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 우리 책들]‘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VIKTOR’(2021, goat)

[작은 책방 우리 책들]‘빅토르VIKTOR’(2021, goat)

따뜻한 노란색 표지를 가로지르는 빅토르VIKTOR라는 이름. 그리고 그 뒤엔 치타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몸 곳곳에 빨간, 그리고 검은 실선이 그어진 치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실선들은 실로 꿰멘 자국이고, 치타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엔 사람의 옆모습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벨기에 그림책 듀오 자크 마에스와 리서 브라에커르스의 ‘빅토르VIKTOR’(2021, goat)는 치타 빅토르가 아닌 사람 빅토르의 이야기다.

‘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VIKTOR’(2021, goat)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표지 뒤에는 장총을 들고 쓰러진 치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빅토르의 모습이 보인다. 치타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새빨갛다. 이 그림책은 자세히 서술되지 못한 섬세한 구석들을 이런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대체한다. 이토록 선명한 핏물은 다음 장에선 아주 깔끔히 사라진다.

사람 빅토르는 사냥꾼이다. 그는 사냥에 익숙하며, 전리품이 된 동물들의 시체를 가져다 멋들어진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오늘’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치타 사냥에 성공한 날이다. 빅토르는 의기양양하게 가죽을 벗겨 거실 바닥에 깔아놓는다. 안락의자 위의 쿠션도 치타 무늬, 굵은 핀 꽂힌 나비 표본이 눈에 띄고 온통 치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는 집에서 빅토르는 거실 바닥의 러그가 된 치타와 같은 자세로 잠을 청한다.

‘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VIKTOR’(2021, goat)

그날 밤, 꿈 속에 치타의 친구들이 나타난다. 사라진 친구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치타 무리에 빅토르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는지 세상이 온통 저를 바라보는 치타의 눈동자처럼 느껴진다. 사냥꾼 빅토르는 ‘자기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졌’고 ‘한가지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바로 치타 거죽을 솜씨 좋게 꿰매어 입고 친구를 잃은 치타 무리에게 빼앗긴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VIKTOR’(2021, goat)

처음에는 참으로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치타들은 돌아온 친구의 모습에 뛸 듯이 기뻐하며 빅토르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함께 낮잠을 자기도, 소변을 보기도, 목욕을 하고 입이 커다란 악어에게서 탈출하기도 했다. 빅토르는 치타들과 함께하며 난생처음으로 진정한 우정을 느꼈다. 아무도 그의 곁에 이렇게 함께해주지 않았던 나날들과 비교하니 치타 무리에서의 삶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었다! 치타는 워낙에 움직임이 빠른 동물이니 달리기에선 뒤쳐질 수밖에 없었지만, 빅토르의 ‘친구’들은 그런 것쯤은 문제삼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빅토르-치타의 꼬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던 ‘친구’ 하나가 꿰메둔 실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을 세게 잡아당겨버린 것이다. 꼬리는 떨어져 나갔고, 빅토르-인간의 엉덩이는 세상에 드러나고, 치타 무리는 사실 그들의 친구가 정말로 돌아온 게 아니었음을 알아차린다.

이런 천하의 사기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치타 하나가 소리쳤어요
‘빅토르VIKTOR’ 중에서.

‘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VIKTOR’(2021, goat)

빅토르는 분노한 치타들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내 꿈에서 깨어난다. 달콤하고 끔찍한 악몽이었던 것이다. 빅토르는 곧장 거실에서 러그를 치운다. 치타 쿠션도, 치타의 모습을 담은 그림도 상자에 담아 정리한다. ‘이다음부터 빅토르는 더는 치타를 사냥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이 그림책은 마음을 건드리는 경험을 통해 사냥을 멈추게 된 사냥꾼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빅토르는 집안의 빈 공간을 다시 얼룩말 러그, 얼룩말 쿠션, 얼룩말 그림으로 채운다. 그의 눈은 변함 없이 동그랗게 뜨여 있어서 서늘하게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치타를 사냥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사냥을 멈추지는 못했다. 직접 경험한 것만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얼룩말에게도 삶이 있다. 치타 무리가 즐겁게 뛰어놀고 함께 뒹굴 듯 얼룩말도 그럴 것이다. 얼룩말 뿐인가. 코끼리, 기린, 사자, 호랑이, 곰,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이 수렵의 피해자가 되는 수많은 동물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식용’ 동물들에게도 삶이 있다. 하지만 알지 못하므로,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삶을 그 죽음들로 윤택하게 만든다.

고양이와 강아지 같은 동물들이 학대를 당하고 인간의 손에 끔찍하게 죽어갈 때 우리는 안타까움을 표한다. 하지만 치타와 얼룩말 같은 것들에게는 특별한 계기가 없이 사랑을 느낄 수 없다. 동물뿐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쉽게 적의를 표한다.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한 장애인들, 퀴어 퍼레이드의 성소수자들,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들, 학교에 다니지 않은 청년들…

이해 없이 동물의 살점을 먹고 이해 없이 타인을 경멸하며 혐오하는 평범한 우리들. 아름다운 그림책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과연 어떤 껍질을 쓰고 이 세상을 살고 있을까?”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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