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전설 품은 맑은 물빛

돌의 고장 화순 땅을 찾아서
여름과 가을 사이 아침과 밤은 서늘하고 낮은 자글거린다. 낮이 자글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직 남아있는 계절의 힘을 다 모아내야 성근 가을 곡식과 과일을 생산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력을 다하는 가을볕에는 봄날 다가오는 날카로운 빛 보다는 풍만함이 가득하다. 해서 옛 사람들은 미운 며느리는 봄볕에 내놓고 예쁜 딸내미는 가을볕에 내 놓는다고 했었더란다. 그런 가을볕의 가르마를 타며 따라가는 남도길은 어디를 가더라도 아름답다. 그중 화순 땅을 밟는다. 화순을 대표하는 곳들은 다채롭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순고인돌공원이 첫 번째로 꼽히기도 하지만, 여전히 화순은 천불천탑의 운주사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스님의 무덤인 부도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쌍봉사도 꼽힌다.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있다가 한정된 날짜에만 입장이 허락된 ‘적벽’도 그 명성이 팔도에 그윽하다. 역사자원과 자연경관 자원이 어우러진 화순은 어쩌면 돌의 고장이라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화순의 많은 인재를 양성시킨 것은 국내 최고품질의 석탄이었다. 그 탄가루를 마시며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자식 농사를 남다르게 지으셨다. 오래된 돌가루가 화순의 오늘 인재상을 만들었다면, 붉음으로 가득한 적벽의 돌은 시인 묵객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잡아내었다. 삿갓 김병연이 동복에서 운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재 최산두가 동복에 유배생활하면서 길러낸 이가 하서 김인후와 같은 대유이고, 석천 임억령 등이 출입하면서 적벽이라는 이름도 갖게 된 것이었다. 춘양면과 도곡면 사이의 보검재 산마루를 따라 산개해 있는 590여 기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땅이었는지를 반증하고 있고, 그 시대의 천연적 노동력인 인력으로 이 거대한 공사를 벌일 수 있는 돌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도선국사가 한반도의 지기가 일본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혹은 이곳에 수도를 만들기 위해 하루 품을 들여 만들었다고 하는 운주사의 천불과 천탑도 돌이다.
화순에서는 이런 돌에도 불심이 있다고 한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만들 때 근동의 모든 돌들이 서로 부처가 되고 탑이 되겠다고 머리를 운주사 쪽으로 돌리고 뚜벅 뚜벅 다가갔는데, 그 방정스런 동자승 때문에 천지공사가 중단되고, 바윗돌도 제 역할을 못한 아쉬움으로 남아있다는 게 그 지역 분들 사이에 구전되어지고 있다. 돌로 역사를 반추하고, 돌로 아름다움을 보고, 돌가루로 성장하고, 돌로 오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화순 땅이니 여느 돌도 하냥 보아지지 않는 곳이 화순이다.
주암호 자락 따라 모후산에 들다
길이 시원하게 뚫렸다. 한데 그 길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강물을 휘돌아가며, 산자락이 토돌거리며 내어놓은 잿마루나 그곳에 재금내서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삶의 풍정은 생략하고 걸핏하면 두더지처럼 터널로 내밀고 직선으로만 달리게 해서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 마을의 삶은 어떠한지 질문조차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길이 밉기만 하다.
확연히 달라진 길을 따라 나타난 주암호, 금년 유달리 강수량이 모자라 삼켰던 옛 마을의 정취를 드러낸다. 보는 내겐 애틋하지만, 벌초하러 온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억장 무너지는 모습이겠다는 서글픔까지 몰려온다.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풍경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회한과 비통함으로 몰아칠 것 같았다. 그 모습 뒤로 하고 골짜기를 향해 들어선다. 화순군 남면 유마마을.
이곳은 모후산의 산자락이 토해내는 물줄기가 맵찬 곳이었다. 때문에 사방공사를 해서 개울물은 모두 석축에 부딪혀 흘려보내고 있었다. 물론 윗자락에 오염물질을 내놓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굽이치며 여울을 만나고, 정수수초를 만나는 것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지만, 옛적 시냇물이 아니라 배수관을 따라가는 상수도 물 같은 느낌이 들어온다. 세상의 풍경이 이렇게 변하는 것에는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역행하며 편리함을 추구하다 자연의 변화 앞에 속수무책이었다가 이를 재해로 재해석하고 대비책을 만든다며 또 자연의 길을 훼손하는 어처구니의 악순환 아닌가 싶어 편치 않다.
