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토도

시·시·각·각, 길이 지워진다. 속수무책. 은근히 남실거리는가 싶더니 물은 순식간에 범람하듯 길을 묻어버린다. 뚜렷했던 길은 금세 자취없다.
길이 지워진 순간, 섬은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아득히 멀어진다. “곧 물 든다”는 말은 이 섬에선 “곧 길이 없어진다”는 말과 동의어다.
물때 따라 하루 두 번 그 섬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물때 따라 `이음’과 `단절’을 겪어내며, 토도는 여전히 `섬’으로 거기 존재해왔다.
토도 아이들의 쉼터였던 갈두 `곰바우집’
생김새가 누워 있는 토끼 같다고 토도(兎島). 물이 나면 바다 건너 1km 떨어진 해남 북일면 갈두마을로 노두를 타고 오갈 수 있는 섬이다.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에 속한 토도는 이 노두 덕에 해남 북일면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전화번호 국번도 533 내지 534로 해남 국번이고 우편번호도 해남번호. 택배차도 해남에서 오간다.
지금이야 시멘트로 포장된 노두가 놓여 있지만 전엔 돌로 이은 노두였다. 날마다 노두를 타고 나가 갈두에서 시오리길을 걸어 해남 북일로 국민학교를 다녔다는 박정숙(60) 아짐.
“물때가 안맞으문 어른들이 나룻배로 건네줘. 그때는 배가 짝은께 파도가 겁나 무섭게 치문 못와.”
물 나기 기다리는 토도 아이들을 보듬어준 어른들이 있었다.
“갈두에 째깐한 오막살이가 한나 있어. `곰바우집’이라고 자손 없는 할무니 할아부지가 살았어. 학교 갔다 와서 물 들어 있으문 거그로 가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거그로 달라들어. 그러문 `아야! 어서들 온나’ 하고 항시 웃음서 맞아줘. 고구마를 삶아서 내노문 천신을 못해. 토도 애기들이 그때만 해도 많애. 집이 째깐헌께 먼저 온 놈은 방에 들어가 있고 남지기(나머지)는 정지에도 들어가 있고 처마밑에도 서 있고 그래. 지스랑물 맞지 말고 안으로 뽀짝 들어서라고 그리 따숩게 허셨어. 그런 좋은 할무니 할아부지가 살았어 ”
토도사람들은 다 곰바우 할매 할배를 못 잊는다.
“없이 살문서 어짜문 놈의 애기들한테 그리도 잘허셨으까. 시방 사람들은 그리 못허고 살아. 그때는 살기가 참 나쁜 세상이제. 그런디도 그렇게 넘의 자식도 애끼고 좋게 살았어.”
불편한 세상을 선량하게 살며 길 없는 세상에 사람의 길을 내어주었던 꽃 같은 사람들의 기억이 떠도는 작은 섬.
`오장치’로 이었던 노두
신정균(63)씨는 노두 울력을 이야기한다.
“쎄면(시멘트) 허기 전에는 차는 못 들와. 자갈 깔아서 사람만 포도시 다녔어. 물이 나문 노두 따라서 간짓대를 찔러놔. 글고 물이 들문 배로 자갈을 싹 실어날라. 파도에 어그러진께 해마다 하루썩 날을 잡아서 온 마을사람이 다 나가는거여. 노두가 토도 생명줄인께. `오장치’라고 짚으로 영끈(엮은) 망에다가 자갈을 여 갖고 조르라니 노두를 놓는 거여. 난중에 짚은 썩어도 자갈은 갯흙하고 다과져서 딴딴해져. 연년히 험시롱 질이 연방 널롸졌제.”
배를 타고 나갈 양이면 해남 갈두·만수·남창 쪽으로도 가고 반대편으로 완도 군외면으로도 간다. 핸드폰 따위 있을 리 없는 옛날엔 배를 부르려면 연기를 태웠다.
