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세월호의 숫자들

4월16일

 “우리는 진짜로 죽을 위기야. 이 정도로 기울었다. 오늘은 4월16일.”

 그 목소리는 무구하고 천진해서 더 가슴 아프다. `죽을 위기’를 느끼는 순간에도 어른들의, 국가의 `구조’를 한치도 의심치 않았기에 가능했을 명랑한 목소리다. 핸드폰 동영상에 단원고 학생고 김시연 양이 남긴 `오늘은 4월16일’이란 기록이 더욱 뼈아픈 이유다.

 세월호가 침몰중인 오전 8시50분부터 시작된 김시연 양의 동영상은 잠시 중단됐다가 5분 뒤인 8시56분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9시41분, 김시연 양은 마지막(이 돼버린) 기도를 남긴다.

 “우리 반 아이들 잘 있겠죠? 선상에 있는 애들이 무척이나 걱정 됩니다. 진심입니다. 부디 한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수학여행) 갔다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0과 304

 `전원구조’는 결국 `구조 0명’으로 수정되었다. `에어포켓’이니 `골든타임’이니 `정조시간’이니 `지상최대구조작전’이니 희망을 가장한 수많은 말들이 명멸했지만, 침몰된 배에서 구조된 사람은 결국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희생자·실종자 숫자는 304명(이 또한 잠정적 숫자라 했다). 숫자는 다르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0은 304와 동의어다. 숫자 `0’과 `304’는 대한민국이 과연 국가인가를 묻는 가장 짧고도 서늘한 상징이다.

 `거리의 시인’ 송경동은 말했다. “세월호 선장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구속됐듯이 신고 이후 `구조자 0명’을 기록한 대한민국의 선장, 박 대통령도 구속돼야 한다, 그게 공평한 게 아니냐”고.



42명

 세월호의 일반인 희생자는 42명. 그 희생자들의 남겨진 가족 중엔 엄마 아빠 오빠를 다 잃고 가까스로 혼자 살아남은 5살 짜리도 있고, 엄마 아빠 형을 다 잃고 극적으로 구조된 7살 짜리도 있다.

 5살 여자아이의 큰아버지 권오복씨는 “아직 죽었다고 말은 못 하잖아요. 제주도로 이사 가기로 해서 갔는데 자기만 놔두고 다 이사 갔다고 그러면서 우니까…”라고 남겨진 아이의 참담한 상황을 전했다.

 7살 조카의 보호자인 삼촌 지성진씨는 일반인 피해자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상대적 무관심을 조심스레 호소한 바 있다.

 희생자들 중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 노부모를 모시던 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을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들에 대해 정부의 관심과 배려는 턱없이 부족했다.

 청와대 주최로 진행된 유가족 대표단과의 대화에서도 일반인 희생자의 유가족은 없었다.



2대 VS 121대

 “17일 어제 항의 끝에 겨우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인원은 채 200명도 안됐고, 헬기는 단 2대, 배는 군함 2척, 경비정 2척, 특수부대 보트 6대, 민간구조대원 8명이 구조작업을 했습니다. 9시 대한민국 재난본부에서는 인원 투입 555명, 헬기 121대, 배 169척으로 우리 아이들을 구출하고 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사고 3일째인 4월18일 실종자 가족들이 낸 호소문이다.

 4월16일 정부는 182명의 잠수부를 확보했지만 3차례에 걸쳐 각 6명, 6명, 4명이 잠수를 시도하는 것에 그쳤다. 안전행정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잠수요원 532명을 지속 투입하였습니다”라고 한 4월18?19일에도 실제 투입된 잠수사는 76명에 불과 했다. 사고 초기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냈던 주요 언론은 정부보도자료를 `받아쓰기’하여 `구조인력 700명’ `함정 239척’ `최대투입’ 등 실제 수색상황과는 동떨어진 보도로 유가족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40초

 4월16일 오전 9시45분, 기울어가는 세월호에 도착한 해경 123정은 정확히 조타실 앞에 배를 대고 선장과 조타실 선원들을 탈출시킨다. 이때 조타실 왼쪽으로 4층 객실 창문 두 개가 보인다. 당시 이 객실에는 단원고 2학년 7반 26명과 8반 24명 등 50명이 갇혀 있었다. 맨 왼쪽 창문이 아

 직 물에 닿기 전인 이때 일부 아이들은 객실 창밖으로 조타실을 지켜보고 있다.

