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우이동에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우이동은 서울에서 제일 높은 산인 북한산이 있는 동네다. 북한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어깨를 겨누며 웅장하게 솟아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린다.
지난 주말에 서울 부모님 집에 들렀다가 북한산에 올랐다. 집 뒤의 산이라 어렸을 때는 자주 올랐는데 집을 떠나고 나서는 언제 갔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 산을 안 오른 지 이십년은 족히 넘는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북한산 길은 힘들지만 아기자기하고 스릴이 있고 재미있었다. 그냥 산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바위를 넘고 나무 뿌리를 타고 큰 바위를 네 발로 오르고 암벽에 걸쳐진 쇠줄에 온 몸을 지탱해서 아슬아슬하게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오랜만에 오른 산은 어린 시절의 그 산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흙길은 대리석 같은 직사각형 돌이 촘촘히 깔려있고 오르막길은 돌층계가 대신하고 바위들 사이에는 나무 계단이 놓여있고 큰 바위의 암벽 쇠줄은 긴 나무 데크로 바뀌어져 있었다. 흙 대신 돌을 밟고, 산길 대신 계단을 오르게 되었다.
북한산에 오르며 교육을 생각하다
깊은 산 속에서까지 계단을 올라야 하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우리 집 뒷산도, 무등산도 모두 돌계단, 나무 계단으로 바뀐 지 오래다. 나는 그런 산이 싫다. 제발 산을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등산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할 테니까. 흙먼지 덜 나고, 미끄러지지도 않고, 안전한 층계를 이용하니 좋은 거 아니냐고 주장할 것이다. 난 자연의 산을 오르고 싶다. 그런 내 말이 먹힐 거 같지가 않다. 나는 원치 않지만 그들이 만든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일방통행이다.
일방통행은 막히게 마련이고 막히면 어디론가 삐져나오게 되어있다. 오르기 편하라고 만들어놓은 계단 양 옆에는 어김없이 새로 난 길이 있다. 등산객들이 계단을 피해 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이다. 옆길이 여의치 않은 곳은 아예 샛길이 나있기도 한다. 옆길은 일탈의 길이고 반항의 길이지만 자유의 길이기도 하다.
답답한 심정으로 산길을 오르다 엄마들의 자녀 교육도 이렇게 일방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힘 안 들고 안전하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런데 아이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오히려 헛심 쓰는 일에 신나하고 길 아닌 곳에서 헤매길 좋아한다. 엄마는 아이 목덜미 잡고 만들어 놓은 길로 데려간다. 아이는 또 샛길로 빠진다. 엄마는 좋은 길 놔두고 쓸데없는 길로 가려는 아이가 이해가 안 된다.
아이들은 엄마가 만들어놓은 계단을 싫어한다. 내 몸과 내 마음의 흐름에 따라 나의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의 힘은 자발성과 자유로움에서 나온다. 계단은 안전과 효율을 주지만 대신 자발성과 자유로움의 생명력을 훼손시킨다. 아이들은 매 순간 반응하고 선택하면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길 원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 흐름따라 가고 싶은 길
인생이라는 산에서 나무 계단을 오르게 하려는지 아니면 자연의 길에서 생명력을 만끽하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엄마가 ‘계단’을 만들면 아이는 ‘옆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행히 북한산 중턱까지만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있었다. 그 뒤로는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큰 나무 뿌리를 넘고 바위를 타고 쇠줄 지탱해서 암벽을 오르고 땀 뻘뻘 흘리면서 정상에 올랐다. 동서남북 서울이 시원하게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언제 또 이 산을 오를 때 정상까지 계단이 만들어져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제발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윤우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남평미래병원 원장·사이코 드라마 수련감독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