“봉수나 봉화 피우대끼 딱 그짝이여. 군외면 남선리(꿀이 많이 나와서 `꿀포리’라고도 불렀다) 쪽에서도 불을 피와서 여그로 들오고 그랬어.”
마을 앞 긴 돌담에 기대어 해바라기중인 신귀현(78), 서영복(76) 할아버지의 기억이다.
“옛날에는 여그에 토끼가 사람만치로 마니 살았다요. 사람은 안 살고.”
토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200여 년 전이라고 말하는 신귀현 할아버지.
“시방은 스무 집이나 사까, 20년 전만 해도 사람도 많이 살고 고기도 많이 살았제. 그때가 재미졌어. 개맥이를 허문 여그 토도 앞 바다를 뺑 돌려서 그물로 싸. 집집이 둘이썩 나와갖고 울력으로 허제. 엄청나게 잡아갖고 어판장으로 갖고 가서 인자 집집이 나놔.”
그렇듯 갯것이 넉넉한 뻘을 끼고 있지만 그래도 쌀농사 지을 땅이 절실했던 섬살이. 바다 건너 해남 땅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물때 따라 바다를 건너댕김서 농사를 지섰제. 일소도 같이 건네댕기고 그랬제.”
“토깽이 같이 생긴 섬에서 토깽이 같이 쬐낌서” 살았노라는 신동금(84) 할매.
“그 직에는 물이 귀헌께 빨래도 지대로 못해. 갈두 만수 그런디 가서 빨아갖고 와. 도라무통에다 이고 노두 타고 나가.”
3남6녀 아홉 자식을 키워낸 신동금 할매는 “내가 여장부여”라고 말한다. 큰물이 금방 삼킬 것 같은 작은 섬에서 살면서 무장무장 씩씩해졌더란다. “바람 들오문 물이 담벼락까지 쳐들어와. 무서와. 날만 새문 (이 섬을) 나가야겄다 생각허제. 그 담날 잔잔허문 잊어불어.”
날마다 어제의 고통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기를 거듭한 할매. 오늘,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는 토도 여장부가 되었다.
오체투지·묵언정진하는 어매들의 바다
너른 갯벌에 비가 오는데 원경도 근경도 다아 한 가지다. 겨울바다에 오체투지하듯 엎드린 할매들은 물 난 때를 기다려 꿀(굴)을 따거나 파래나 감태를 매는 중이시다. 이맘때면 거둘 것들이 그 밭에 꽉 차 있다.
김상엽(76) 할매는 호미 하나 들고 새벽부터 나와서 꿀을 캐고 있다. 갯물이 튀어 뻘투성이인 얼굴이다. 굴하지 않는, 묵언정진. 엎드린 시간만큼 그 뻘과 한몸되어 가고, 한몸 되어가는 만큼 다라이가 채워진다.
“영근 것, 여문 것만 골라서 깨는 거여. 태풍에 궁글러갖고 꿀이 많이 곯아 불었어.”
뻘에서의 퇴근시간은 “뻗칠 때까지”이다. 하지만 그건 말일 뿐, 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뻗쳐도 뻗친 것이 아니다.
일을 시키는 것은 `안즉 비어있는 다라이’다. 줄로 허리에 묶어 걸음걸음 끌고 다니는 다라이. “채와야제!”
신동금 할매한테 일을 시키는 것은 `일하는 유재’다. “오늘은 비온께 안 올라 했는디 놈들이 나온께 눠 있을 수가 없어. 나 한차 눠 있으문 기우른(게으른) 사람이제.”
할매는 꿀을 캐갖고 나오는 길에 저만치에 따로 매두었던 감태 한 뭉태기를 챙긴다. “꿀은 이녁 논밭이나 똑같애. 임자가 다 정해져 있제. 감태는 임자 없어. 아무나 매.”
감태는 오늘의 밥상에 `일용’할 만큼이다.
“곧 물 들어오겄구만. 지금은 조금인께 그라제, 사리 때는 물들기 시작하문 깜짝할 새 들어와불어.”
