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줄기따라 흘러온 이야기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단풍 드는 날’ 중)
방하착(放下着), 그리하여 스스로 불타오르는 찰나. 이제 다만 상상해볼 뿐이다. 절정은 지났다.
그 숲의 나무들은 제 몸의 전부를 떨구고 고요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려놓을 것 다 내려놓아 홀가분한 자태다. 푸른빛 성성한 대나무 숲을 지나 뜻밖에 맞닥뜨린 `별’천지다. 땅위에 가득 내려앉은 단풍잎. 아낌없이 버리지 못해 아직 생의 절정에 가닿지 못한 자를 흔드는 `묵언’이다.
그 산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대숲과 단풍나무군락에 이어 귀한 고란초군락까지 그 길에 있다. 황룡산 둘레길. 금강 줄기를 굽어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전북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옛 백제 땅을 고루 적시며 천리 길을 흘러 서해와 만난다.
백제의 흥망도 동학농민혁명의 숨가쁜 전투도 지켜봐왔을 강. 백제의 빛나는 영화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열망들도 이 강에 한데 흘렀으리니.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이라고,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신동엽 시인이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뜨겁게 노래한 것도 이 금강 줄기를 빌어서였다.
강경, 웅포와 더불어 금강의 3대 포구
모래톱 가장자리에 내려앉은 철새들이 현자처럼 물 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만 굽어보고 있는 중인 초겨울의 금강. 바다처럼 폭을 넓힌 금강이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이쪽은 전북 익산 성당면 성당포구, 강 건너편은 충남 땅이다.
성당포구는 물길 따라 웅포와 강경의 중간쯤에 자리한 마을.
강경포구, 그리고 웅포와 더불어 금강의 3대 포구였다. 흥망의 낙차가 큰 곳이라면 곰삭은 쓸쓸함을 거느리기 마련.
조선후기에 금강은 주요 물산의 유통로였다. 강경은 뱃길로 흥성했던 그 시절의 포구들을 대표하는 곳. 뱃길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사꾼들로 온통 시끌벅적했다. 서남해안 해산물의 집결지였으니, 염장기술도 발달했다. 소금과 새우젓, 조기가 특히 유명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주인공 허생원의 부의 축적에 한몫 한 것이 바로 강경장의 소금.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나 박범신의 <소금>에서도 강경의 근대를 만날 수 있다. 요즘은 `논산 강경’이지만 100년 전만해도 `강경 논산’이었다.
하지만 뱃길이 육로와 철도에 밀리며 포구들은 쇠락했다. 결정적 타격은 금강하구둑이었다. 1990년 하구둑이 건설되며 금강 뱃길은 완전히 끊겼다.
금강과 지류인 산북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성당포구 역시 그 뱃길 덕분에 은성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까지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聖堂倉)이 있던 곳. 전국 9대 조창에 꼽힐 만큼 흥성했으니, 세곡을 나르던 일꾼과 배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하늘은 맑고 날은 따뜻해 물결 또한 잔잔하다. 파도도 일지 않으니 좌우 산천의 경치가 밝고 아름다워 여기저기 마을은 빗살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을해조행록’ 중에서)
조선 고종 때 함열현감 조희백은 12척의 조운선에 성당창 세곡을 싣고 1874년 봄 익산의 성당포구를 출항했다. 그는 익산을 비롯해 금산 남원 등 호남 여덟 고을에서 거둔 세곡을 배에 싣고 금강과 서해를 거쳐 강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을해조행록(乙亥漕行錄)이라 이름붙인 항해일지에 남겨 놓았다.
지금은 성당창은 물론 포구의 흔적도 희미하다. 마을 안쪽에 서있는 600살 잡순 당산나무와 은행나무(전북기념물 제109호)가 이 마을에 깃든 오랜 세월을 대신 말해줄 뿐이다.
세곡선의 무사운행과 풍어를 빌던 당산별신제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김장날’이다. 쪼개놓은 배추 속살의 연한 노랑빛이 겨울 마당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온 동네가 이 때로 날 받자고 약속이나 했던 듯, 집집이 배추포기 쌓아 놓고 수런거린다.
금요일, 이 날짜여야 했던 이유가 짚어보니 또렷하다. 온 식구 집합하고 출동하는 연중 대사인 것이다. 금요일쯤 배추포기 간해 놓아야 각지에 흩어져 사는 식구들 주말을 기해 합세해 바야흐로 김장이 진행되는 것이다. 오래된 습속을 잇는 그 일, 식구를 다시 한번 `食口’이게끔 이어주는 일이 되고, 그 지엄하고도 중한 뜻을 증거하듯, 쌓아둔 배추포기들은 장엄한 산을 이룬다.