 9시49분까지 약 5분간 선박직 승무원들만 구한 채 배를 뒤로 빼서 세월호에서 멀어진 123정은 이후 해경고무보트로 실어오는 좌현 탈출 승객들을 경비정에 태우고 다른 수송선으로 옮겨 태우는 데 15분여를 낭비한다.

 10시6분경에야 다시 세월호 가까이 접근한 123정은 선수 3층 다인실 창문 유리창을 깨기 시작한다. 10시6분55초에 망치질을 시작해 10시7분36초에 유리창 대부분을 깨는 데 성공한다. 유리창 하나 깨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40초. 침몰하기 전까지 조금 더 일찍 객실들의 유리창을 깨뜨려 승객들이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 줄 수 있었던 시간들을 다 허비하고 그들은 단지 유리창 하나만을 깼다.

 <우리가 방금 들은 구원요청은 차라리 인류 전체에게 보내어진 거야. 단지, 우리가 그걸 원튼 원치 않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는 인류란 우리 둘뿐이지. 우리가 곧 인류 전체야.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사람노릇 한번 해보세!>(사무엘 베게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

 `더 늦기 전에’ 구원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152분

 세월호가 급선회한 4월16일 오전 8시48분부터 11시20분 선수 일부분만 남기고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2분. 배 안에 300여 명이 갇혀 구조의 손길을 기다릴 때 해경 구조선과 헬기는 적극적인 선내 진입과 퇴선명령을 시도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물에 뛰어들어라”고 고함만 쳤어도 적지 않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9시48분, 남겨진 동영상 속 세월호의 아이는 아직 웃고 있었다.

 “친구들은 울고 있는데 난 구조될 거 기다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대기하라고 해서 대기하고 있어. 친구들이 울고 있어서 달래러 갈게.”

 “엄마 말 못 할까봐 미리 보내 놓는다. 사랑해.”

 그 시각 아이들이 카톡에 남긴 메시지다.

 “엄마. 엄마 미안해. 아빠도, 너무 미안하고. 엄마,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정말….”

 10시3분, 친구의 폰을 빌린 아이는 어른들을 원망하지 않고 엄마 아빠에게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절박하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긴 이 시간 동안 해경의 대처는 “구조하려는 의지가 있었느냐”는 의구심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절체절명의 시간, 304명의 운명을 가른 시간. 길었기에 더욱 아쉽고, 길었기에 더욱 원통했다.



25번

 25분 동안 무려 25통의 통화를 시도했다.

 단원고 2학년5반 고 박준민 군이 엄마를 애타게 찾은 건 4월16일 오전 9시11분. 배가 기운 뒤 20분을 참다가 송신 버튼을 눌렀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이후 25분 동안 준민군은 무려 25번이나 엄마와의 통화를 절박하게 시도했다. 하지만 전화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자동으로 끊겨버리기만 했다.

 9시39분에야 극적으로 전화가 연결됐을 때, 준민 군은 “별일 없을 거야”라고 오히려 엄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배가 90도 이상 기울었던 10시14분. 엄마로부터 마지막 전화 신호가 갔지만, 준민이는 끝내 받지 못했다.



제1일

 아이들이 찍은 15분짜리 동영상을 본다. 아이들은 탈출이 가능했던 생사가 갈리는 그 중요한 시간들을 `기다리라’는 안내방송만 믿고 해군이나 해경 아저씨들이 구조해 주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구조 지휘가 시의적절하게 이뤄졌더라면, 사고해역에 파견될 제1선의 헬기에 바로 해난특수구조대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면, 이들이 사고해역에 도착해서 바로 선실내로 진입해 대피하라는 방송을 하고 승객들이 갑판으로 탈출하도록 안전하게 지휘했다면, 그리고 이런 상황들이 밖의 구조팀과 실시간으로 통신이 이루어지면서 세월호 안과 밖의 구조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무수히 되돌려보는 그 하루,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조류가 굉장히 빨라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까?”

 jtbc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잠수부 강대영씨는 이렇게 답했다.

