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호수, 반(反)문명의 여행자

박대일(58)씨가 러시아 땅을 밟은 건 1999년 초겨울이다. 세기말의 불안과 불황의 짙은 그늘에서 인생의 새로운 활로가 다급했던 그에게 손을 내민 건 “놀러 오라”는 친구였다.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을 때 무채색의 도시가 그를 맞았다.
“검정색, 회색, 흰색. 세 가지 색밖에 없었어요. 건물은 회색, 눈내린 거리는 하얗고, 사람들의 옷은 전부 검정색이었어요. 웃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몸속에 파란 피가 흐를 것 같았어요. 근데 알고 보니 내면은 굉장히 화려하더라고요. 식당을 가보면 겉옷은 까만데 속옷은 우아하고 화려하고. 두 가지 모습이에요, 안과 겉이 전혀 다른.”
러시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다니던 회사가 없어진 뒤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뒤끝이었다. 도피심리였을까. 그는 `세상을 다시 살아보자’는 마음을 러시아 땅에 풀어놓았다.
목재상을 하던 친구는 바이칼 호수 주변의 나무를 취급하는 무역을 권유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비행기로 4시간, 기차로 3일 거리의 이르쿠츠크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바이칼을 만났다.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어느 날 바이칼에 닿았다.
연해주에서 바이칼까지 강물처럼 흘러들고
`아! 참 물이 맑다. 깨끗하다. 크다.’
상상조차 못 해본 미지의 세계였다. 비현실적인 풍경을 맞닥뜨린 느낌은 살아온 날들의 경험 안에서 맴도는 외마디 탄성들로만 튀어나왔다.
“바이칼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여기서 죽으면 참 깨끗하게 새로 태어날 수 있겠구나. 때묻은 놈들 다 빠뜨렸다 끄집어내면 좋겠구나. 뭐랄까, 정화의식 같은 게 자꾸 떠올랐어요.”
그 순간부터 샘솟듯 일어나는 호기심은 그의 발길을 한사코 바이칼로 잡아끌었다. 틈나는 대로 바이칼을 맴돌았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바이칼은 빙 둘러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호수의 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고 아예 길도 없었다.
“어디가 좋다더라하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라도 일부러 찾아갔지요. 원주민들한테 바이칼에 얽힌 옛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어느 계절에 어떤 바람이 불면 장관이고, 얼음이 어는 시점의 호수는 어떠하고,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는 어디고….”
사시사철 꼭 그 때 봐야 한다는 풍경을 좇다 보니 바이칼을 탐구하는 나그네가 되어갔다. 대신 목재사업은 나날이 험난했다.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한국의 금강송과 DNA가 동일하다는 앙가라강 기슭의 소나무를 수입하는 일이었다. 사나흘 숲속으로 들어가 산더미처럼 통나무를 베어내 쌓은 뒤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한국으로 보냈다. 기차로 배로, 뗏목으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곰팡이가 슬기도 하고, 천신만고 끝에 마산항에 부려놓은 목재들이 태풍에 죄다 사라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철도 운송권을 장악한 마피아의 등쌀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사업은 연신 큰 손해만 입은 채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이었어요. 이르쿠츠크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선교사가 갑자기 추방을 당했어요. 여행사에서 한국 사람을 찾다가 저한테 부탁을 해온 거예요.”
인생은 예기치 않는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 같았다. 연해주에서 바이칼 호숫가로 깃들었고, 목재 사업이 난관에 부딪힐 무렵 서툰 여행업의 물꼬가 트인 게다.
“야단이 났더라고요. 강아지라도 한국말만 하면 데려오라고 해서 제가 나간 거예요. 되지도 않는 말 떠듬떠듬 하면서 여행업을 시작했지요. 그렇게 한두 팀 맡는 식으로 했는데 초창기에는 사기를 많이 당했어요. 여행사들 가운데는 외상으로 관광객을 맡겼다가 떼먹기도 하고, 횡포가 너무 심했어요. 하청에 재하청까지 몇 단계가 있기도 하고. 일부 한국 여행사들이 그런 식으로 현지의 영세한 사업자를 괴롭ㄴ히는 경우가 있다더라고요.”
여행업도 만만치가 않았다. 빤한 트집으로 경비를 깎기 일쑤고 손님의 불만을 핑계로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여행업은 벼랑 끝에서 붙잡은 마지막 희망이 되고 말았다. 목재업에 탈탈 털어 넣은 사업자금 20만 달러는 오간데 없고 귀국을 하자해도 비행기표조차 사지 못할 형편이었다.
