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리 할매들이 사는 법

“버선이 겁나 따수와.”
장에서 파는 2천원짜리 꽃버선이 촌 어매들에게는 겨울을 나는 필수품. 함께 둘러앉으니 부채꼴 모양으로 꽃이 피었다. 65세부터 회원 자격이 생기는 장흥 안양면 사촌리 마을회관의 막내는 77세. 오늘은 이요월(86), 신귀녀(87), 김기자(85), 이일례(82), 조복임(77), 이순임(81), 김미순(79), 김공심(79), 김귀님(81) 할매가 한데 둘러앉았다.

갯바닥으로, 들로 동동거리며 하냥 엎디어 살아온 생애. 할매들의 생이 꽃피었던 시절은 언제일까. “전에 시상은 이런 존 시상이 아니여”에서 시작해 “우리는 괜찮해. 우리 앞에 돌아가신 어매들이 불쌍허제. 우리는 끄터리라도 존 시상이여”로 귀결되는 할매들의 이야기. 달라진 세상을 사는 격세지감이 유장하다.

화장지
“우리가 오래 살았어”라고 말하는 김기자 할매에게 ‘시상’은 세 번 바꿔졌다. 칙간에서 변소로, 그리고 화장실로의 변천으로 세상의 변화를 간명하게 꿰뚫어내는 할매.
“내가 째깐한 애기 때는 칙간이었어. 칙간일 때는 지푸락으로 새내끼로 딲아. 음마나 살다본께 변소가 되아갖고 인자 신문지나 종우떼기 같은 것으로 딲음서도 호강헌다고 했어. 근디 시방은 화장실이 됨시롱 화장지 시상이 왔어.”

칙간-지푸락이나 새내끼, 변소-신문지나 종우떼기, 화장실-화장지라는 짝맞춤이 명쾌하다. ‘화장지 시대’는 왔지만, 여전히 화장지란 촌에서 선뜻사다 쓸 수 없는 ‘고급 신문물’이었던 시절, 며느리가 납셨더란다.

“메누리가 온다근께 꺼멍비누 숨겨놓고 흰비누 내놓고 화장지 시개를 포도시 사다놨어. 문지방에다만 걸어놓고 변소에는 걸어놓도 안해. 근디 하들이 화장실을 간다금서 뭐이라뭐이라 말을 함시롱 둘둘둘 화장시를 손에다 감고 있네! 아, 한하고(한없이) 감은단말이요. 고만 감아도 되겄는디! ‘아야 고만좀 감아라’ 속으로 그랄적에 이내 가심이 다 닳아질라그래. 즈그들 온닥 해서 큰맘묵고 사다논 것인디, 내 속으로는 한두 쪽만 감으문 쓰겄는디 아, 한하고 감고 자빠졌네.”

둘둘둘 ‘한하고’ 화장지를 감던 그 때 그 시절 큰아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연하는 할매. “근디 인자는 약장시가 공것으로 준께 화장실에 쟁여놓고 산당께.” 그래도 여전히 할매들에게 화장지란 ‘두어 쪽’쓰면 족한 물건.


‘물 쓰듯 한다’는 말이 사촌리에선 다르게 쓰였다.
“함부로 못쓰는 것이 물이여. 기영 친 물로 걸레 빨고 걸레 빤 물은 덧밭에 부서. 물을 세 볼라 써. 물을 안 애끼문 죄로 간다고 어매들이 갈쳐.”
어매들이 가르치지 않아도 물 긷는 법은 절로 배웠다.
“샘이 시 반데가 있었어. 새복이문 나서서 질러와야 돼. 서로 질러간께 안 떠지문 샘에 카마니 들어가. 조금썩 조금썩 대롸. 바가치로 물을 긁어모은단 말이여. 물 많썩 쓰는 명절에는 잠을 못 자. 물 대롸서 쓸라고, 밤 열두시가 넘어도 물을 퍼날라.”

처음에는 옹구동우(동이)를 이다가 나무판자로 만든 동우를 이다가, 또 고무동우를 이다가 그 담에 나온 것이 양철동우였다. “그놈으로 한께 물도 많이 댐기제, 개봅제, 오매 호강한다 했제.”
새벽에도 오밤중에도 물동우 나르던 각시들.
“얼매나 이었는가 난중에는 딱 이고는 손을 놓고 댕여. ‘졸업’이 돼 갖고.”

‘임질’의 달인들이 된 어매들은 별별 것을 다 이었다.
“똥소매도 이고 가. 밭이 멀어. 오전내내 죽기살기로 다니문 야달 번을 댕개. 냄새 난다고 안헐 일이 아녀. 거름도 비료도 없는 시상인께.”
무엇이든 이어야 활발한 어매들. “서울 간께 인 사람이 한나도 없드만. 다 쳐다보더랑께. 촌어매들은 자석들 집에 갈라문 무조건 이고 간디. 이어야 보따리 한나라도 더 들고 가제.”

물 한 방울을 기다려 모으던 시절에서 꼭지만 돌리면 물이 쏟아지는 세상. 며느리들은 물을 물쓰듯 쓰는데 할매들한테는 ‘물세’가 무섭다.