 “그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작업은 언제든지 가능하고 일단 유리창을 파괴하고 들어가면 그때부턴 얼마든지 살아있는 학생들을 찾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72시간

 1분1초가 급하지 않았다. 살아있을지 모를 생존자 수색을 위해 구조의 총체적 책임을 맡은 해경과 해군은 인명구조의 관건인 골든타임 72시간 동안 무엇을 한 걸까.

 생존자 구조한계시간으로, 말 그대로 이 금쪽같은 72시간 동안 배 안에서 생존자는 커녕, 시신조차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 사고 나흘째에야 선체 내 시신이 처음 발견됐다.

 심지어 정조시간에 맞춰 수중수색을 했다는 해경은 정조시각조차 잘못 알고 있었다. “(4월17일) 정조가 07시, 낮 12시45분, 저녁 7시 전후가 되기 때문에 정조 시간에 집중적으로 수색을 하게 됩니다”라던 고명석 사고대책본부 대변인의 말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날 맹골수도의 정조시각은 오전4시2분과 9시27분 등이었다.

 구조팀이 정조시간대라고 밝힌 때는 오히려 조류의 흐름이 센 최강조류 시간이었다. 사고 발생 72시간 동안 내내 우왕좌왕했던 정부의 무능은 엉뚱한 정조시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80명

 “해경이 못 한 게 뭐가 있느냐? 80명 구했으니 대단한 것 아니냐.”

 304명이 죽은 참사. 초동대처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증폭시킨 해경의 한 간부의 항의다. 한 명의 목숨이라도 천금같이 귀히 여겨 구조에 최선을 다해야 할 직업윤리를 저버린 적반하장이다.

 해경이 구조했다고 주장하는 80여 명 중 헬기로 구조된 승객과 선원들을 제외하면 실제 구조인원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투입된 경비함정만 81척, 헬기 15대, 유도탄 고속함, 유디티(UDT) 정예병력 등 동원해 구조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도자료를 뿌린 사고 첫날, 승객 45명의 목숨을 구한 것은 달랑 선박용 모터 하나 달린 `쬐깐한’ 피시헌터와 태선호 등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온 섬 주민들의 배 두척이었다.



1600억

 세월호 침몰 당일 황기철 해군참모총장이 두 차례나 최첨단 구조함인 통영함의 사고현장 투입을 준비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날 해군과 방위사업청, 통영함을 보관중인 대우조선해양은 `청해진함, 통영함 진도근해 좌초선박 구조 참가에 관한 합의각서’를 작성하고 공동서명했다.

 각서 제1조 `선박구조’에는 구조 참가 기간을 `4월16일부터 종료시’까지로 적시하고 있다. 발생하는 경비는 정산 후 다시 계약키로 했다. 제2조 `운용 및 안전’ 항목에는 대우조선해양이 조함권(함정 조정 권리)을 해군에 임시 인계한 뒤 선박(세월호) 구조 종료 뒤에는 대우조선해양이 돌려받도록 하고 있다.

 이 같은 구체적인 지시와 계약 내용은 해군과 대우조선해양이 통영함을 세월호 구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그러나 민간 잠수사와 어선까지 총동원된 참사현장에 1600억 여 원을 쏟아 부은 통영함은 가지 못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차례나 긴급지원 지시를 내렸음에도 통영함이 투입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2명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진’이라는 검색어가 포털사이트의 순위에 올랐다.

 교복을 입고 화사한 벚꽃 아래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저마다 개구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학생들. 단원고 어느 학급 단체사진 속의 이 아이들 중 2명만이 구조됐다. 사진 속 아이들이 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벚꽃.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은 필 것이나 아이들은 그 자리에 돌아오지 못한다.

 단원고 교실 화이트보드엔 누군가 `과제’를 적어 놓았다. `꼭 돌아오기’.