브리아트 원주민 마을에서 두고 온 고향 떠올려
“여행업은 입과 머리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는 2004년에 본격적으로 바이칼전문여행사를 꾸렸다. 한국인이 합법적으로 하는 유일한 여행사였다. 바이칼이 세계적인 명소로 알려지면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자 러시아 사람들의 견제가 거세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인구 60만 명의 이르쿠츠크에 여행사협회만 300여 개에요. 한국 관광객을 실은 비행기가 오면 `누가 손님을 받았느냐’로 화제를 삼아요. `박모라는 놈이 허가도 없이 받았단다’ 하면 이민국에 압력을 넣어 영장도 없이 붙잡혀 갑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여행사 허가를 얻기까지 기막힌 일도 겪었다. 러시아 여성을 서류상 사장으로 등록했는데 아예 진짜 사장 행세를 하고 나선 것이다. 출근 첫날부터 사장 자리에 앉아 아무리 설득해도 비켜주지 않는 바람에 발목이 잡혔다. 결국 2년치 월급을 한꺼번에 내주면서 정리를 했다. 가까스로 문을 연 `바이칼 러브’ 여행사는 2009년 러시아 회사와 합병해 `BK투어(바이칼코리안투어)’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도착 첫날부터 러시아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독선생을 두기도 하고, 어학코스에 나가기도 했다. 꾸준한 공부로 일상생활은 그럭저럭 할 수 있었지만 여행업을 완벽하게 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언어의 불편을 메워준 건 러시아 친구들과의 우정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굉장히 친해져야 맘을 열어요. 근데 한번 맘을 열면 변치 않아요. 바이칼 에서 호텔 주인을 알게 되었는데 남들한테 100원 받을 것을 나한테는 90원 받고, 내가 관광객들의 방을 못구해 곤란해 하면 어떡해서든 방을 마련해 줘요.”
그는 몸으로 부딪히고 발로 뛰면서 비용을 줄였다. 바이칼을 찾아오는 다양한 관광객들의 정서에 맞는 기획에 몰두했다. 직업별로 성별로 연령별로 정보를 축적하고 문제점들을 개선하면서 독보적인 바이칼여행의 노하우를 쌓았다. 심지어 러시아 여행업자들의 터무니없는 고발로 경찰서를 자주 들락거리다가 형사들조차 친구로 두게 되었다.
소걸음으로 디딘 자리를 꾹꾹 눌러가며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는 이르쿠츠크주와 브리아트 공화국에 둘러싸인 바이칼 주변의 변화도 눈에 잡힌다. 텅텅 비어가는 시골 마을들을 지키고 사는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한국인이라야 탈탈 털어도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그곳에서 두고 온 고향의 애잔한 풍경이 떠오르곤 하는 게다.
그는 시베리아에 한 명 뿐인 한국인 영주권자다. 노동비자를 받고 들어와 6년 동안 여섯 번의 신청 끝에 영주권을 얻었다. 그를 제외한 다섯 명의 직원들은 모두 러시아인들이다. 몽골을 거쳐 바이칼을 오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몽골에도 여행사 법인을 설립해 서울 사무실까지 3개국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저는 바이칼이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알혼섬을 가면 꼭 외갓집 같아요. 바이칼이 우리 민족의 시원지여서 그럴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보다는 제가 전라도 촌놈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 보았던 아련한 기억들이 겹치는 것 같아요. 우리 동네 뒤로 황톳길이 있었는데 아스라이 사라지는 그 길이 아직도 또렷해요. 알혼섬에 그런 길이 있는 거예요. 한없이 바라다보면 이상하게도 맘이 편해요. 사는 건 형편없어도 따뜻한 인정이 있고.”
`알혼을 가지 않으려거든 바이칼에 가지 마세요’라고 알혼을 강력추천하는 그. 직접 보고 느낀 바를 여럿이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다.
바이칼의 원주민인 브리아트족은 외모도 성격도 한국인과 흡사했다. 사귈수록 영락없이 고향 함평에서 함께 자란 형제자매나 다정한 이웃 같았다.
한민족의 시원설이 전해지는 알혼섬의 불한바위
“우리 마을은 순 촌이죠. 학교까지 시오리를 걸어서 다녔고요. 오지 중의 오지요 참 가난한 동네였어요. 시베리아가 유배지인데, 나도 전라도라는 유배지 출신이라 적응을 잘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말 쪼들리던 2년 동안 한국을 한번도 가지 않았고, 6개월 동안 한국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살기도 했어요.”