은행나무를 마당가 나무인 양 뽀짝 곁에 둔 집도 왁자하다.
600포기를 담그는 대역사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참이다. 그 김장 담그는 사람살이도 해마다 지켜봐왔을 은행나무다. 어른들이 놀리듯 “공부 할래, 지게 질래” 물으면 서슴없이 “지게 진다”고 답했노라는 어린 소년이 나이들어 가는 모습도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동네아이들 놀이터였죠”라고 말하는 이 집 주인 안상근씨. 어린 시절 밥만 먹고 나면 숟가락 내려놓기 바쁘게 그 나무 아래 모여들던 깨복쟁이 친구들도 어언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었다.
“애렸을 때는 맨나 저 우게 끄트머리 가지까지 올라다니고 그랬죠. 지금은 않죠, 못하는 게 아니라. 하하.”
세세년년 마을 사람들에게 열매를 아낌없이 보시해온 나무다.
“동네사람들 누구나 다 주워다 묵는” 마을의 공유재산이다. 그 위쪽으로 한풍정(寒風亭) 정자 옆에는 당산나무가 서 있다. 지난 11월19일 당산별신제가 그 앞에서 행해졌다.
“원래는 정월 보름에 하던 것인디 한동안 끊겼다가 새로 날 잡아서 이어오고 있어요. 내년부턴 4월에 해요, 새 잎 나는 봄에.”
세곡선의 무사운행을 빌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의 기원을 담았던 의식. 만선의 배가 떠들썩하게 포구에 닿던 시절의 기억을 그 역시 간직하고 있다.
“중선배였죠. 그때는 엔진배가 아니라 다 풍선이었어요, 돛단배. 저희 애렸을 때는 그런 배들이 다녔죠. 저어그 바위 쪽에 가서보문 배가 저만치 오는 게 보였어요. 배 들어온다 소리 들리문 동네 아그들은 다 신이 나서 달려나갔죠.”
`배 들어온다!’는 들뜬 외침이 동네에 커다란 뉴스고 축제의 서막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금강하구에 우어 올라오던 옛 시절의 봄
고샅에 아예 판을 벌였다. 아짐들과 할매들 한데 둘러앉아 파를 다듬고 있는 중이다. 그 자리에 넉살좋게 끼여 앉아 웃음부조를 하는 이는 중화요리집 `가나성’ 주인 이상진씨.
“파가 요렇고도 클까. 여그 이 엄니네 거그만. 여그 엄니집 파가 올해 아조 잘 됐어.”
크고 굵다. 한눈에 봐도 튼실한 파다.
“어치고 대번에 맞춘디야”라고 신기해 하는 아짐들. 정작 그 `파 주인’인 노송자 할매만 대수롭잖다는 투다. “지가 가져갔응게 알지.”
올해 대파농사가 잘된 할매는 집집이 두루 대파를 나눠 주었다.
“시골이니까 나놔묵죠. 여그는 돈 주고받고 그런 거 없어요”라고 말하는 이상진씨.
김장하면서도 서로 없는 것들은 눈밝게 살펴 나눈다. 무 없는 집에는 무 건네지고, 파 없는 집에는 파가 보태진다.
“이 집이 유독 잘 되얏어”라고 모두 입모을 만큼 온 동네 소문나게 파농사를 잘 지은 비법은 뭘까. “지가 컸어.” 잘된 공은 모두 `파’에게로 돌리는 할매. 덧붙이는 말씀은 “어거지로 되는 것 아녀.”
강정숙(83) 할매도 아침부터 집마당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참이다. 배추포기 가르랴, 쪽파 다듬으랴. “싱건지를 담았는디 파가 없어서 못 넣었다고 했더니, 아들이 기어이 두 단 사왔구만. 올해 우리야는 숭궜는디 다 죽었어.”
뒤늦게 당도한 파 두 단은 `엄마표 싱건지’를 완성하고픈 아들의 살뜰한 마음일 것이다.
올해 김장 배추는 300포기다. 아들 넷 딸 둘 집집이 나눠질 것이다.
“니알(내일) 저녁때 와서 지그들이 씨서갖고 담는디야.”
어매가 배추포기를 가르며 오늘 몇 번이고 힘주어 외는 `니알’에 설렘이 깃든다. 자식들 한데 볼 날인 것이다. 배추속이 실하고 덩치가 크다. “뽀갤란디 큰놈은 칼이 잘 안 들어가네. 얼매나 땐땐한가 칼이 안 받아. 배추는 내가 농사지은 거. 꼬치가리도 백근 빵꺼(빻아) 놨어. 양님도 다 맹글어놓고.”