 2학년9반의 한 학부모는 팽목항의 가족천막에 통분의 호소문을 남겼다. <저는 제 둘째 자식에게 이렇게 가르치렵니다. 이 나라 이땅에 사는 한 이 무능한 정부와 관료들을 믿지 말라구요. 그리고 이 땅을 떠나라고 가르치렵니다.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려 눈물을 흘리려 해도 나올 눈물도 없네요. 피해자 학부모 여러분 우리 모두 다같이 이 나라 이 무능한 정부 관료들과 싸워야 합니다.-2014년 4월25일>



18살

 지난 4월15일 18세의 전현탁(단원고 2학년)군은 `민증’을 받는 기대감과 설렘을 자신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남겼다.

 “원래 생일은 그냥 넘어가는 편인데, 이번 생일(4월15일) 지나면 제 `민증(주민등록증)’이 나오겠네요.”

 그러나 현탁이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2만 원

 `내일(17일)까지 쉽니다.’

 단원고 부근에서 `세탁소 편의점’을 하는 단원고 2학년 전현탁군의 어머니가 4월16일 가게 앞에 붙여놓은 메모다. 그 `내일’은 오지 않았다. 진도로 내려간 현탁이 어머니는 오래도록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 사이 세탁소 문에는 동네 주민들이 붙인 노란 쪽지가 늘어났다. “잘생긴 현탁아. 엄마가 울고 있어. 오늘은 꼭 나와주길.” “세탁소 아주머니 힘내세요! 아들 돌아올 거에요. 힘내세요!”

 현탁이 엄마가 `현탁이 찾았어요’라고 그 문에 답장을 쓴 날짜는 5월5일.

 “아들을 보내고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다시 펼쳐봤습니다. 아들에게 해준 게 너무 없었습니다. 진도에서 엄마들끼리 수학여행 보내면서 용돈을 얼마 줬는지 서로 물어봤습니다. 대부분이 `10만원씩 줬다’는데 저는 2만원밖에 못 줘 미안해 또 울었습니다. 그런데 현탁이를 찾았을 때 지갑에 2만 원이 그냥 있었습니다.

 `제주도는 물도 맛있으니까 맛있는 것 많이 사먹어’라고 했는데 용돈도 쓰지 못한 채 갔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부회장 조광작 목사는 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망언을 했다. 그의 말은 반증한다. 가난이 죄가 되고, 가난이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되는 이 나라의 현실을.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피멍 든 가슴에 돌팔매질을 하는 패륜이 `사람’이 아닌 `돈’을 섬기는 목사에 의해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의 말씀은 어디로 팽개쳤는가.



1시간30분

 진도실내체육관 옆 공설운동장.

 구급차 한 대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들어온다. 팽목항에서 출발한 차다. 군인들이 구급차에서 시신을 운구해 헬기에 옮기고 이륙하는 헬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한다.

 시신 한 구를 실을 수 있는 `UH60’ 12대와 두 구를 실을 수 있는 `CH47’. 육군 항공작전사령부가 운행하는 헬기다.

 사고 초기 “그냥 차를 타고 시신을 옮기겠다”고 하던 유족들은 사고 3주차가 되면서 시신 훼손이 심해지자 헬기를 찾기 시작했다. 구급차로 4~6시간이 걸리는 진도~안산 간을 헬기는 1시간30분에 닿는다. 대부분의 유족은 1시간30분 비행 내내 통곡한다고 한다. 조종사와 승무원들도 눈물을 삼키며 비행에 임한다. 5월말 현재, 통곡의 헬기는 아직 16번을 더 떠야 한다.



14일

 4월16일 8시52분. “제주도에 가고 있었는데 지금 배가 침몰하는 거 같아요.”

 119로 전화한 단원고 2학년 최덕하 군의 다급한 목소리는 세월호의 침몰을 처음 외부에 알렸다. 녹취가 있음에도 해경은 최초 신고시각을 통화시작시각인 8시52분이 아닌, 통화종료시각인 8시58분으로 늦추는 거짓말까지 했다.

 대통령이 사고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오전 10시. `첫 구조 요청’으로부터 68분이 지나서다. 선장과 선원은 이미 배를 탈출한 뒤였고, 구조에 나선 해경은 배 안으로의 진입을 포기한 이 시각에 나온 대통령의 첫 일성은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없도록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오후 5시40분 박 대통령은 중대본을 방문해 이렇게 다그친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들을 발견하거나 구조하기가 힘이 듭니까?”

