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 영화읽기]

영화 ‘시,나리오’.
영화 ‘시,나리오’.

대한민국의 영화감독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시,나리오’속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감독들의 신산한 삶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영화감독도 잘 나가는 사람 말고는 대게 힘들다고 그러던데. 인간이 할 짓 아니라고 그런 인터뷰 본거 같아요.” 그러니까 한국의 영화감독들은 소수 몇몇을 제하고는 전업감독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인 것이다.
‘시,나리오’의 한경태(오태경) 역시 영화 1편을 찍은 후 8년 동안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4년 반 동안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 원치 않는 이별을 통보받았다. 미련이 남은 경태는 다운(신소율)의 집 앞에 텐트를 치고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차갑게 식어버린 다운의 마음을 돌려놓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다 다운에게는 권율(허규)이라는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렇게 두 남자는 다운의 집에서 맞닥뜨리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여기서 일반적인 극적 전개라면 험한 꼴이 펼쳐지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두 남자는 텐트 안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고, 금세 막역한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는 이별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펼쳐 놓는 것을 경계한다. 차라리 아기자기한 상황전개를 통해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리고 미련이 남은 자와 이를 밀쳐내려는 자의 밀당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고 있는 점도 이 영화만의 강점이다. 
여기에다 ‘시,나리오’는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의 뉘앙스가 풍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말맛’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가령, 아침부터 공기청정기를 사기 위해 줄을 섰던 권율이 다운에게 밥을 얻어먹고자 내뱉는 말의 성찬이나, 다운의 어디가 좋으냐는 경태의 질문에 답하는 권율의 대사는 밀어의 최대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나리오’는 자기 반영성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연출자인 감독 자신의 삶을 반영하고 현실과의 관계를 성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영화를 만든 김동원 감독은 일찍이 ‘해적, 디스코 왕 되다’(2002)로 이름을 얻었고, 2011년에 개봉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꼭 껴안고 눈물 핑’(2009)을 만든 이후 영화를 찍지 못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영화 속 한경태에게서 김동원 감독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한경태가 와인 한 병을 앞에 놓고 내뱉는 일장 독백은 김동원 감독의 내심이 반영된 말일 것이다. “영화가 투자가 안돼서 엎어지고, 캐스팅이 안돼서 엎어지고, 제작사 대표가 도망가고, 감독이 바뀌”는 시기를 10년이나 보냈다고 말하는 한경태의 말에서 김동원 감독의 지난 10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독백에서 한경태는 영화감독으로서 좌절감을 맛본 날 밤에는 파도가 자신을 덮쳐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악몽을 꾼다고 말한다. 

영화 ‘시,나리오’
영화 ‘시,나리오’

현재 한국영화판에서 김동원 감독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영화감독들은 부지기수다. 수많은 감독들이 차기작을 내놓기 위해 애를 태우며 고군분투 중이기 때문이다. 이들 감독들 역시 한경태와 같은 악몽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한국영화산업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여튼 ‘시,나리오’는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이다. 김동원 감독은 자신의 고민을 깊게 들여다 보았고, 그 결과 한경태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많은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 영화는 돈으로만 찍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졸라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진심을 다하다보면 작지만 아담한 소품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조대영 영화인

조대영이 쓴 영화롭다.
조대영이 쓴 영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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