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적 평가체제가 되레 교실 붕괴시켜

한국사회에서 이제는 학교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한 논의에 대안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학교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학교를 벗어나서는 생존과 성취가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지닌 사회에서는 엉뚱한 주장으로 비치거나 심지어는 비난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각자의 교육에 대한 경험과 이슈화된 사회 문제 등을 종합하여 검토하다보면 학교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결코 이상적이거나 급진적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들의 삶을 다시 올바르게 되돌리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소를 팔면 `출세’하던 시절
기계공학과를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한 친구가 기계공학과에서 배우는 내용들이 너무 어려운데다 싫었기 때문에, 즉 적성에 안 맞았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수없이 했다. 그때마다 시골에 계시는 노모는 상경해 “내 소원은 우리 집안에서 학사모 쓰는 사람 한 사람 보는 것이다. 십년이 걸려도 좋고 성적이 나빠도 좋으니 제발 졸업만 해다오”라는 호소를 눈물과 함께 쏟아냈었다. 그럴 때면 친구는 자신의 결심을 내려놓고 노모를 위해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친구는 다른 학생들이 사년이면 마칠 대학을 오년 반 만에 마쳤고 소원대로 졸업식에서 어머니의 머리에 학사모를 씌워드릴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졸업 후 관련 전공을 살리지 않았고, 현재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한때는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자녀에게 고등교육을 시키려고 했다. 교육의 결과는 자녀들이 교사가 되기도 하고, 대기업에 취업이 되기도 하는 등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계층이동, 신분상승, 출세라 부를 만한 삶의 질적 변화가 이뤄졌다. 투입과 결과간의 인과적 관계가 매우 확실하고 분명해 보였다. 소를 팔면 교사가 되었고, 논을 팔면 의사가 되었다. 그렇기에 비록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내용이 빈곤하다하더라도 쉽게 감춰질 수 있었다. 70~80년대 초등학교에서 60여 명 정도로 이뤄진 학급들이 2부제 수업을 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토대로 기본적 교과서와 참고서로 예습과 복습을 해도, 데모로 대학수업에 결손이 많아도 교육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학교서 최고 되기 위해 학교밖 의존
이제는 달라졌다. 학교가 최고의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 사교육의 활성화를 통해 발각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가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평가체제 때문이었다. 즉 학교는 학생에게 객관화된 점수를 부여하는 기능을 위임받게 되고, 학부모들은 그 체계 안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사교육이라 불리는 학교 외부의 교육체계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은 학교가 최고의 교육이 아니고, 평균 혹은 최소의 교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학교 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학교 밖 교육에 의지해야만 했다. 단순히 시험 중심의 교육만 보더라도 학교는 최고의 교육기관 또는 꽤 쓸만한 교육기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교실붕괴 현상의 원인은 이미 학교제도 자체 내에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학부모와 학생들의 인성문제나, 학생인권조례 때문이 아니다.
한국교육의 저급함은 경제수준 향상에 따라 해외 유학생이 증가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됐다. 과거 80~90년대에는 주로 대학 혹은 대학원 중심으로 유학을 갔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초·중·고등학교 중심으로 유학을 많이 가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분쟁이나 학살이 만연한 불안정한 지역을 탈출하듯이 한국학교교육에서 대규모 탈출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의 시험 중심의 교육에 부적응했던 자들이거나, 삶과 교육을 병행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교육을 희망했던 자들로 외국의 교육내용을 습득한 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비차별적 경쟁우위를 얻고자 했다. 그들은 한국이 주입식 교육이고, 입시 목적의 교육이어서 인성과 창의력, 문제해결력, 비판력, 의사소통능력 등을 발달시킬 수 없다는 점을 유학의 이유로 언급한다. 예전에는 소를 팔았던 가장들이 이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내다팔아야 하고, 더 나아가 가족과의 기나긴 단절과 고독을 감수해야 했다. 교육이 기성세대의 궁핍과 가정 파괴의 주범이 된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고, 사회와 삶에서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해외 교육과 오직 대입을 위해 필요하지도 않은 과목을 깊이도 없이 12년간을 외우는 죄수 같은 교육은 비교조차도 부끄럽다.
학교교육의 질적 저하와 고비용의 문제를 드러낸 세 번째 지점은 인터넷이다. 요즈음 학생들은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을 어른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배운다. 그들은 세상물정에 대해 부모보다 더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은 영악함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원한다면 외국어에서부터 예술·철학까지 스마트폰의 팟캐스트를 통해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해외대학의 저명한 석학 강의도 어렵지 않게 무료로 청강할 수 있다. 클라우드 펀딩방식처럼 계속해서 진화하는 인터넷 사업모델은 학교교육의 질 저하와 고비용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갈 것이다.
국가가 평가의 기준 내려놓는다면?
이 지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어두운 교육현실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핵심에는 `평가’가 있다. 국가가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평가의 권리가 문제의 중심에 있다. 만일 국가가 평가의 지축임을 내려놓는다면 일시적 혼란은 있을지라도 굉장히 다양한 가치들이 햇빛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상이 오랜 기간 불가능하다면 부모들과 학생들이 국가가 요구하는 평가기준을 사양하고 자신만의 교육적 목표와 평가기준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검정고시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포함한 학교 밖 청소년들이 공교육체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자괴심을 버리게 되고, 가정에서 부모가 하는 홈스쿨링과 지역사람들이 일궈낸 공동교육 공동체 등이 새로운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고, 학교 안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자신만의 교육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교육을 욕하면서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학교를 욕하면서 학교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교육적 가능성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예술적 영역을 발달시키고 싶은 아동이나 청소년이 관심 있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연구하고, 몇 명의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다른 단체와 지역의 활동을 체험하고, 관련 영역의 종사자들과 논의와 토론을 진행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면서 삶을 `놀이’처럼 즐기면서 잠재력의 상한선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국가인재양성중심의 교육제도에, 직업인으로 전락한 다수의 교사들에게, 그릇된 사회적 가치와 교육제도의 문제를 이용하는 사교육시장에, 학생모집을 통해서 재단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대학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국가가 하지 않는, 학교의 교사들이 하지 않는, 대학이 하지 않는 것을 오직 지속적으로 진정한 교육을 희망하는 자들이 학교 밖의 그 어떤 변방, 제3섹터에서 교육의 싹을 틔워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교육이란 삶에서 그리고 평생 동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정의석<미래학습상담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