 304명이 뒤집힌 배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물속에 뛰어 내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대통령은 `국민의 구조요청’으로부터 9시간이 다되도록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304명의 국민은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입에서 `사죄’란 말을 듣기까지 유가족과 국민은 꼬박 14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국민 앞에 나서 진심 어린 사죄를 구하는 게 아니라, 국무회의에서 장관들 앞에 앉아 내놓은 `착석 사과’였다. 안산의 합동분향소를 찾은 자리에서도 유가족이 아닌 `조문객을 조문’한 대통령은 이 날까지 당사자인 유족들에게는 직접 유감이나 사과의 뜻을 전하지 않았다.



10초

 타인의 극심한 고통조차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별한 다음 공감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직도 바닷속에 수장돼 있는 `실종자의 존재’를 떠안고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유가족들을 향해 비수와 같은 망언으로 찌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KBS 김시곤 (전)보도국장은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세월호와 관련된 KBS 보도가 왜 외면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고백한 자폭과도 같은 발언이었다. 어버이날인 5월8일 유가족 100여 명은 안산 합동분향소에 안치된 아이들의 영정을 내려 가슴에 품어안고 KBS 본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로 향했다. 2시간 가량 항의가 이어졌으나 김시곤 국장을 만날 수 없자 유가족들은 KBS 사장의 공개사과와 김국장 파면을 요구하며 새벽 2시에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향했다.

 아이들의 영정을 보듬은 부모들은 전투경찰에 제지당하자 도로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애원했다 “왜 길을 막습니까? 우리 말 좀 들어주세요, 박 대통령님. 우리에게 10초만 주세요!”

 대통령이 아니라 아들딸을 잃은 유가족이 무릎을 꿇었다. 사고 삼일째인 4월18일 한 실종자의 어머니는 진도실내체육관 단상에 서 있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어머니가 무릎을 꿇는 나라가 아닌, 꼭 구해내겠다며 대통령이 무릎을 꿇는 대한민국’은 없었다.

 유가족들이 경찰과 대치중인 상황에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순수 유가족분들의 요청을 듣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입장이 정리가 됐다”는 `순수하지 않은 대변’으로 길바닥에 앉아 추운 밤을 보내고 땡볕에 앉아 대통령을 기다린 유가족을 모욕했다.

 대통령과 가족대표단의 면담은 그로부터 8일 후인 5월16일에야 마련됐다. 사건발생 한 달을 넘긴 이날 한 유가족이 대통령에게 보여 준 게 있다. 유족 부모들이 늘 목에 걸고 다니는 번호 명찰이었다. 부모의 출석부 번호처럼 불리는 이 숫자는 팽목항에서 시신이 인양된 순서에 따라 붙여진 일련번호다.

 “제가 차고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신분증입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신분이 될 수 있도록 대통령님께 잠깐 이걸 보여드립니다.”



24㎞와 10㎞

 서울 청계광장 촛불행진에 참여한 한 누리꾼이 귀가길에 어떤 노점상과 옆자리 할머니의 대화를 들었다 한다. 노점상의 손수레에는 돗자리가 가득 실려 있었다.

 “많이 팔았수?”

 “아뇨 팔지 못했어요.”

 “왜요! 사람들이 많이 없었나?”

 “아뇨 많았는데… 어린 아이들이 죽었는데… 양심상 거기서 내 돗자리 사라고 소리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한켠에 서있다가 그냥 오다보니 팔지 못하고…. 내도 양심이 있는데 거기서 이걸 사라는 말이 나오질 않더라고요.”

 이 노점상이 가진 `양심’이란 걸 간직한 자들이라면 아이들이 잠겨 있는 그 바다와 가장 가까운 숙소(국립남도국악원)를 실종자 가족들에게서 빼앗지 않았으리라. 진도실내체육관~팽목항 거리는 24km, 자동차 이동시 30분. 국립남도국악원~팽목항 거리는 10km, 자동차 이동시 10분. 물에서 돌아온 자식을 만나러 오는 30분의 거리에서 20분은 줄여줄 수 있었으리라.