대체나, 갯벌을 걷는 소리도 차츰차츰 달라지는 듯하다. 짜박짜박에서 찰박찰박으로, 물기가 스며든다.
할매의 고향은 토도. 태어나서 지금껏 떠나보지 않은 `바닥’이다. 그 바닥에 엎드려 살아온 동안 야든 넷이 됐다. 할매는 “야든 야섯, 일곱 살 때까지”로 `바닥 정년’을 정해두고 있다.
`꿀 하러 간’ 아내(신동금 할매)를 기다리는 사이 이철용(90) 할아버지는 “앙거서 꿀 깔라고” 스티로폼 부표를 새로 주워 왔다. “쓰던 것이 다 짜부라졌어. 요놈이 마치 쓰겄네.” 낡은 스티로폼 `의자’가 흡족해서 할배는 웃는다.
토도의 여느 주민들처럼 할아버지는 바닷길 건너 갈두마을에서 쌀농사도 짓는다.
“해남에가 농사가 있소, 쌀농사. 섬에는 밭만 있어. 옛날에는 힘들었제. 건네갈 다리도 없고. 산 것이 오죽할 것이요, 배로 나가고 들오고.”
“그전에는 많이 고통받았제”란 말로 그 긴 세월을 담담하게 줄이는 할아버지. 물때 따라 들고나며 농사 지어 9남매를 건사했다. “자석들이 한나도 성가신 놈들이 없소.”
`갯일에서 멀어지라고’ 뭍으로 멀리 떠나보낸 자식들
“물 날 때 우르르 나가. 물때 봐서 일헌께 낮으로 물 안나문 그날이 쉬는 날이여. 시방은 발달돼서 마빡에다 불 붙이고 댕임시롱 일허제. 물때 따라서 밤에 캄캄헐 때도 나가.”
`완도떡’(76) 할매는 옛날 고생이 더 독했노라 한다.
“해우(김)일이 질로 뻗친 일이여. 뜯으러 가야제 떠야제 건장 매갖고 널어야제 벳겨야제 발장 추려야제. 밤중이고 새복이고 없이 그 땡땡 시한에 손을 몇 천번 넣어야 해우가 되야.”
할매는 노두 건너 남창장에 꿀도 갖고 나가고 파래도 갖고 나간다. 네 사람이 모아서 택시를 불러타면 남창까지 만원 택시비를 넷으로 갈라 낸다.
“해남장에서 토도포래를 알아줘. 깜짝 반김시롱 다퉈서 사가.”
친정어머니 정금순(85) 할매랑 앞집 뒷집에 산다는 박정숙 아짐.
“옛날에는 어머니가 이런 것 해서 우리 믹이고 살았는디 인자 바꽈서 살아. 어머니가 들앙거서 내가 해다 드린 것 잡수고 살아. 여그 바닥이 보물밭이여. 석화 지가 저절로 독에 붙어서 꽃숭어리같이 커. 옛날 같으문 숭어리 진 놈 퐁퐁퐁퐁 담아불문 된디. 바다가 변한께 빈탕이 많애. 골라서 담을란께 얼능 못해.”
평생 깐 꿀껍데기로 산 하나는 쌓았을 거라는 신경심(82) 할매. 평생 뻘에 발 담그고 살았지만 호미 들고 뻘바닥에 내려서면 반찬거리가 널려 있는 것이 내 복이구나 생각했다.
“바닥에서 나는 것은 다 갖다 묵제. 꿀이야 포래야 반지락이야 낙자야 샐팍(사립문)만 나서도 철철이 반찬이 쌔뿔어. 게으르문 못 묵어.”
“이녁이 부지런하기만 하문 묵고살 것이 있는 곳”이 토도란다.
김상엽 할매는 물 들어올 시간이 임박해서야 뻘에서 나왔다.
어매가 해놓은 꿀과 감태를 실으러 경운기를 끌고 온 아들과 함께 갯물에서 감태를 헹군다.
겨울 솜이불 빨래하듯, 물 먹은 감태의 무게를 이겨야 하는 일.
