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사태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는 않아서 결국 여섯 살 난 딸아이와 고작 이틀 전 돌을 지낸 아들 녀석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결국 수를 낸 것이 아무 때나 온 식구 대동하고 들이닥쳐도 끔벅끔벅 소 같은 미소로 맞아주는 선배네 집 나들이였다. 그 집엔 미모의 내 딸아이를 두고 자못 진지한 경쟁을 벌이는 두 형제가 또한 선배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터여서, 저희들끼리 영화 <가을의 전설> 같은 삼각관계를 연출하든지 끄댕이를 잡고 싸우든지 알아서 하라는 심정으로 아이들 방에 먹을 것 챙겨 가두다시피 들여보내고, TV앞에 세꼬시 한 사라(`접시’란 말도 안다. 하지만 회 접시는 아무래도 `사라’다)에 소주 서너대예닐고여덟 병을 받아 둘러앉았다.
그러나 이 어쩐 일인가? 여섯 시 땡 치자마자 대문짝만한 견고딕체 글씨로 여론 조사 결과가 방송 3사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요지는 대강 이러했다. `열린우리당 압승, 과반수 득표 확실’, `민주노동당 원내 두 자리석 진출 가능’. 그러나 환호도 잠시, 순식간에 무슨 주가 등락 뉴스를 보는 듯 숫자판만 냅다 돌기 시작했다. 싱거웠다. 절치부심 기다린 술자리치고는 참 허무했다. 이건 마치 축구 경기 시작하자마자 경기는 제쳐두고 바로 결과부터 알려주는 꼴이었다(통계학에 저주를!). 끝내 TV를 끌 수 없었던 것은 그나마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는 몇몇 선거구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일찌감치 풀려 버린 긴장과 바닥나 버린 회 접시에도 불구하고 술자리는 오래 끌었다. 안주야 제발 국회 밖으로 좀 사라져줬으면 싶은데, 결국 또 한 자리 꿰차고 들어앉은 자들 씹는 맛이 대신 했고, 그도 싫증나면 전 박 추 중 누가 제일 밉더냐느니, 그간 무수히 돌았던 어록들 중 제일 재미난 게 뭐였냐느니 하는 이야기만으로도 소주 두서너대여섯 병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항상 그랬듯이 결국 또 대취했다.
그러나 그 대취 중에도, 내 문학도답게 명언 한 구절 떠올리는 것은 잊지 않았으니, 아들놈 들쳐 안고, 딸 아이 손잡고 선배네 집을 나서 서늘한 밤바람을 맞자니 예이츠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예이츠가 그랬다. “요정들이 늘 작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모든 것이 변덕스럽다. 심지어 그들 몸의 크기조차도.”
그렇다. 오늘 겸손해 보이고, 성실해 보이고, 깨끗한 정치 운운하며 포부에 가득 찬 듯 보이는 그들이 늘 오늘처럼 작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그들은 모든 것이 변덕스럽다. 심지어 그들 눈꼬리의 높이조차도.
김형중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