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대표 도심 관광은 어떻게 탄생했나?
올해 초, 대구의 벗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구에서 이뤄지는 축제의 평가를 함께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대구의 내면을 깊숙이 볼 수 있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지난 봄, 컬러풀축제, 동성로거리축제, 쥬얼리축제, 근대거리문화제 등을 참관했고, 인접한 청도의 소싸움축제도 참관하게 되었다. 광주에서 금남로와 충장로가 광주문화의 큰 핵을 차지하듯 동성로는 대구문화의 중심이고, 청년의 맥박이 가장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동성로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았다. 예컨대 충장로의 4가와 5가와 마찬가지로 한켠의 씁쓸함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지역의 축제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공연과 전시와 경연, 체험, 퍼포먼스 등의 형식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어서 몰입하거나 큰 파장을 던져주는 것이 그다지 없었다. 다만 다르다면 충장축제처럼 거리 퍼레이드 경연을 하는데, 시민적 참여와 호응이 매우 크다는 점, 축제 전반이 대구라는 도시가 섬유의 고장으로서 ‘컬러풀 대구’를 표명하듯 원색을 잘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축제를 통해 도시 재생이나 도심 공동화에 대한 고민의 한켠을 어떻게든 치환하는 방책을 구해보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었다.
이렇듯 축제를 관람하고 프로그램과 공간, 참여자와 준비주체의 고민과 즐거움을 엿보고 밤이 되면 내 우격다짐으로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대구 중구의 근대골목이다. 전번 주말 대구를 찾았다. 대구국제바디페인팅 페스티벌을 보아야했다. 이 또한 컬러풀 대구를 뜨겁게 달구는 축제이기도 하다.
대구 근대골목의 이야기
근대는 이전 왕조시대의 통치가 끝나며 새로운 제도와 문물과 관습이 형성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에게 근대라 이야기하는 시대는 대부분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전후시기를 근대라 통칭한다. 대구의 근대 또한 이 범주 안에 속해 있음을 중구의 근대골목에서 느낄 수 있다. 그곳에는 아직 일제강점기의 잔상들이 남아있다. 그들이 사용했던 가게와 다다미 방이 아직 남아있고, 적산가옥도 남아있다. 주인도 바뀌고 상호명도 바뀌었지만 그 오랜 시간을 약간의 개조만을 한 가운데 살려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음미할 수 있는 맛집과 선술집이 주인이 바뀌거나 주방장이 바뀌면서도 여전한 곳이 있다. 나그네는 대구에 가면 그날이 일요일만 아니라면 종로초밥집에 들리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그 지역의 다양한 맛을 풍미하고자 하지만 제주도와 이곳 대구에서만은 예외다. 어떤 묘한 끌림 같은 것과 더불어 그 음식의 풍미에 중독된 듯 하다. 누군가 “경상도는 휴게소 닥꽝도 맛이 없다”라는 말로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일합을 던졌지만 그렇지는 않다. 막창이, 팔공산의 두부가, 갈비가, 국밥이 모두 맛있었다. 그러면서도 초밥집만 고집한다. 화교소학교를 조금만 지나면 나오는 허름한 그 집은 사께와 오뎅과 선어회가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특히나 광주에서는 선어회를 맛보기 어려워졌다. 그 많았던 선어횟집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오뎅을 내어놓는 집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 대구에는 남아있다. 50가까운 내가 들어가기 쑥스러울 정도인 초밥집의 단골들은 모두 백발이 성한 70대거나 80대의 어르신이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마디로 60년쯤은 타임머신을 탄 듯하다. 대체 내가 몇세기에 존재하는지를 잊어버리고 만다. 비단 그 집만이 아니다.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대구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는 소아과가 남아있다. 개인주택을 병원으로 이용했던 것은 많지만 그것이 대구에 첫 번째였다고 할 때 느껴지는 소회는 남다르다. 오늘 시대에 담양의 어린이들이 출생한 곳을 물으면 에덴병원이거나 은대숙산부인과라고 말할 사오십년후와 동의어다.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또한 여기에 있다. 어찌보면 성장 소설이면서도 대구지역의 시대적 단면이 깊게 내재된 이 글을 보는 사람은 그 시간의 자장 안에 포섭된 자신을 알게될 정도의 소설이 바로 이 근대골목, 진골목에서 탄생했다.