“매는 것도 힘들고 시치는 것도 힘들고.”
하소연하는 어매 곁에서 “맨나 다리 아프시담서도 요것 하실 때는 멀쩡하셔요”라고 고하는 아들 박병현(50)씨. 억척이나 경륜만으로는 감당할 수는 없는 노동이다. 광주에 사는 병현씨가 자주 고향으로 달려오는 이유다.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를 봐도 글잖애요. 부모한테 무작정 일하지 말라고 화내고 말리는 것보담 당신 하시고자픈 대로 하시게 하고 틈나는 대로 도와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토도 뻘에서 나는 감태·꿀·꼬막·반지락은 그에겐 그리운 고향 맛이자, 어매의 시린 노동이다.
병현씨가 고향마을을 떠난 것은 소년 시절. “우리 마을 안에도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토도분교라고. 근디 엄니가 나를 일찌감치 광주로 유학을 보내불었어요. 요 일에서 멀어지라고 머얼리 보내버린 거죠.”
`요 일에서 멀어지라고’ 자식들을 뭍으로 떠나보내면서 평생 `요 일’로 자식들을 키운 어매들이 계신 곳. 그곳이 그에겐 고향이다.
섬의 아이들은 그렇게 빨리 부모 곁을 떠나고 고향을 가슴에 묻고 산다.
“긍께 그리움이 많죠.”
“뻘에서 걸음마를 새로 배왔어”
민수연(70) 할매도 오전내 뻘에 엎드려 있다가 방금 집에 돌아온 참이다.
“저 옷을 봇씨요. 옷이 말해주제. 일했다고.”
뻘로 얼룩진 옷이 마루에 널려 있다.
“설 돌아온께 인자 무장 더 바빠져. 새복에 어실어실하니 먼 디 사람 안 보일 때부텀 나가. 설 전에 꿀도 폴고 감태도 폴란께.”
쉴 날 없다는 아짐. “나는 복 중에서 일복이 많애.”
해남 마산면에서 시집온 날로 걸음마도 새로 배웠더란다.
“뻘에서 걷는 것을 다시 시작하는 거여. 첨에는 장화도 신을 줄 몰랐제. 장화 신고 걸을라그문 엎어져불고 자빠져불고.”
토방에 놓인 아짐의 장화만 해도 수 켤레. “장화만 많애. 여그서 살문 장화부자 될 거배끼 딴 길이 없어.”
해남읍에서 친정에 잠시 다니러 온 딸 서옥자(43)씨는 토도분교의 첫회 졸업생이다. 1979년에 38명으로 개교한 토도분교는 1995년에 폐교되었다.
“2학년때까지는 저그 물 건네 만수(마을)로 학교를 댕였죠. 내욱으로 선배들은 저어 좌일로 댕였고.”
노두길 건너 학교 다닐 적에는 눈물콧물 뺄 일도 많았다.
“그 전에는 자갈로 된 노두를 건너 댕였는디, 내가 또래들보다 키가 작은께 물살에 휩쓸린 적도 여러 번이었어요. 물 위를 건네다보면 어지럽고 착시현상이 생긴께. 암튼 물이 어중간하게 빠진 날에도 학교는 기언치 가야만 했어요. 물에 빠질 뻔해서 못 갔다고 했다가 엄마한테 뚜들겨 맞은 적도 있어요.”
“오매, 땐중도 몰르겄는디 때렸다그네. 내가 너를 업어다도 델다주고, 물때가 어중간할 때는 배로 태와다도 주고. 그 기억은 안 나냐?”
“나는 업힌 기억이 없는디.”
“워따 환장하겄다.”
서로 다른 기억을 두고 어매와 딸이 웃는다.
“어린 것이 못 간다고 울고올 적에 어매 맴이 오죽하겄소. 그래도 그때는 학교를 보낼라고만 하는 맴인께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하고 그랬겄제. 여그 아그들은 참말로 고생이 많앴어.”
