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탑하고 감질나는 인심의 맛

 수은주는 영하권 아래로 떨어지고, 얼음까지 얼었다며 방송은 호들갑이다. 두터운 외투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서다가 문득 행선지를 떠올리니 웅크렸던 맘이 해실해실 풀린다. 화순군 춘양면 우봉마을. `춘양(春陽)’이라면 봄볕이 아니던가. 찬바람 들이치는 겨울날의 여행지로 더 없는 이름일진대, 동네 엄니들이 호박죽을 쒀주실 요량이라니 금상첨화다.

 따순 봄볕처럼 온몸을 후끈 달궈줄 호박죽이 벌써부터 입 안에서 달착지근하게 녹아내린다. 신명나게 달리는 차 안에 환한 볕이 팽팽하게 들이찬다.

 

 우봉들녘에서 땀 흘려 길러낸 토종들 총집합

 “오메, 오니라고 되겄네. 앙거봐. 쫌 쉬어.”

 “근디 호박 깎음시롱 솥에다가 넣고 불 땐 것도 보고 그래야흔디 으짜까.”

 “맹그는 걸 다 볼라문 일찍 와야흔디.”

 “도매랑 갖다 놓고 요것을 짤라서 아까매니로 해보까?”

 열대여섯 명의 아짐들이 마을회관 부엌방에 둘러앉았다가 한꺼번에 인사말을 건넨다.

 홍국식(76) 이장님은 천천히 와도 좋다했는데…. 손수 음식을 장만하는 아짐들과 기다렸다가 먹기만 하는 아재들 사이엔 적어도 한 시간쯤 시차가 있다. 늙은 호박 포강포강 쌓아올리거나, 조르라니 줄을 세운 풍경을 담고 싶었는데 낭패다. 부지런한 아짐들은 진즉 호박 서너 덩이를 토막쳐서 팥과 함께 솥에 안치고 회관 뒤뜰에서 불을 지피고 있다.

 “요거 한나 쪼개보께 속 한번 볼라요?”

 “꼬트래기를 따불어야제 잘 째져.”

 “호박은 꼬랑으로 째야흔디. 째깐해도 단단흐네.”

 “오메 요것이 썩었네.”

 “괜찬애 속 긁어내고 묵는 건께.”

 친절한 아짐들이 앞다퉈 칼을 들고 나선다. 힘겹게 쪼갠 호박 속을 숟가락으로 또 맨손으로 긁어낸 뒤 껍질을 벗겨내는데 칼이 튕겨져 나올 만큼 딱딱하다.

 “조심혀. 까닥흐문 큰일나. 됐네 됐어. 고만치만 썰어서 솥에 여문(넣으면) 되겄네.”

 `덤’으로 보여주시는 `아찔한’ 칼질에 죄던 맘이 `고만치만’에서 스르르 놓인다.

 “오십 명은 나와 계시제. 구십객도 있고. 부녀회장 엄니가 있는디. 내~ 여그 계셨는디, 낙상을 허셔가꼬 집에 계시구마. 거지 백살이 다 되얏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회관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날이다. 얼추 50여 명의 회식을 위해 우봉마을 아짐들은 5개로 반을 나눠 돌아가며 식사당번을 맡는다. 모처럼의 호박죽 잔치는 부녀회장 민민임(64) 아짐이 책임자이고 칠순 동갑내기 남원댁 윤양례 아짐과 다산떡 소덕순 아짐 등 3반의 몫이다. 하지만 방에 꽉 들어앉은 아짐들 모두 그때그때 손을 보태고 저마다의 요리비법을 내놓으니 와글와글 흥겹기도 하고 수선스럽기도 하다.

 “쌀가리 빻아놨어. 너되가 되야. 방애간에서 오천원이나 주라 등마. 폿도 두되 되요. 호박은 큰거로 시덩인가 너댕인가 썰어넣었어. 인자 새알 맹글어서 넣을 것이여.”

 찹쌀 넛 되, 팥 두 되, 늙은 호박 4개 등이 호박죽 재료인데 집집이 추렴을 했다. 여기에 나물과 지국(물김치)용으로 무 두 개, 배추 두 포기를 아침 일찍 밭에서 뽑아왔다. 양파, 쪽파, 당근, 참기름, 볶은 깨, 마늘, 생강 등 냉장고에 보관중인 식재료들까지, 우봉들녘에서 땀 흘려 길러낸 토종 아닌 것이 없다.

 

 바닥에는 팥, 위에는 호박덩어리들이 놀놀하게 익는 중

 윤양례 아짐이 썰어둔 호박을 양판에 담아 뒤뜰로 나간다. 솥을 여니 허연 김이 피어오르고 호박 삶는 달달하고 진한 내음이 확 엉겨온다. 호박을 붓고 국자로 뒤적거리니 바닥에는 팥이, 위에는 호박덩어리들이 놀놀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솔찬히 삶아야 되겄구마. 한나잘을 때야 돼.”

 그 사이 방에선 안주도 없는 술판이 열린다.

 “한잔썩 묵어감서 해야겄다. 아, 이 양반이 사왔다니께 넘다 고마워.”