스스로를 유배자라 여기며 바이칼에 천착한 그는 바이칼 여행의 모든 것을 꿰는 전문인이 되었다. 바이칼 곳곳의 구구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관련 서적을 파헤치며 직접 경험한 바이칼 이야기를 지난 2010년 《지구의 푸른 눈, 바이칼》이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바이칼엔 끝도 없는 얘깃거리, 엄청난 역사적 사실, 위대한 문학이 깃들어 있어요. 심지어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무대잖아요. 우리 민족의 시원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바이칼로 찾아옵니다. 옛날엔 우리도 이웃집 다니듯 하던 가까운 곳이지요. 러시아에서 이곳을 빼면 문학을 논할 수가 없어요. 특히 제정러시아 시절 뻬제르부르크 귀족들이 황제에게 맞선 `데카브리스트난’이 실패한 뒤 젊은 장교들을 유배 보낸 곳이에요. 그 중심도시가 이르쿠츠크고요. 그때 120여 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왔는데 쟁쟁한 인물들이었어요. 전라도로 치면 정약전이나 정약용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그들 중엔 감자파종법을 유포시킨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날마다 날씨만 기록한 사람도 있고…. 대표적으로 발콘스키와 투르베츠키 두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두 사람이 살았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 있어요. 발콘스키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주인공 니콜라이 발콘스키의 실제 인물이에요. 톨스토이 어머니가 발콘스키 집안에서 시집을 왔어요. 어려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 소설을 쓴 것이지요. 유배자들을 찾아 혹독한 추위를 뚫고 시베리아를 건너온 부인이나 약혼녀들 얘기도 굉장해요. 러시아문학의 근간에 한 대목씩 들어가는 이야기들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시베리아 유형, 사랑을 찾아가는 스토리 그런 게 탄생한 것이지요.”
기기묘묘한 물의 빛깔, 쏟아지는 별빛, 아스라이 이어지는 오솔길, 드넓은 초원과 원시림…. 바이칼의 비경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우리가 잊고 살았거나 잃어버린 전라도를 본다.
“역사적 배경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우리가 잃었던 것을 다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바이칼의 풍경은 말이 소용없어요. 초원이 쫙 깔려 있고, 햇볕이나 일조량에 따라서 물색깔이 달라져요. 군데군데 강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온에 따라서 플랑크톤의 양에 따라서 굴절이 달라지면서 에머랄드 빛도 보이고 붉은 빛도 보이고. 그래서 비포장도로를 달려 알혼섬으로 갈 때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며 투덜투덜하던 손님들도 이튿날 바이칼 일주를 하고나면 조용히 경탄만 하지요.”
바이칼 여행은 문명의 여행이 아니라 반(反)문명의 여행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아 거꾸로 되짚어 가는 여행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설이 있는 불한바위의 전설도 아득한 과거행이다.
“불한바위 근처에서 헤엄치던 백조 한 마리가 깃털을 감춘 사냥꾼 총각과 결혼을 하고 12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일파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 코리안브리아트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요. 그가 부여의 시조 동명성왕이라고, 과학적으로도 브리아트족과 한국인의 DNA가 가장 가깝다고 해요. 그 바위를 한국인들이 신성시해야 하는 이유지요.”
브리아트족의 문화 가운데 한국과 비슷한 게 한둘이 아니다.
동네 입구마다 성황당이 있고, 고수레를 하는 풍습도 그렇다. 물건을 줄 때는 오른손으로 줘야 하고 반드시 두 손으로 받는다거나, 문지방을 밟는 걸 금기시하는 것 등도 한국과 판박이다. 이 때문에 한 때는 학자들의 답사 열풍이 불기도 했다.
불편함 속에 들어있는 바이칼 여행의 참맛
그는 바이칼에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봤다.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깨우쳤다. 그래서 `바이칼만큼은 다른 여행지처럼 만들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 손님들이 밤이면 유흥업소를 찾아다니는 퇴폐적 여행지로 오염시킬 수 없다는 각오였다. 간혹 항의를 받거나 볼멘소리를 듣지만 상관없다.
“바이칼의 때묻지 않은 자연과 원주민들의 문화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감동과 추억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요.”
그가 안내하는 바이칼 여행은 더러 불편하다. 12시간 동안 열차를 태워 끝도 없는 꽃밭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재래식 화장실조차 없는 곳에 내려놓기도 한다. 풀밭에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 보물찾기처럼 숨겨진 바이칼 여행의 참맛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을 가진 바이칼. 그에게 바이칼은 들여다볼수록 신비롭다. 대륙의 한가운데 그토록 커다란 물이 고여 있다는 사실부터 믿기지 않는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바람이 분다. 사막처럼 쾌적하다가 5일 만에 스콜이 쏟아진다. 협곡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의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그 바람에 휩쓸린 고깃배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바이칼의 겨울이 끝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면 간이 오그라들 정도다. 천둥벼락 소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변화무쌍한 바이칼을 신의 조화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들의 샤머니즘이 십분 이해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바이칼을 보는 게 평생소원이라고 하지요. 그 호수에서 모든 죄를 씻고 온다고 여길 만큼 두렵고 성스러운 곳입니다.”
그는 오늘도 그 신비의 땅으로 사람들을 부르며 한 발 앞서 걷는 여행자다.
글=황풍년 `전라도닷컴’기자/사진제공=BK투어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