두런두런 말소리에다 와크르한 웃음 소리까지 번져나는 곳은 김순심 할매네 집마당의 비닐하우스 안. 딸 셋이 함께 둘러앉아 꿀을 까는 중이다.
“우리는 1월달이문 고향집에 꼭 와요.”
토도에서는 1월이 농번기. `꿀철’ 돌아오면, `꿀 까러 가자’고 부러 약속하지 않아도, 서울 사는 자매들이 알아서 모여든다.
꿀 까는 딸들 뒤에서 김순심 어매는 새참으로 삼겹살을 굽는다. 그러면서도 연신 “저닉에는 뭔 맛난 것을 해주끄나” 묻는다.
어매는 딸들 온다고 진즉부터 온갖 것들 장봐다 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울 아그들 믹일” 생선들도 처마 밑에 조르라니 매달려있다. 어매의 환영 꽃다발 같다. 학교 때문에 일찍이 부모 품을 떠나 뭍으로 간 자식들. 어매한테는 이 `꿀철’이 자식들 다시 끼고 살아보는 며칠을 안겨준다.
마을 앞 길목이 소란스럽다. 택배를 부칠 요량으로 마을 사람 몇이 모태서 해남 북일면 택시를 부른 것이다. 뻘에서 캐고 밭에서 거둔 것들을 담은 상자들이 차곡차곡 바리바리 실린다.
도시 사는 자식들한테로 가는 택배상자들이다.
“받으문 딸네들은 울제. 며늘네들은 좋다하제.”
“뻘에 산 사람들은 뻘이 불러”
환한 대낮의 귀로(歸路). 점점 물이 차오르면서 배들이 속속 들어온다. 토도 건너 해남 갈두마을 40여 호도 겨울이면 거의 꿀 작업에 나선다. 물 났을 때 따서 모아두었던 꿀망을 물 들면서 배에 싣고 오는 것.
“오매 인자 살겄네, 살겄어. 나가서 일하다 오줌 마로문 그거이 젤로 힘들어.”
뭍으로 돌아온 이의단 아짐(68)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독(포자 붙으라고)을 많이 갖다논 사람은 꿀을 더 많이 하고. 아이고 근디 많이 놔도 힘들어. 나는 밭이 째까여. 넙덕지만 해.”
싸그락싸그락, 싸드락싸드락…. 꿀이 가득 찬 망태를 갯물에 헹구는 소리가 겨울 바다에 소란스러운 활기를 보탠다.
“이라고 헹궈놔야 까기가 좋아. 헹구는 거이 힘들어. 세상에 힘 안든 거 있가니. 다 힘들제.”
갯물 속에서 무거운 망태와 씨름하는 일, 쉽지 않다. 바닷물에 굴망태 넣고 씨름하다보면 손은 금세 땡땡 곱고 얼어버린다.
“이녁 몫은 이녁이 해야겄다 그 맘으로 허는 거여.”
꿀을 캐오자마자 이어지는 `까는’ 노동. 포구 앞 양지바른 자리에선 아짐들이 빙 둘러앉아 꿀을 까고 있다.
“바다에 갔다 오문 바로 또 일이여. 여그 꿀이 지 혼차 뻘에서 큰 것이여. 달고 향이 좋아. 서로 도라 그래. 택배 부칠란께 바빠.”
바닷가 어매들의 `꿀 따고 까고’는 겨울 한철 내내 이어진다. 꿀차두를 다 내려놓고 한숨 돌린 박정식(78) 할배.
“뻘에 산 사람들은 뻘이 불러. 눈이 펄펄 오고 바람이 쳐도 들어가.”
한번 들어서면 `똥구녁에 물을 잘잘잘잘 달고 나갈 때까지’ 붙드는 게 뻘바닥이란다. 들이는 몸공이 헛되지 않은 곳이 뻘바닥이란다.
하여 그 바닥의 어매들, 오늘도 진 자리로 진 자리로만 발걸음 옮기며 `이녁 몫’의 삶에 묵언정진중인 것이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