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이도는 사막이다. 그러고 보니 신안에는 사막을 가진 섬이 여럿이다. 매해 겨울이면 모래가 언덕을 이루는 임자도도 그렇고, 물이 귀해 빗물이나 저수지에 넘치는 물을 받아 한 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게 꼭꼭 채워넣는 오아시스 ‘수로’도 신안섬에 발달되어 있다.
특히나 우이도는 80m에 달하는 사막의 언덕이 있다. ‘산태’라고 말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학자들은 ‘풍성사구’라고 답한다. 우이도 사람들은 산태 앞의 돈목 해수욕장 모래펄에서 꼬막을 캔다. 한데 육지에서 온 전문가들은 이것을 ‘비단조개’라고 부르라 한다. 뱃길로 61km의 우이도 사람들은 이게 싫다. 고래로 우이도 사람들이 몸으로 간직한 명칭을 모르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에.
목포항에서 우이도를 가려면 섬사랑 6호를 타야 한다. 물경 3시간 50분을 시속 18km로 간다. 느려 터져 연안 여객선이나, 쾌속선이 옆으로 지나가면 고속도로를 가는 우마차 같다는 느낌이 들거나 숫제 사막을 뚜벅 뚜벅 걸어가는 낙타와 같다는 느낌이다. 하긴 우이도에 사막이 있으니 섬사랑6호는 낙타임에 분명하다.
이 배가 들르는 곳은 비금도, 우이1구, 동우이도, 서우이도, 성촌 그리고 우이2구 돈목이다. 우이도는 20여 개의 섬 무리로 이뤄진 군도이다. 천혜적인 기암괴석의 절경도 있지만 이 우이도를 가장 도드라지게 부각 시킨 것은 ‘산태’라고 부르는 모래 언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환경 중심의 여행 패턴이 문화로 옮겨지면서 이 섬에도 또 다른 큰 보물이 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순득이라는 문리가 트인 홍어장수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전국 어느 포구에서도 찾을 수 없는 조선시대의 선창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고, 다산의 형 손암 정약전이 이 섬에 유배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모래로 밥 말아 먹는 사람들
돈목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얼마나 모래 바람이 많았으면 그랬을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돈목에서 움직이면 모든 흔적이 바닥에 남기 때문이다. 척박한 모래밭에 농사를 생각하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이들은 땅 한 뙤기만 되어도 그곳에 마늘, 상추, 양파, 고구마, 감자 같은 것은 심는다. 쌀농사는 없다. 모래에 투습되는 물인지라 논농사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니 먹고 사는 것이 전쟁이었다. 바다는 깊고 거친데다 잦은 안개와 바람이 엄습해 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또 삶은 구가되었다. 깊은 해역은 그만큼 청정하고 거대한 해산물과 어류를 안겨 주었다. 출산을 하는 며느리나 딸에게 우이도의 미역을 끓여주는 것이 최고의 산후 조리였다는 말은 목포에서 나온 말이다. 한편 바다에서 잡힌 농어가 돼지만 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우리가 보는 미끈한 농어는 여기서는 개농어라고 한다. 개가 들어간 것은 개나 먹는 것을 말하니 없어서 못 먹는 우리는 부러울 따름이다. 여기에서는 점농어가 잡힌다. 정말 크기가 우람하여 들고 있으려면 끙끙대다 놓치기 일쑤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이런 어류가 부지기수였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도 산태 쪽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안 잡힌다는 얘기다. 그렇게 잡았던 고기를 가지고 목포까지 공판하러 나갔을 우이도 사람들에게 그 시절이 점점 잊히는 것이 나그네에게도 가슴 저미어 오는 순간이었다. 근해 어업에서 원해 어업으로, 회유로에서 기다리던 것에서 서식처로 찾아가는 어업의 양식 변화도 화근이지만, 못 보던 고기들이 올라와 화들짝 놀란다는 말에는 이 난바다에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엄습해 옴을 체감할 수 있다. 어쨌든 우이도 사람들은 그 어패류와 해초류를 팔아 곡식을 바꿔먹었다. 그 곡식에 바람이 주고 간 모래가 서걱거리며 함께 몸 안으로 축적된 것은 필연이었다.
바람의 지문이 남긴 형상들
우이도의 상징 `산태’가 자못 심각했다. 14년 전 산과 산 사이에 가르마처럼 모래 언덕이 있고 그 언덕 위에서 비닐 장판을 타고 바다까지 내려간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한데 멀리서 보더라도 산태의 하단부 바다에서부터 사초가 성장하고 있다. 이제 해수면의 상승이나 바람의 힘이 여기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산태의 몸집도 높이도 줄어들었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라서 이곳은 철저하게 사람의 출입, 자연의 훼손을 차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산태가 변화하는 모습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 답을 찾기는 어렵다. 가장 쉽고도 어려운 말,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고만 할 수 없어 보인다.