이 골목에는 다방도 아직 남아있다. 텍트나 소형차를 타고 ‘오봉’을 가지고 배달하는 다방이 아니다. 한복을 곱게 입은 마담이 오차를 내어주며 주문을 받고 쌍화차에 날계란 노린자를 띄워주는 그런 곳이다. 아직 한참 젊은 내가 가서 “마담” 이렇게 부르지 못한다. 그 아우라가 대구를 지켜온 터줏대감과 같기에 “선생님 여기 쌍화차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예전에 광주도 그랬다. 한데 지금은 없다. 사리지고 없다. 대구는 건재하게 남아있다.
골목을 뒤적이면 이곳이 권번의 기생들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이뤄진 곳이라는 안내글이 나온다. 서상돈으로 대표되는 국채보상을 통해 국가의 자존감과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대구에서 발발했을 때, 저 자존감 있는 여인들도 고쟁이돈, 구렁이 알 같은 돈을 내어 놓고 우리 자주독립해야지에 나섰던 것이다. 서울만 종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구에도 민족정신의 구심으로 종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골목 골목에 담겨진 이야기를 따라가면 삼덕상회가 나타나고, 공구박물관이 있고, 게스트하우스도 있고,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설치작업으로 표현한 조형물이 있다. 걷는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는 근대에 동화된다. 스치듯 보다가 깊이 보다가, 골똘이 되돌아본다. 대저 이 깊이 있는 근대로의 여행은 누가 발상했고 지속하고 있는 것인지. 윤곽이 보인다. 그 광인들.
대구의 속내를 환히 아는 이들
2000년대 초반 대구 삼덕동에서는 개인 주택의 담장 허물기가 이뤄졌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마당을 함께 나눠 쓴다는 개념과 나는 이웃을 신뢰한다는 표상이었다. 광주에서도 북구청이 담벽을 없앴다. 시민도 하는데 행정이 무엇이 두려워 못하겠는가 였지 싶은데,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대구에서 이런 시민의 행동을 함께 응원하고 지지하는 조직이 있었다. 대구 거리문화시민연대라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차가 주인이 되는 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가득한 거리를 꿈꾸었다. 마임이스트 조성진 선생, 아카이비스트 권상구 선생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대구의 중심과 같은 이 동성로 일원에 매진했다. 골목지도가 나오고 골목 스토리가 발굴되어 작은 책으로 출간되었다. 대구 또한 택지개발로 도심내 공동화가 진행되는 그런 상황에서 잊혀져가는 원도심에 사랑을 심은 것이다. 그러다 다소 심드렁해질 무렵, 대구인문사회연구소의 신동호 소장이 권상구 선생에게 발동을 걸었다. 집에 칩거한 이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권상구 선생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미친 사람처럼 천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력을 캐고, 공간의 역사와 흔적을 더듬고, 그들의 관계를 알아내고, 기록하고, 전시하고, 공유하고. 그런 힘이 오늘로 이어져왔다.
몇 해 전 권상구 선생이 ‘대구 신택리지’라는 책을 상재한 것은 그가 얼마나 중구의 골목을 헤멨는지 반증이자 그로 인하여 대구 시민의 지층을 더 깊고 넓게 확장하는 쾌거였다.
이들에 의해 대구의 역사를 탐방하는 ‘근대로의 여행’은 탄생했다. 선교사의 사택이 있고, 성당이 있고, 각종 유물이 있는 계산동이 광주의 양림동처럼 부각 되었고, 그 아래 곧 헐릴 것 같았던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를 쓴 이상화 선생의 생가도 살아났다.
5개 코스로 짜여진 대구 근대로의 여행은 대구의 심장부인 동성로와 인접 지역을 담고 있다. 그저 막연히 걷는 곳이 아닌 낱개의 개인이 역사와 마주하며 어떻게 스스로를 단도리하고 맞섰거나 무뎌졌는지를 보여주는 길이다. 이 길 걸어서 건강에 도움될 것은 아니다. 도시에도 골목 골목에도 사람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왔던 삶에 경의를 표하고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 여기에 이런 지순한 일이 몇몇의 식자에게만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나누는 것이 순리라고 여기는 행정이 함께했다는 점, 그러했기에 오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심관광 상품으로 우뚝하다는 점이다.
지지부진한 양림동 사업, 10년도 지나 개관도 아닌 임시오픈을 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한번쯤은 그들이 만든 판과 그들이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을 들어주는 것이 응당 배움여행이지 않을까.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