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가득한 자운영
벚꽃 진 자리에 새 잎 벌써 무성하다. 연한 초록의 아름다움은 꽃에 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왕 꽃 필 때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혼잣말을 들은 마을 할머니가 “뭣이 꺽정인가, 젊은 사람이, 내년에도 꽃은 필 틴디…” 한다. 맞다. 내년에도 꽃은 핀다.
기억해 두시라. 구례 문척교 건너 죽마리 접어들어 오산 가는 길, 그 길에 벚꽃 핀다고.
햇볕 일렁이는 섬진강물이 함께 하는 길이다. 차 멈추고 내려서 걷지 않을 수 없다. 그 길의 아름다움이 지닌 힘은 그렇게 강력하다.
들녘엔 자운영이 지천. 모내기 전 이 꽃밭을 갈아 엎으면 퇴비가 돼 땅심을 돋운다. 그래서 더욱 애잔하고 대견한 꽃이다.
할머니 말처럼 “보리 숭군 디 말고는 천지가 다 자운영”이다. “뽈그스름하니 얼매나 이삔가. 벚꽃 핀가 했더니 폴쎄 자운영 피네. 이 꽃 아울라진다 싶으문 또 저 꽃 벙그러지고…근께 봄이 좋은 것이제.”

발끝 간질간질, 오산 가는 길
구례구역에서 구례읍으로 가다 오른쪽을 보면 들녘에 불쑥 솟은 산이 있다. 오산. 꼭지점도 뚜렷한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산이다.
구례라면 으레 지리산을 먼저 떠올리고 다른 산은 `산’으로도 잘 쳐주지 않는 탓에 오산은 그동안 별달리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구례 바깥의 사람에겐 그러했으나 구례 사람에게라면 `국민학교때 소풍 가던’ 산이다. 그만큼 이무로운 동네 산. 오르면 구례읍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러니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이 어디쯤인가' 손으로 가리켜보는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정상은 542미터. 하지만 산은 높아야만 맛은 아닌 법. 이 높지 않은 산이 섬진강과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맞춤한 터가 되어준다.
길게 굽이쳐 흘러가는 섬진강과 저만치 있는 지리산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그렇게 사람을 압도하는 곳, 그래서 겸손해지게 만드는 곳. 오산이다.

낙조대 신선대 뜀틀바위…`작은 금강산’
굽이굽이 휘어지며 돌아가며 올라선 오산엔 기기묘묘한 벼랑들이 많기도 하다. 한쪽은 좌선대, 또 한쪽은 우선대라 불리는 뜀틀바위(뛰엄바위)로부터 신선이 베를 짠 흔적인 씨줄 날줄이 바위에 그어져 있다는 신선대,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돌아본다는 낙조대 등등이 `오산 12대’를 이루고 있다. 오산이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다. 이 벼랑들 사이에 자리한 절이 사성암. 사성암(四聖庵)이란 이름은 연기 원효 진각 도선 등 네 성인이 이 곳에서 수도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네 분의 `브랜드 파워’면 못이룰 일이 뭐 있으랴. 그래서인지 사성암은 오래 전부터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왔다. 사람들이 지극정성 기도 드리는 곳은 깎아지른 벼랑에 선으로 새겨진 마애여래입상 앞. 10세기쯤에 만들어졌다니 천년 그 아득한 세월을 변함 없이 견뎌오고 있는 부처님이다. 원래 `ㄷ’자형 바위가 자연적인 감실 모양을 이루는 자리였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법당(약사전)이 세워져 부처님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중생들을 `면회’하고 있다. 눈앞에 첩첩이 쌓인 산이랑 섬진강물이랑 바깥 봄바람이 그리우실 것 같다.

쩨쩨한 맘도 화들짝 펴지겠네
법당들만 새로 세워진 건 아니다. 몇 해동안 불사가 이어진 끝에 예전엔 발 간질간질하게 아슬아슬 오르던 벼랑을 따라 산성처럼 돌담도 둘러졌다. 자연적인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휘어지고 굽어지고 패이고 튀어나온 벼랑의 변화무쌍한 선을 살리고자 애쓴 정성이 느껴진다.
벼랑사이 도선굴을 꿰고 나가면 전망좋은 터가 나온다. 벼랑위로도 꾸꿈스럽게 오를 만 하다. 저 아래 섬진강이 굽이치며 흘러가고, 구례 들녘과 거기에 기대어 사는 마을들이 펼쳐지고, 지리산이 저 멀리 바라다 보인다.
눈앞이 환하다. 쩨쩨한 사람의 맘도 화들짝 펴질 것 같다.
글=남신희 기자 miru@gjdream.com
사진=모철홍 기자 momo@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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