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우편함에 깃든 `반가운 소식’

그 집 대문 옆 우편함에 `반가운 소식’ 깃들었다.
새 생명의 탄생이 임박했다.
“중요한 놈(남)의 물견이제.”
말소리조차 낮추어 조심스럽게 우편함 속의 `은밀한 속사정’을 전하는 할머니.
그렇듯 유순하고 사려깊은 주인의 맘을 눈밝게 알아본 걸까. 하고 많은 곳 다 놔두고 하필 영암 신북면 월평리 한 집의 우편함 속에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하필’이 맺어준 인연을 귀하게 받자옵는 유동종(84) 할아버지·강연순(83) 할머니.
“암놈 수놈이 여간 이뻬. 참새 아녀. 버러지 묵는 새여. 사람 해롭게 하는 새 아녀.”
“알을 여섯 갠가 낳더란 말이요. 안에다 집을 좋게 지서놨어. 공력 들여서 둥지를 똥그라니 여간 이삐게 맹글었어.”
아름답고도 절박한 `용도전환’이다. 작은 우편함 속 안온한 어둠 속에 튼실하게 엮어낸 둥지. 작고 연약하고 이쁘고 위태롭고 애틋한 알 여섯 개가 그 속에 나란하다.
“새가 여간 영리해. 대문간에 내가 의자 놔뚜고 앙겄으문 절대 일로 안 옵디다. 두 마리가 저기서 짜웃짜웃 하고 있제. 그라문 내가 인자 들오니라 하고 비껴주고 그라제. 새가 어디 멀리 안 가. 알 지킬라고 가찬 디서 항시 망 보고 있제. 긍께 내가 여그 앙겄다가도 알 품으라고 얼릉 비껴주고 그래.”
굳이 `갑을’을 따지자면 이 집 우편함에 세든 새 부부가 `을’일 테지만, 집주인이 더 눈치를 보고 사는 셈이다.
지리산 골짜기에 사는 박남준 시인도 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사를 와서 보니, 하필 방문 옆 마을방송 스피커 위에 딱새가 둥지를 짓고 새끼들을 키우고 있더란다. 어찌하겠는가. 그 새끼들이 다 커서 날 수 있을 때까지 스무 날 넘게 그 쪽 문을 잠가 놓고 불편한 다른 쪽 문으로 다녔더란다. 개울 건너 청딱다구리가 오동나무 구멍에 둥지를 틀고 있어서 쌀을 씻는 것도 세수를 하러 가는 것도 빨래를 하는 것도 한동안 눈치를 보아야 했더란다.
부나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아닌, 딱새 청딱다구리 버들치 귀뚜라미 잠자리 등등의 눈치를 보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이여.
할매 할배는 편지 들고 오는 집배원한테도 미리 단속을 해 두었다. “절대로 저(우편함) 속에다 봉토(봉투) 같은 거 넣지 말고 저 욱에다 살째기 영거두라고 말해놨당께. 괴롭게 안 할라고.”
아직 주변의 누구한테도 발설하지 않은 `일급비밀’이다. “행이나 지앙스런 사람이 내가불문 안된께. 그거이(알이) 없어져뿔문 즈그 어매아배는 어쩔 것이여.”
그 무엇이든 다 주고자픈 어린 손주들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 손주들이 알문 얼매나 신기해라 하고 얼매나 좋아하겄소. 그래도 꾸욱 참고 안 갈챠줬어. 보문 이뻬서 갖고 싶제. 갖고 갈라고 울고불고 하문 안된께.”
한없이 삼가고 조심하고 살피는 마음가짐이 어미아비 새와 다르지 않다.
“고생했응께 새끼 무사히 까갖고 가야 할 턴디. 잘 까갖고 새끼 데꼬 가문 얼매나 좋겄소. 대문깐 오갈 적마다 맨나 내 속으로 비요. 지발 성공하라고.”
새한테 성공이란! “새끼들 다 살려내문 성공이제. 그보담 더 존 성공이 없제.”
`생명의 무게’를 귀히 받드는 이들이 사는 그 집. 대문간을 자신의 구역으로 삼은 또 하나의 식구는 개다.
대문에 떠억 붙여진 `개조심’이란 문구는 그의 존재를 알리는 명패이기도 하다.
“우리 개가 여간 이삐고 영리해라. 이녁 고샅 사람 다 알아. 우리 식구 오문 꼬리치고 좋아라글고 모른 사람 오문 짖고.”
이름은 `백구’. 보통명사이지만, 할매 할배가 `백구’를 부를 때 그건 어느 개와도 견줄 수 없는 `고유명사’가 된다. 개라면 의당 갖춰야 할 성정도 백구만의 특기가 된다.
몇 달 전 아들 친구가 갖다준 개. “주먹만 했는디 저러코 컸어”란 말에 대견함이 섞여들고, “여간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