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소나기같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직정(直情)처럼 쏟아진다. 병풍같은 바위를 배경으로 수직낙하하는 물줄기.
곧은 직선의 길이감과 속도감이 쾌(快)하다. 높이 40미터, 물폭 15미터, 낙수량은 분당 5톤. 강천산 초입에서 불시에 맞닥뜨린 병풍폭포의 위용을 숫자로 표현하면 그렇다. 눈으로, 귀로, 그 장쾌함을 누린다.
이 폭포 밑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나. 죄를 씻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까마는 이 역시 병풍폭포의 위력적인 물줄기에 기댄 이야기일 터. 세심(洗心)을 이르는 말이니, 그때는 회초리 같고 죽비 같은 물줄기겠다.
병풍폭포는 강천산이 굽이굽이 비장한 수많은 폭포와 소(沼)와 계곡의 예고편과도 같다. 한량없이 관대한 품. 산은 여름내 수수많은 사람들을 품고 씻겨내고도 의연하다. 맑고 소쇄하다.
지상에서 하늘로의 공간이동
초록이 빚어낸 그늘과 말간 물빛이 어우러지는 산길은 `길과 집과 사람 사이’라는 책의 지은이인 안치운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그저 이송(移送)될 수 있는 길’이다. 즉 `가만히 있었는데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절로 옮겨지는 길’이다.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에 놓인 강천산(순창 팔덕면)의 높이는 584m. 이 산의 미덕은 높이로 말해지지 않는다. `호남의 금강’이라는 별칭처럼 선녀계곡·원등골·분통골·지적골 등 이름난 계곡들과 기암절벽, 울창한 숲을 거느리고 있어 풍광이 각별하다. 강천산과 강천호·광덕산·산성산을 포함한 일대가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던 이유일 것이다.
접어들수록 길의 맛도 깊어진다. 아스라이 이어진 계단. 절정을 향해 올라가는 경사. 그 끝에 펼쳐진 것은 구름다리! 이 점과 저 점을 잇는 직선처럼, 허공의 두 지점을 명쾌하게 선으로 이어버렸다.
`현수교’라는 구조적·형태적 이름 말고 `구름다리’란 명명이 좋다. 저 높은 곳으로 훌쩍 올려놓는 이름이지 않는가. 지상에서 하늘로의 공간이동이다.
옛날에는 높은 곳이라면 거의 `구름(雲)’에 빗대졌으니, 고원지대나 심심산골 등 웬만큼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면 이름에 `운(雲)’자를 달고 있기 십상이다.
두 암봉 사이에 휘영청 걸린 구름다리를 건너노라면 허공을 걷는 듯하다. 1980년에 세워진 강천산 구름다리는 지상으로부터 50m의 높이에 걸려 있다. 길이는 78m. 완주 대둔산, 영암 월출산의 구름다리와 함께 호남의 3대 구름다리로 꼽힌다.
허공을 가로질러 건너는 순간, 시선은 저 멀리까지 가닿는다. 또다른 눈높이로 세상을 보게 된다. 가을에 이 다리를 건너면 만산홍엽의 세상이 거기 출렁일 것이니.
`사즉생 생즉사’의 비장한 각오 다졌던 구장군폭포
강천산이 거느린 또하나의 비경은 구장군폭포다. 서로 사이를 두고 흘러내리는 두 줄기 폭포. 물폭은 넓지 않으나 웅장하다. 무려 120미터의 길이.
옛날 마한시대에 아홉 명의 장수들이 전쟁에 패한 뒤 자결하러 이곳에 왔다가 자결할 바에는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고 다시 전장에 나가 대승을 거뒀다는 전설이 전한다. 죽음 앞에 선 이들이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의 비장한 각오를 다졌던 곳.
폭포 앞에서 다시 생각한다.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한 것은 죽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이승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 폭포 옆의 절벽에도 이야기는 서려 있다. 하늘에서 강천산 용소에 내려와 목욕하던 선녀와 이곳 산골에 살던 효심 지극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순탄했다면 이야기는 없으리. 심기불편해진 옥황상제는 그들을 천년 동안 폭포에서 거북이로 살게 한다. 당연히 미션도 따른다. 천년이 되는 날 동트기 전 폭포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올려주겠노라는. 마침내 천년이 되는 날 두 거북이는 폭포를 기어오르기 시작하지만 이쯤에서 훼방꾼이 등장하기 마련. 호랑이를 물리치느라 지체하다 보니 그만 동이 트고 만다. 이를 지켜보던 옥황상제가 그들의 사랑을 기려 바위로 변하게 했고 이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절벽에 거북이 두 마리가 새겨진 듯한 형상이 빚어낸 상상력. 사랑하던 두 남녀는 바위가 됨으로써 거기 영원불변의 사랑을 새겼다.
`삼인대’에 서린 옛사람들의 높은 기개
내려오는 길에 강천사에 들른다. 검박한 절집이다. 그래서 이무롭다. 그 마당이 여염집 마당 같지 않은 기운을 고요히 내뿜는 것은 수많은 돌탑들 때문. 저마다 `공 든’ 탑들이다. 소원의 무게, 소원의 높이가 이룬 지극한 마음자리. 돌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과 손길이 얹힌 그 탑들은 측량할 수 없는 높이를 지녔을 게다.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절에는 작은 오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제92호)이 서 있다. 임진왜란의 전화를 견디고 살아남긴 했으나 지붕돌들이 군데군데 깨져 있다. 6·25전쟁 때의 총탄자국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작은 석탑에 육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 상처다. 깨어진 자국으로 인해 그것은 애잔하고 친밀하다. 크지 않아서 주변의 소박한 돌탑들과도 잘 어우러진다. 스스로를 낮춘 겸양에서 우러나온 친화력이다.
절 근처에는 삼인대(三印臺·전북유형문화재 제27호)도 있다. 조선 중종 10년에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이 이 곳에 모여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중종의 폐비 신씨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당시 상황에서 `신씨 복위’를 논하는 상소란 관직 박탈은 물론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만큼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이들 셋이 소나무 가지에 각자의 관인(官印)을 걸어두고 맹세한 곳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삼인대라 부르게 됐다. 한칸 짜리 비각 안에 `삼인(三印)’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고난을 무릅쓰고 도리를 지키려 했던 옛사람들의 의기(義氣). 하여, 삼인대는 묵언의 가르침이다.
사느라 품고 세우는 간절한 소원이나 굳건한 서원, 시류와 실리를 떠나 때로는 목숨을 걸기까지 하는 어떤 뜻.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 지상에서 훌쩍 높아지는 것들을 그 길에서 새삼 돌아본다.
글·사진 = 남신희 `전라도닷컴’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