 당시 아이들은 누구나 야구를 좋아했어요.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하게 됐고 야구부에 들어간 것이죠.”

 그는 당시 무등야구장에서 열리는 고교 야구 경기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고 증언한다. 무등야구장은 항상 응원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잘나가는 선수들은 무등야구장의 ‘아이돌’로 손색 없었다는 것. “경기장에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수가 속한)고등학교에까지도 따라오고 그랬어요. 심지어는 우리들 밥 먹는 식당에까지 왔으니까요. 팬레터 받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고요.” 당시 빠른 볼과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던 그는 4번 타자도 병행하는 광주일고 에이스였다. 1978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 ‘베스트10’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한양대에 입학했다가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당시 그의 별명은 ‘원자탄’이었다. 그는 “140㎞ 후반을 넘나드는 속구가 주무기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사석에선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진짜 별명은 왕눈이. 지금도 그는 눈이 컸다.

 

 ▶잔디 상태 엉망 선수들 무릎 고생

 무등야구장은 그에게 말도 많고 추억도 많은 곳이다. “어릴 때부터 30년 가까이 뛰던 곳이다보니 익숙하기도 했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죠. 그때 당시도 20년이 다 된 구장이라 잔디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불규칙 바운드가 많았어요. 이런 곳에서 뛰다보니 선수들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갔죠. 또 배수가 안돼서 오전에 비가 잠깐 오고 오후에 그쳐도 경기를 못할 정도에요. 한참 컨디션이 좋을 때 경기를 해야 하는데, 기상 여건 때문에 못하게 되면 속이 많이 상했지.”

 하지만 이같은 악조건이 때론 타이거즈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 선수들 컨디션이 좋지 못할 때는 구장 핑계를 대고 쉬기도 했어여. 상대팀에서 미심쩍어하면서도 뭐라고 항의하지 못하는 게 무등구장의 상태였어요.”

 또 하나 무등구장과 얽힌 추억은 짬뽕이다. 언젠부턴가 타이거즈 선수들 사이에서 짬뽕을 먹으면 경기가 잘 풀린다는 속설이 생겼다. 구장에서 짬뽕을 먹는 게 유행으로 번졌다. “징크스라는 것이 원래 자기 암시가 강하거든. 선수들 사이에서 짬뽕을 먹고 ‘안타 쳤다’, ‘홈런 쳤다’하는 사람이 늘어난 거예요. 그래서 무등구장에선 유독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는 모습이 흔했어요.”

 

▶1983년 우승과 1989년 우승 새록 

 그는 무등야구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두 가지를 꼽았다. 선수 시절인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코치로서 최초 우승인 1989년 우승이다. 1983년 우승 당시에는 20승 10패 6세이브 평균 자책점 2.67로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83년은 전반기와 후반기 리그 중 1등을 해야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어요. 전반기에 팔이 빠져라 던져 15승을 해 1등을 하고, 후반기에는 휴식을 취하고 한국시리즈에 전력을 다하는 작전이 맞아들었죠.”

 1989년은 그가 선수 시절을 마감하고 코치로 나선 해다. “더 뛰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그 해 이강철·이광우·조계현 등 우수한 투수들이 많이 들어온 거죠. 구단에서 이젠 코치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있었어요.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후배들이 잘해줘 코치로서도 우승을 했어요. 선수시절 우승과는 또 다른 기분이더라구요.”

 그렇게 2004년까지 해태와 기아에서 선수·코치 생활을 하고 2005년 삼성 코치를 끝으로, 이후부터 야구와는 거리를 두게 됐다. “너무 오랜 야구 생활로 몸에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하자 이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지인의 도움이 있어서 중국에서 골프장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지금은 마트사업을 하고 있죠.”

 

▶새야구장 상전벽해 ‘시설·환경 모두 훌륭’

 그는 광주의 새야구장인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최근 둘러봤다. 첫 소감은 “상전벽해”였다. “각종 이벤트석에 편의시설도 많아지고 그라운드도 예전보다 좋아졌으니 선수들 경기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이어 광주 야구에 대한 그의 소망이 이어졌다. “지금 한국 야구가 올릭픽에서 금메달도 따고 수준이 높아졌지만, 고교야구 선수층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새 야구장을 계기로 야구에 입문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선수층도 두꺼워졌으면 좋겠어요.”

글·사진=이호행 기자 gmd@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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