전기
조복임(77) 할매한테 사촌리에 전기가 들어온 때는 “우리 큰아들이 시방 쉰셋인디 그 머이매가 열다섯 살 묵었을 때.” 40년 전 사촌리의 밤은 어두웠다.

생선다라이 이고 타지로 장사를 다녔던 할매한테는 “애린 자석들만 오막살이에 놔두고 돌아댕긴께 불 날까봐 무솨서 항시 조마조마했던 시상”이었다.

“그때는 막차를 떨치문 안양 사거리에서 혼차 밤질을 걸어와. 십리질이여. 하래는 캄캄해져서 들어선께 애기들이 숙제를 하다가 호롱불을 써놓고 그냥 잠이 든거야. 쪼까라도 늦었으문 깐딱 큰일이 났제.”

호롱불 쓰던 그 시절엔 석유기름을 병에 받아다(사다) 썼다. “수문리 가문 장사가 이고 와서 폰 디가 있어. 그거 한 벤썩 사다 놓고 불 쓴디 얼매나 애끼제. 부모가 되어갖고 ‘지름 아까운께 언능 불끄고 자란마다’ 그럼시롱 자식들 공부를 말겼제.”

전기가 들어오고 얼마나 지나면서 ‘테레비시상’이 열렸다. 텔레비전을 맨 먼저 산 이아가씨네 집은 ‘마을극장’이었다.
“그 집이 질로 부자여. 아자씨 이름이 ‘아가’여. 십원인가 백원인가 주고 두어시간썩 봐.레스링도 보고 이미자도 보고.”
한정없이 볼 수는 없고 궁뎅이 띠기가 서운했던 ‘유흥’의 시간이었다.

난방
고생 중 큰 고생은 ‘나무고상’이었다. “시한에는 나무장만이 크나큰 일이여. 그때는 쩌어그 높은 삼비산까지 올라댕김서 나무를 했어. 30리질을 걸어가. 솔갱이같은 것은 찌다가 산감한테 앵기문 큰일나. 근께 속에다 여코 다른 놈으로 덮어갖고 곰촤(감춰). 포도시 나무를 모태문 인자 뭉꺼갖고 이고 와야 헌디 초짜들은 나뭇집을 어찌고 짤지를 몰라. 이문 버글바글 떨어져부러. 눈물 나제. 지고 옴시롱은 몇 본을 쉬어. 앙그도 못허고 조깨 섰다가 와.”
나무가 귀하니 논두럭 풀도 베어다 썼다. 오랜 장마에 잠깐 나는 볕이 그리도 반가웠다.
“나무를 못 몰린께 쌩솔을 갖다 때. 불 땜시롱 엉엉 울어. 그러다가 볕 반짝 나문 집집이 나무 몰리기 굿이여.”
그렇게 살다 곤로가 나오고 연탄 시절이 오고 이제 할매들이 되어 ‘보일러’를 만났다.
방을 뎁히는 일에도 첩첩 몸공을 쌓아야 하던 세상을 살아온 어매들에게 ‘보단(버튼)만 뽀깡 누르는 시상’은 ‘만고에 핀 헌 시상’이다.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취사를 완료했습니다’ 전기밥솥이 저 일헌다고 몇 번을 소리를 냄시롱 생색을 내는 세상이다. “확독에 보쌀 문대서 불도 시 볼로 때서” 밥 한 솥을 지어내면서도 ‘취사를 완료했다’고 생색 한번 못내 본 어매들.
“그때는 독아지에 양식 안떨어지는 것이 소원이여. 보쌀도 원대로 못 북어. 그놈을 맷돌에 갈아서 보리죽을 쒀. 한끼라도 늘어묵을라고 가리를 애께. 근께 죽이 밀개갖고 사람 얼굴을 비쳐.”
참으로 높은 고개가 보릿고개였다.
“독아지를 긁어도 양석 한 톨이 없은께 솥에다 기냥 물만 붓고 불을 때. 놈 부끄런께. 굶었단 소리 안 들을라고.”
굴뚝에 연기라도 내려고 물만 붓고 불을 때던 것을 ‘헛불 땐다’고 했다. 그런 시절을 버텨낸 힘은 무엇이었을까. 할매들의 말 속에 명징한 답이 있다. “그때는 나놔묵는 시대여.”
“거지가 문간에 들어서문 밥 묵다가도 이녁 식구 밥 덜어서 채려줘. 명절에 쑥떡을 모냐 헌 집은 당아 안한집을 갖다줘. 방안 지사만 지내도 온마을이 잔치를 해. 아척밥부터 다 모태서 묵어. 없다고 해도 뭐이든 나놔묵어.”
내 식구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인데 아이들은 접시들고 ‘음식 심바람’을 많이 했다. 가난한 어매들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없이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
그 마음 한결 같아서 오늘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밥상을 차린다.
“누구 지내가지만 해도 들어오라고 해서 믹여서 보내야 속 씨언해. 넘의 자식도 내 자식이여.”
‘밥묵은게 좋네’가 아니라 ‘믹인게 좋네’의 마음이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살아나오면서도 가장 귀한 마음은 지켜온 어매들. ‘흔헌 것이라곤 없었던 세상’을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온 생애 참으로 장하시다.

글 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 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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