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드는 생(生), 가을이 깊다!

▲ 나물을 널어 말리고 있는 다무락마을 주민.
 거기 가면 가을이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피아골은 지금 붉은 기운이 마치 점령군처럼 온 산하를 물들인다. 다무락마을도 붉은 기운이 감돌기는 마찬가지다. 온통 감나무밭인 들에 홍시들이 빨갛게 익어간다. 밤도 여물어 붉은 기운이 감돈다.

 남도의 산하가 온통 울긋불긋하다. 그 기운은 지리산 자락을 물들이고 나서는 다시 남쪽으로 남쪽으로 진군할 것이다. 붉어진 산은 사람을 모은다. 산속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없다. 붉은 기운의 힘이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다.

 

 피아골, 단풍에 물든 사람들

 

 피아골. 피냄새가 나는 이름이다. 사람들은 피아골의 이름에서 빨치산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리산의 숱한 골짜기에서 죽어나간 군경과 빨치산의 수가 2만이라고 했다. 피아골도 그러하다. 하지만 피아골의 이름은 피밭골이 변해서 생긴 이름이다. 피아골에서 피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피밭골이 피아골이 됐다.

 골짜기를 따라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온통 붉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늘의 푸른색과 붉은 단풍잎과 이름 모를 나뭇잎이 물속에 비치니 세상의 모든 색들이 계곡 물 속에 다 모인 듯하다. 세상의 모든 색이 피아골 자락에 모였다면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피아골 자락에 모인 듯 술렁인다.

 경상도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 서울 사투리….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이곳 지리산 피아골에 모여 앉은 것을 보니 집회라도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피아골 단풍의 절정은 삼홍소. 남명 조식은 이곳 삼홍소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면서 산이 붉게 타서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맑은 소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짝에 들어선 사람들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했다.

 단풍에 취해 얼굴이 발그레진 사람들의 모습이 피아골 계곡에서 춤의 축제를 벌이며 어느 한 밤을 보냈던 빨치산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 시간이 참 멀다.

 어느 한 곳 꿰차고 앉아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를 쫓는다. 이제 막 생을 마감한 단풍잎은 바람에 흔들려 한참 동안 허공을 맴돌다 물위로 사뿐히 앉는다. 이상하게도 가슴에 붉은 기운이 인다. 그러고 보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다.

 

 다무락다무락 생밤 씹는 소리

 

 구례 다무락 마을, 이름이 이쁘다. 다무락은 전라도의 말(사투리)이다. ‘담’을 이른다. 돌로 만들어진 담은 ‘돌다무락’이고, 소나무 가지로 엮은 담은 ‘솔갱이다무락’이다. 다무락 마을의 논과 밭은 모두 가장자리에 담처럼 돌을 쌓았다. ‘다무락밭’이고, ‘다무락논’이다. 그런 논과 밭이 산자락을 타고 층층이 계단을 이뤄 마을 이름이 다무락이다.

 구례읍 계산리에 있는 다무락은 세 개의 마을이 하나를 이룬다. 상유·중유·하유마을이다. 한 무리이지만 마을마다 느낌이 다르다. 섬진강 압록을 걸치고 있는 상유는 물가 마을의 형태다. 중유는 붉은 홍시가 지천으로 널려 과수원 마을쯤 되고, 상유는 산간 오지마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특히 다무락 마을은 가을에 빛난다. 감과 밤이 여물며 생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하유마을에서 가장 넓은 마당은 폐교된 계산분교를 개조해 만든 황토염색장이다. 가을 하늘 아래 죽 늘어선 황톳빛은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 고운 빛깔이 우러나기까지는 예순 세 번 정도의 손이 간다. 황톳물을 내기 위해 열일곱 번의 수비(水飛, 황토를 물에 거르는 정화작업)를 거친다. 그 물에 천을 물들여 햇볕에 말리기를 다섯 차례 이상 반복한다. 황토염료가 빠지지 않을 때까지 빨고 말리기를 열 차례쯤 한다.

 다무락 마을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체험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전통가옥체험은 너른 마당과 시원한 마루에 몸을 눕혀 볼 수 있다. 한때 닥나무로 유명했던 마을, 한지공예는 마을 전통의 계승이다. 대나무 공예와 황토염색 체험도 할 수 있다.

 다무락 마을의 논들은 논과 밭이 층층이 계단이다. 가파른 비탈, 돌을 쌓아 만든 ‘다랑이논’,좁은 땅 한 뼘이라도 더 늘리려는 땅에 대한 집념으로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원래 이 땅에는 벼와 보리가 자랐다. 그러나 물줄기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짓는 천수답(天水畓), 사람들은 그 힘겨움에 닥나무를 심었다가 다시 감나무나 매화나무를 심었다.

 돌아보면 논이 깊다. 부족한 물이 새어나갈 틈 없이 두렁을 두툼하게 쌓았다. 그곳 사람들은 모내기철 남녀의 일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여자들은 품앗이로 모여 모를 심고, 남자들은 논에 물을 댄다. 작은 골짜기 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맨 위의 논부터 물을 댄다. ‘차리물’은 그렇게 생겼다. 직역하면 차례를 지키는 물쯤 된다.

 차리물은 그들 삶의 너그러운 방식이다. 자기 논 모 심을 생각부터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이 곧 하늘이다. 차례를 지킨다. 맨 위의 논부터 하루는 내 논에 물을 댔다가 모내기를 마치면 곧바로 그 물을 빼내 아래의 논으로 건네준다. 그렇게 하나의 물길이 마을 끝에 닿으면 모든 모내기가 끝이 난다.

 거기 논은 대부분 ‘삿갓배미’다. 모 다 심고 이제 끝났구나 생각하며 삿갓을 들면 그 삿갓 밑에 논이 다 들어가 있다. 그만큼 작은 논들이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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