이 공간에서 나서 이 공간과 더불어 성장하고 터의 무늬를 만들고 있는 다모아 민박집 박화진 사장님과 말씀을 나누니 살아온 경험을 말씀하신다. “옛날에는 소나 염소를 많이 키웠고, 땔감도 바로 이곳에서 구해서 썼지요. 당연히 산태 주변에 큰 나무도 자라지 못하고 사초 같은 것도 가축들이 먹었으니 모래가 숭숭 올라갈 수 있었지요. 한데 이제는 땔감도 안 쓰고, 소도 없고 그런 데다 국립공원이라 사람들의 출입도 없으니 변할 수밖에 없죠. 근데 또 조심스럽지만 방파제 같은 것, 부두 같은 것을 만들면서 물길이 조금 바뀐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고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그네는 걱정이 된다. 삶의 터전에서 풍경으로 변하고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 되면서 나타나는 이런 징후와 인간의 개입이 가장 큰 물의 길 위에 사람의 길이 편입된 상황 사이의 딜레마. 산태를 찾아 탐방로를 오르니 산태의 정상이 보인다. 바람의 지문이 원형을 그리거나 초생달을 만들거나 말굽을 만들고 사초를 돌려내어 바람시계를 만드는 소소한 관찰의 재미는 여전하지만 이미 들었던 걱정의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매일 보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법한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 현장이라니. 그럼에도 여전히 산태는 위용을 자랑한다. 해무가 엄습하고 바람이 윙윙거리는 대한민국 최남단의 한 섬에서 한국식 사막 산태와 함께 한 시간은 그래도 소중했다.
해양 교역에 눈뜬 문순득
섬의 밤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시집 한 권과 해양문화 관련한 두 권의 책을 들척이다 잠이 들었고 바람소리에 눈을 떴다. 이른 아침 정성으로 마련한 우이도식 아침을 먹고 호미를 들고 돈목에 갔다. 채집이 금지된 해수욕장의 꼬막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물이 빠지고 드러난 모래갯벌 속에는 이 동네의 명물 꼬막이 있다. 금세 서른 마리 정도가 각색의 문양으로 나타난다. 반갑고 고마웠다. 채집을 금하기 때문에 다시 놓아주니 모래 속으로 들어가는 속도가 LTE급이다. 이 신기함을 뒤로 하고 짐을 꾸린다. 산을 넘어 3.6㎞를 가면 정약전과 문순득과 선소가 있는 진리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바닷길로는 8㎞ 정도인데 배가 없으니 등산 겸해서 호젓하게 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정비가 되지 않았지만 오솔길은 정말 정겨웠다. 게다가 사람 때를 덜 타서 발자국을 사뿐 받아주는 흙의 탄력이 고마웠다. 그렇게 한 시간 이십여 분을 걸으니 진리 마을의 뒷자락이다. 비교적 뜨락이 넓은 이곳에 아주머니들이 밭일을 하신다. 그 자세가 기역자 형상이다. 밭일을 하면서도 꼬막을 캐면서도 미역을 주우면서도 꼿꼿한 `ㄱ’자 형상으로 일하신다. 편하다고 하신다. 지금은 밭이 된 손암 정약전의 서당터나 집터를 보며 무상한 세월보다 섬사람들과 친화하고 지식을 나누고 삶을 기록하려 했던 그의 정신이 환하게 빛나 보였다. 좀 더 내려와 마을 안쪽으로 드니 문순득 생가가 나타난다. 1802년 홍어를 사기 위해 출항했던 그는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에 표착하고, 다시 그곳을 나와 중국을 경유해 조선으로 돌아오려다 또 풍랑을 만나 이번에는 필리핀에 들어섰다. 해상교역으로 다져진 이런 국가에서 국제적인 송환프로그램에 준해 마카오, 난징, 북경, 한양 등을 통해 되돌아왔지만 3년 2개월이란 세월이 걸렸다. 눈썰미 좋은 문순득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의 문물과 선박, 의복, 주거, 언어, 국제교류 등을 우이도에 귀양 온 정약전에게 전달하고 이를 `표해시말’이란 저술을 통해 남겨 두었다. 그리고 다산의 제자 이강회도 문순득을 만나 그의 이야기와 표해시말을 유암총서에 담았다. 9세기 장보고의 해상 제패 이후에 바다를 통한 세상과의 만남에 눈을 닫았던 여러 왕조로서 문순득이 바라본 바다와 그 바다를 누비는 사람들의 활약은 엄청난 격변이라 할 수 있다. 문순득은 때문에 해양문학의 태두이자 전환점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표류민으로서 생환에만 염두에 둔 상인이 아니라 세계와 해양을 만난 조선인 문순득. 그의 생가와 그가 출발했던 선창을 찾는 것은 우리가 잊고 사는 바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안목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포구로 가니 1745년 수리의 기록이 남아있는 선소가 나온다. 선소는 군함을 만들고 수리하는 곳이다. 선소의 흔적만 있지 제대로 옛 모습 갖춘 곳이 없는 이 땅에서 어떤 과정과 내용을 담아 누가 이 일을 했는지 말끔하게 기록이 있고, 형태까지 온전하니 생활 속에 축적된 과학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우이도는 온전하게 바위와 모래로 이뤄진 섬이다. 누만년 축적한 모래가 들려주는 섬의 이이야기가 바람결에 흘러온다. 표해시말을 통해, 세상과 문명을 오직 단독자의 눈으로 봐버린, 그럼에도 혼자 간직하지 않고 세상에 내놓았던, 해양문화의 새로운 창을 형성했던 문순득이 있었고 이를 기록했던 정약전과 이강회가 있었던 섬이다. 이 여름, 돈목에서 해수욕을 하고, 사막을 관찰하고, 산길을 따라 땀으로 목욕을 하고, 선창과 문순득, 정약전, 이강회를 보며 해양의 시선을 다져보자.
전고필 <여행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