끝에 따라붙는 말은 “에민께 해줘야지.”
`에민께’는 스무 살에 시집와서부터 그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건너게 한 주문. 뻘바닥논을 일궈서 키운 자식들이다.
“옛날에는 우리집 뜰팡 밑에다 배 줄을 쨈맸어. 물이 잘랑잘랑혀. 우리집이 물이 다섯 번 들왔어. 방에서 밥묵다 벌썩 일어난 적이 몇 번이여. 뚝이 터져서 방에까지 다섯 번이나 들왔어.”
물가의 삶이란 그러했다. 수시로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 강이 가져다준 것도 많았다. “갈기, 참기도 많이 나고. 반찬 걱정 안하고 살았지. 갈기는 여가 싹 깔렸어. 가마니로 잡았지. 젓국도 담고 우둑우둑하니 깨물어묵으문 맛나지. 새우도 짠뜩 나고 우어도 많이 났어. 묵고 남아서 폴러 다녔지. 동네동네 다니고 장으로도 내다폴고. 내가 생선장사를 했거든.”
이제는 옛날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우어회’를 대표메뉴로 내걸고 장사하는 식당들 많은 금강줄기 마을이다. 은빛으로 빛나는 우어는 봄을 알리는 고기이기도 했다. 3월이면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금강하구 갈대숲은 맞춤한 산란지였다.
“우어는 찌드란하니 얇지. 아쓱아쓱 썰어서 회로 묵으문 고소롬하니 맛나. 기름이 많은게 꿔묵어도 맛나고. 강을 막아불어서 인자 암것도 안나와. 우어도 안와. 요새는 군산 서천 이런 디서 사다가 우어 장사를 혀. 지금은 귀경도 못해. 그거이 싱건 물에서는 못 산댜. 바닷물 짠물이 올라와야 헌디, 강이 달러져불었응게.”
“강이 인자 보기만 하는 강이 돼불었어”
금강하구둑 건설 이후 새우와 뱀장어, 황석어와 웅어, 황복과 참게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 풍요로움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이라 가능했던 것.
조점구(78)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요 앞에 낭구 있는 디 장도섰어”라고 추억한다. “고깃배가 많이 들어왔어. 이 마을 사람들도 고기를 많이 잡았고. 강경서 군산까지 왔다갔다하는 내왕선도 있었지.”
강의 변화가 할아버지에겐 못내 아쉽기만 하다.“강이 인자 보기만 하는 강이 돼불었어.”
웅포에서 나서 이곳 성당포구로 시집왔으니, 평생 금강을 끼고 살아온 김노영 할매의 말씀도 다르지 않다. “옛날 강하고 많이 달르지. 물이 안 흘르니깐 강이 죽었지. 옛날엔 우어 새우 황새기 할 것 없이 안 난 것이 없었어. 그 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여.”
하구둑 건설 이후 수질오염과 기수역 생태계 파괴, 갯벌의 급속한 퇴적 등으로 강은 앓아왔다. 최근 서천군과 충남지역과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금강하구둑의 개방과 해수유통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이유다.
그 금강줄기는 4대강공사로 또 한번의 변화를 겪고 있다.
“해마다 은행이 수북하게 떨어지고 그랬는디 올해는 안 열었대. 나무가 놀랬내비여. 올해는 안 열었어. 차가 하도 많이 지나 댕기고 없던 것들도 새로 지어지고 그래서 그런가.”
마을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올해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해거리하는 이유를 그리 순정하게 풀이하는 심재연(77) 할매. 사라져 가는 것은 아마 그런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간 뒤에도 은행나무는 해마다 잎 틔워 온천지를 덮고, 강물은 오래 오래 흘러갈 것이니. 그 나무와 강물 앞에서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것을 새삼 기억하면 될 일이었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최성욱 <다큐감독>
▶여행쪽지
성당포구마을(sungdang.go2vil.org)엔 황룡산 산책로, 약수터, 금강자전거종주길, 금강유람선 선착장, 공연장 등이 조성돼 있으며동네 안에 객실과 체험실, 식당 등을 갖춘 `성당포구 금강체험관’(063-862-3918)도 있다.
주변 마을까지 한데 누릴 수 있는 도보길도 여럿이다.
- 강변포구길(25.6km, 도보 8시간40분): 웅포곰개나루(3.4km)-산들강웅포체험마을(4.7km)-웅포언덕체험마을(6.2km)-성당포구(3.0km)-두동편백마을(1.3km)-두동교회(7.0km)-숭림사-웅포곰개나루
- 성당포구길: 성당포구-용두리쉼터(6.0km, 도보 2시간)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