 마을 아짐 중에 친정이 제일 멀다는 백수떡 김금례(75) 아짐이 술잔을 돌리니 영락없는 동네잔치의 시작이다.

 “영광 백수여. 거그서 여까정 왔어. 시집 갈 데가 없어가꼬 춘양 우봉리까지 왔다니께.”

 술이 섞여 흥이 부푼다. 그 분위기를 타고 유난히 젊어보이는 아짐에게 “엄니가 동네서 질로 새각시제라”하며 말을 붙여본다.

 “그래? 늦둥이를 낳까 어찌까 험마 시방. 새각시는 쩌기 있는디. 예순살 묵으문 새각시여. 칠십줄만 앙것어도 괜찮은디, 칠십셋이여. 손지들이 대학생이네. 아들은 오십이 넘어. 그러니 우리가 안 늙겄소.”

 “예~? 오메 칠십이 넘었다고요. 한나도 안 늙었는디요. 근디 엄니 성함은요. 택호는요.”

 “아들 여섯 중에 딸 한나라고 양님(양념)딸 양님딸 흐던 것이 양님이가 되야부렀어. 귀헌 딸이라고 부른 것이….”

 맛을 내려고 조금씩 아껴 넣던 양념처럼 귀하게 여기며 이뻐했나 보다. 정동떡(73) 구양림 아짐의 이름 풀이에 담긴 친정 어르신들의 애틋한 사랑을 읽는다.

 

 아! `마을’잔치란 곧 `말’잔치로구나

 아짐들이 반죽할 채비를 한다. 찹쌀가루를 다라이 두 개에 나눠 붓고 각각 두 명의 아짐들이 팔을 걷고 바짝 다가앉는다. 양정떡 이납순(74) 아짐이 곱게 빻아 하얀 찹쌀가루를 슬쩍 뒤채며 손을 빼는 순간, 부녀회장 민민임 아짐이 뜨거운 물을 쫙 끼얹는다. 그 물기에 가루를 버물려 조물거리다가 또 물을 뿌리고 조물조물 이기기를 반복한다. 이제 막 팔팔 끓던 물을 다루다 손이라도 데면 어쩌나 걱정스러운데 아짐들의 손놀림은 재기만 하다.

 “뜨건 물로 해야 안 풀어지게 허제. 맹물로 허문 금세 풀어져부러. 뜨건 물로 해야 손에 엉겨붙지도 않고.”

 “째깐썩 쳐서 버물려야해. 항! 다 이녘 집서 헌께 다 잘해.”

 뜨건 물 살짝살짝 끼얹어가며 뒤적뒤적 슬쩍슬쩍 뒤섞어 조물거리다가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보다가 슬며시 들어 올렸다가 탁내리쳐 궁그려 보고…. 찹쌀반죽 과정도 참 재미지다.

 이제 하얗고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뚝뚝 끊어 여러 개로 나눈다.

 방 안에 있던 아짐들이 모두 다라이와 쟁반 앞으로 모여든다.

 반죽을 똑똑 떼어다가 손바닥 위에 올리고 살살 몇 번을 궁글리니 꼭 새알만한 구슬이 앙증맞게 영글어 나온다. 여러 개의 손이 바삐 움직이니 새알이 쑥쑥 불어나 어느 순간 허옇게 쌓인다. “요로고 두 개썩 해야제 왜 한나썩 해”하며 김제떡 아짐은 한꺼번에 두 개씩 새알을 비벼낸다.

 “워따 동지죽 묵기 심들다. 더와 죽겄네.”

 “뭔 소리여? 그럼 심도 안들고 묵어.”

 “춤 튀긴께 말흐지 마랑께. 춤이 벌래벌래 나오네.”

 징글징글 농사에 비하랴. 가만가만 손하고 입만 놀리면 되는 놀이 같다. 물 흐르듯 착착 알아서 진행되는데, 푸진 말잔치에 와락 와락 웃음이 뒤섞이니 작은 마을회관이 웅웅댄다. 아! `마을’잔치란 곧 `말’잔치로구나. 흥성한 아짐들의 말! 말! 말! 그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온다.

 “뒤안에 호박이 넘은가 끓은가 모르겄네. 잉깔라지겄는가?”

 “잉! 폿이 낭글낭글해졌어. 호박은 쪼끔 덜 되고.”

 솥 점검을 하고 난 아짐들이 반찬을 준비한다. 끓는 물에 데친 배추를 찬물에 한참 불렸다가 손으로 꾹 짜서 물기를 빼놓았고, 지국(물김치) 할 배추와 무를 꺼낸다.

 “옛날부터 죽에는 너물하고 지국하고가 있어야 돼. 그래야 빨딱빨딱 잘 넘어가제. 취(체하지)도 안흐고, 입만 대문 넘어 가제. 오메! 총각이요? 근디. 장가갔는가? 허어 참.”

 이미 던진 말씀 속에 담긴 `미성년자 청취 불가음’에 스스로 화들짝 놀란다. 호박죽에는 물김치와 배추나물을 차려내 음양의 궁합을 맞췄다는 설명이다.