 차가운 체육관 바닥에서 통곡과 실신을 거듭하며 잔인한 기다림을 이어가던 가족들에게 자식들이 돌아오는 팽목항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그 기다림의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었으리라.



250개의 구멍

 `City With 250 Holes in Its Heart’(가슴에 250개의 구멍이 뚫린 도시). <뉴욕타임스>의 마틴 패클러가 안산 고잔동을 찾고 나서 쓴 기사의 제목이다 .

 “(단원고는)한 학년 전체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희생당한 250명의 학생뿐 아니라 살아남은 학생, 부모, 친구, 이웃 아니 도시 전체를 잃었습니다. 이 악몽을 잊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참고서를 사던 학생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단원고 정문 앞의 문방구 주인, 화장장으로 가기 전 운구차가 학교를 들르는 장면, 딸을 잃은 어머니가 딸이 공부하던 책상 위에 국화꽃을 놓다 오열하며 쓰러지는 장면, 검은 상복을 입은 교사들이 복도에 서서 마지막으로 학교를 찾은 제자들의 시신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희생된 학생들의 시신을 화장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이의 말을 차례로 담았다. “한 아이를 떠나 보내는 것도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250명의 아이와 작별해야 하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2800권

 노무현 정부 시절 실제 사고현장에 출동하는 지역 경찰서·소방서·군부대·지방자치단체 등의 행동지침을 담은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은 2400여권. 이밖에도 대규모 인명피해 선박사고 대응 매뉴얼 등 총 8종의 주요상황 대응 매뉴얼을 따로 만들었다. 참여정부에서 만든 매뉴얼만 총 2800여 권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정권의 `노무현 지우기’가 청와대의 재난관리컨트롤타워 상실, NSC 위기관리센터 폐지로 이어지면서 2800여권의 참여정부 위기관리 매뉴얼은 `죽은 문서’가 됐다.



5가지

 `지금 대통령께서는 헌법을 위반하셨습니다’.

 4월27일 청와대 자유게시판에 “목숨을 걸고 글을 남긴다”고 한 누리꾼은 고3 학생이었다. 이 학생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목숨을 걸고’ 지적한 `대통령께서 위반하신 헌법조항’은 5가지.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1조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7조 ①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34조 ⑥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34조6항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헌법 조항이기도 하다.



8명

 어버이날인 5월8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기어올라간 8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관련 특검 실시’와 `무능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촉구하며 기습시위를 벌인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생 8명은 쏜살같이 달려온 경찰들에게 사지가 들려 강제연행됐다. 그 중 한 학생이 남긴 소회글은 다음과 같다.

 <(생략)학교 기도회에서도 울고, 촛불집회에서 영상을 보다 또 하염없이 울고, 처량하게 서 있는 서로의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침묵시위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습니다. 촛불들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우리 8명은 이 촛불들이 언젠가는 꺼진다는 사실을 경험해 봤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이 죽음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아주 조그마한 돌멩이가 되어 저 침묵하는 호수에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부모에게 불효를, 우리의 내일에게 상처를 주기로 했습니다. 삶을 위한 계산기들은 이미 다 멈춰버렸습니다. 여러분 침묵 투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시민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어머니 미안합니다.>



다시 16

 “내게 단 한번의 소원이 허용된다면 나의 소원은 4월15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16일, 이 나라의 어른들은 모두 공범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른이어서 미안하다’는 절실한 참회의 말들이 노란 리본에, 포스트잇에 쓰여졌다.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건져달라는 건데 그것도 이렇게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느냐. 너무나 비참하게도, 시신을 찾은 가족들이 부러워 못 견디겠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자식의 시신을 대면해야 하는 가장 참담한 슬픔’을 기다리는 한 유가족의 말이다.

 아직 세월호가 침몰한 그 바다에서 16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실종자 가족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영영 못 찾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세 종류 인간이, 세가지 기도가 있다. 첫째, 신이여,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한껏 당겨주소서,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나이까?”

 지금, 우리는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며, `부러진 화살’이 되어, 희망이라는 과녁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가.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