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 살림

토란잎 우산
비오는 날 머리에 이고다닐 수 있는 초록 하늘, 토란잎 우산.
또로롱 또르르 빗방울 굴러가니, 천연 방수(防水) 능력 빼어나다.
“옛날에는 비 오문 애기들이 토란우산 많이 썼제. 지금은 흔한 것이 우산인디, 옛날에는 식구가 많한께 빨리 일어난 놈이 쓰고 가뿔문 늦게 인난 놈은 우산 차지가 안돼.”(담양 창평면 외동리 박양순 할매)
그런 시절의 `우산 대용’이었다.
`그게 어디 우산이었겠느냐만, 어깨도 벌써 다 젖어버리고 이마에 찬 빗방울도 토닥였던 것이었지만, 토란잎 우산과도 같았던 것들이여’(정윤천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관하여’ 중)라고 다만 그리워 하게 되는.
푸대가방
“개봅고 찔그고 흙 무쳐도 암시랑토 안해.”
너른 하늘 이고 푸른 산들 보듬고 사는 촌 어매들이라면 응당 하나씩 갖고 있는 푸대 가방. 강귀순(곡성 죽곡면 가목마을) 할매의 가방도 `핸드메이드’와 `재활용’이 기본이다.
봄날 해종일 흙을 더듬어 채워온 그 가방에선 밥상에 두고두고 오를 봄이 한가득할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평생에 한번은 매어보아야 할 진정한 명품 가방.
키
“까불라. 꽤도 까불고 들꽤도 까불고 콩도 까불고 멋이든지 까불라.”
`까불라’가 사명인 이것은 키.
“촌에서는 까불라야 살아. 곡석이야 멋이야 못씬 것 날라보내고 존 것만 냉개.”
껍데기는 가라 하고 알맹이만 남기는 과업에 제 몸을 공양하고 누더기가 되었다. 나주 산포면 화지리 시암동떡의 키. 할매와 더불어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
지게
어렸을 적 `내 책가방’보다 먼저 `내 지게’를 가졌더라는 순천 황전면 황학리 전재근(62)씨. 줄줄이 7남매가 흰 쌀알 섞인 아버지밥을 호시탐탐 노리는 밥상에서 커서 머리 굵어질 즈음엔 밥그륵수 덜려고 동네 담살이를 하였던 소년. 소 풀 뜯기러 가서 놀고 온 날들을 `철없는 지서리’ 했노라 기억한다.
“꼴 한 망태 비어 와라 아부지가 그러문 바지게 엉거서 지고 나가. 다 못 비고 오문 염치가 없어. 소 마굿간 위에 가서 자. 전에는 풀이 귀해. 너도 나도 헌께. 겨울로 나무 한 짐 할라문 쩌어그 곡성 태안사 절밑까지 왕복 사십리 질을 갔어.”
한번은 소를 먹이러 가서 나무에다 묶어 놓고 놀다가는 냇가에서 물만 잔뜩 먹여 갖고 돌아왔다. 마루에 선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소는 왼쪽이 풀배 오른쪽은 물배”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풀배가 빵빵해질라믄 한 네댓 시간 잘 믹여야 해.” 해거름녁 왼쪽 배 빵빵하게 부른 소를 앞세우고 풀은 바지게에 잔뜩 짊어져서 구부정하게 돌아올 적엔 참말 으쓱했다.
작두
“한번 써리끼다?(썰어볼까요?)”
25년 전 순천 괴목장에서 1만8000원을 주고 샀노라는 전재근씨의 작두. 충분히 과로를 하였건만 여전히 서슬 퍼렇다. “안 들문 숫돌에 갈아서 써. 내 평생 쓸 것이요.”
오늘은 퇴비간에 넣을 양으로 오이넝쿨을 썩썩 썰어낸다. “칼이라는 것은 잘 쓰문 도구요, 잘못 쓰문 흉기라요.”
물장갑
담양 창평면 외동리 박인근(90) 어르신댁 마루 위로 매달린 물장갑. 설치미술이 아니다. 파리를 쫓기 위함이다. 파리의 겹눈은 모든 형태를 모자이크로 본다. 물 담은 비닐장갑은 볼록렌즈 역할까지 하니 물장갑에 비친 자기 모습을 공포의 괴물로 보는 것. 파리채처럼 명중의 실력을 쌓지 않아도 되고 살생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추었다.
또가리
이동시에는 한쪽으로 매달린 끈을 입에 무는 동네 처녀들 맵시에 동네 총각들 가심이 월렁월렁해지는 작용과 부작용이 있는 운반보조도구 똬리. 이 나라의 아녀자들이 또가리 위에 얹어 나른 수수 만만 동이의 물동이로 훈짐 나는 밥이 차려지고 빨랫줄엔 정한 옷이 말라갔으니 누이를 대하듯 엄니를 대하듯 경배할 만한 경이로운 물건.
소래기
“나 시집 올 때 그 자리 그대로여.” 토담 아래 장독대에 밑빠진 `소래기(밑이 너른 독)’. 담양 추월약다식전수관 이순자 할매는 장 뜨러 갈 때마다 깨진 항아리에 눈길 한번 주고, 혹은 매만지며 금간 소래기를 철사로 야물게 매어 둘 적 시할머니의 손길과 마음을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 옷자락만 중요한 것이 아니여. 자기 어머님 자기 아버님 손길이 지나간 그 흔적들이 다 소중한 것이여.”
쭈그러진 양푼
“나 하는 지서리여. 햇빛 나문 아깐께 머시든 갖다가 몰래.”
진도 가사도 이상엽(77) 할매의 햇빛 사용 `지서리(짓)’는 그러하다.
한생애를 건너오느라고, 우그렁쭈그렁해진 양푼도 동원됐다. 청각 두어 가닥 얹고 해바라기중.
정들어서 애끼는 그 마음 덕에 여전히 `쓸모’ 있다. “못 베래, 안 베래.”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