 뒤뜰로 나온 다산떡 소덕순(70) 아짐이 솥뚜껑을 연다. 허연 김은 찬바람에 흩어지지만 노란 호박덩이들이 내뿜는 단내가 확 풍겨온다.

 “넘다 많애. 둘로 나놔야해.”

 아짐은 국자를 솥 안에 넣어 휘적휘적 젓다가 들어올린다. 흥얼흥얼 물크러진 호박덩이들과 아직은 자주빛 탱글탱글한 팥을 떠서 부엌에서 가져온 솥으로 덜어낸다. 그렇게 두 개의 솥으로 나눈뒤 호박을 으깨는 작업을 한다.

 “호박이 덜 물렀드랑께. 능클능클 허꺼신디.” “고무장갑 찌고 해봐.” “뜨가서 못주물러.” “아직 덜잉깔라졌그마.” “폿은 온폿으로 묵어야 해.”

 서봉떡 아짐이 건더기를 소쿠리에 받쳐놓고 국자로 문지른다. 아무렇게나 푹푹 눌러대는 것 같은데, 귀신 같이 호박만 으깰 뿐 팥은 건드리지 않는다.

 물컹하던 호박덩어리들이 흐물흐물 몽글몽글 죽이 되어갈수록 팥 알갱이들은 또록또록 도드라진다. 솥 두 개에 물을 더 부어 끓이는 동안, 아짐들은 호박죽에 설탕을 미리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로 격론이다.

 “어이, 여그서는 누가 허문 헌 대로 놔둬부러. 그냥 따라. 근디 설탕은 호박에 안 써 못 써. 이녘이 쳐서 묵는 것이여.”

 구양림 아짐이 목청을 높여 결론을 딱 내린다. 오늘 먹는 죽의 이름을 놓고도 동지죽, 새알죽, 팥죽, 호박죽으로 갈렸지만 “호박이 젤로 많이 들어갔슨께 호박죽이제”로 논란의 마침표를 찍는다.

 

 늙은 호박이 제 몸을 죄다 녹여낸 맛은 감미롭고

 “뜨거 뜨거, 조심해. 얼굴은 저짝으로 돌리고.”

 드디어 새알을 넣는다. 하얀 알맹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걸쭉한 솥으로 통통통 떨어질 때 포록 포록 뜨거운 방울이 튀어 오른다. 조심조심 신경을 썼지만 쟁반에 담긴 새알 몇 개가 기어이 바닥에 떨어져 샘가로 굴러간다. 이제부터는 지켜 서서 젓는 일만 남았다.

 방안엔 막바지 칼질 소리 현란하다. 배추채도 무채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칼질이 촘촘하다.

 “요건 더 몽글게 썰어야 돼. 뚝뚝해선 안 돼. 노인들 목에 걸리지 마라고.”

 무심한 듯 보이던 칼질에 담긴 속뜻이 곱기만 하다. 참기름과 통깨 아낌없이 넣어 비빈 배추나물과 시원한 지국도 완성이다.

 “탑탑해진께 요놈을 몬저 묵고 저놈은 나중에 묵고….”

 굵은 소금을 반 움큼 쥐었다가 솥 안에 고루 흩뿌려 젓는 것으로 간을 맞추고 죽을 푼다. 아짐들은 일하던 부엌방에, 아재들은 회관 거실에 살갑게 어깨를 부비며 앉는다. 여럿이 손과 맘을 보탠 호박죽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그릇그릇 담기고, 상 하나마다 지국, 배추나물, 묵은김치가 한 묶음으로 올랐다. 정이 뚝뚝 묻어나는 소박한 밥상이다.

 “워메 맛나네.” “별미제, 별미!” “마동양반! 이빠지 읍승께 마니 잡솨부러.”

 맛난 호박죽에 신이 난 아재들 수다도 솔찬하다. 그 틈에서 호박죽 세 그릇을 딱딱 긁어 비웠다. 늙은 호박이 제 몸을 죄다 녹여낸 맛은 감미롭고, 찹쌀로 빚은 미끈한 새알심은 잘깃하게 이빨사이에 엉겼다가 쏙쏙 목을 타고 넘는다. 팥 알갱이들을 입안에서 몇 번 굴리다가 통째로 톡톡 터뜨릴 때마다 혀끝에 걸리는 오묘한 맛이라니!

 지국도 나물도 수저 댈 것 없이 호박죽 목넘김이 좋은가 보다.

 이날 밥상의 최고령자인 마동양반 기태호(86) 아재도 반찬을 그대로 둔 채 세 그릇을 드신다.

 오지고 달달하고 흐뭇한 회식이다. 기세 좋은 용암산을 둘러치고, 마을을 감아 도는 계곡물이 들판을 적시고 지석강으로 흘러드는 우봉마을이다. 450년 된 당산나무와 입에서 입으로 들노래를 전승해온 유서깊은 마을답게 찐덥진 인정과 맛난 음식을 아낌없이 나눈다.

 “해마동 칠월 백중이문 제를 크게 지낸께, 꼭 다시 와야흐네 이~.”

글 = 황풍년 `전라도닷컴’ 기자/사진 = 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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