그런 생각을 하다 어느 사이 들어선 산사 늙어도 태 내지 않는 전나무들 건재하다. 그 사이에 늙은 상수리나무도 인사를 보낸다. 머리에 떨어지는 상수리의 안부인사가 반갑다. 애기단풍나무도 모두 잘 있다. 그 나무 아래로 다람쥐들 분주하다. 유마사에서 첫 번째 만나야 하는 것은 유마동천보안교라는 다리다. 숫제 다른 곳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통 돌다리가 바로 보안교다. 모후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세찬 물줄기 이 물줄기를 건너야 진입할 수 있는 성스러운 땅이 바로 유마사다. 한데 속가의 사람들이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절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안쓰러운 보안낭자가 치마에다가 이 돌을 싸서 옮겨 다리로 놓았다고 한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월천공덕이라고 한다. 물에 젖지 않고 그럼에도 다리를 건너며 속가의 묵은 떼를 벗겨 버리고 들어오도록 배려하는 공력은 다양한 공덕 중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우리가 절집을 갈 때 의례 건너는 다리에는 절집의 공간배치의 모델과 내포된 의미망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여튼 보안낭자가 놓았다는 다리는 길이만도 5M가 넘는데, 이런 돌을 통째로 옮긴 여인이라면 이분 또한 거인이었을 것 아닌가 싶다. 마치 화순고인돌공원의 핑매바위를 옮기던 마고할미처럼.
아쉽게도 10여 년 전만 해도 그 다리를 건널 수 있었는데 이제는 철망으로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석축의 결구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안타깝기만 하다.
좀 더 위쪽으로 가면 오른편의 돌이 석불을 만들기 맞춤한 형태로 서 있다. 그 바위 새김하지 않고 글만 써 놓았다. 미륵불. 미륵이 되실 바위라는 것을 점지해 놓은 것 같다.
굳센 바위와 늙은 나무들 사이에서 꽃무릇 피어나기 시작한다. 9월의 중순, 남도는 상사화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 꽃에 앉아 꿀을 얻는 사향제비나비와 호랑나비를 보다 절집으로 향한다.
3기의 부도와 돌담에 쌓인 산신각
유마사에는 그곳에 주석했던 스님의 부도가 3기 남아있다. 그 옛적 찬란했던 불적들은 각종의 병화를 입어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6·25가 모조리 쓸어 버렸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은 바로 돌로 된 부도와 전설이다. 부도는 먼저 보물로 지정된 해련스님의 부도가 먼저 있다. 8각 원당형이라는 가장 표준형의 부도가 고려 전기부터 이제까지의 세월을 껴안고 서 있다. 비바람이 파먹은 것과 인재로 인한 것이 겹쳐서 몸통은 건재하지만 귀꽃이 거의 다 멸실되어 있다. 그럼에도 고려전기의 안정적인 조형성이 이 탑을 보물로 만들었나 보다 라는 생각이 일게 했다. 도선국사가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에는 이 절 이름이 해련사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좀 더 위쪽을 가니 왼편에는 가안선사의 부도 오른편으로는 경헌장로의 부도가 나타난다. 경헌장로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시 승병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며, 가안선사는 유마사의 나한상을 조성하는데 공력을 들였다고 한다.
경헌장로의 승탑의 받침에는 호랑이와 사자, 멧돼지가 귀퉁이에서 탑을 받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대개의 탑이나 부도에는 사천왕, 가릉빈가, 사자가 주를 이루는데, 모후산에나 살았을 법한 호랑이와 멧돼지가 등장하니 이 또한 재미지다. 혹여 경헌장로가 이곳 모후산의 산신이 된 것은 아닐까. 아니 산신이 되었으면 하는 불자의 바람이 여기 호랑이와 멧돼지로 새겨지진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일게 된다.
보안낭자의 제월천을 찾아서
이제 새롭게 불사를 한 경내에 이른다. 대웅전에서 먼저 종교와 상관없이 예법에 따라 삼배를 드리고 이 절을 품은 모후산에 눈길을 준다. 십 수 년 전 비오는 봄날 망연한 신록에 눈길 발길 다 굳었을 때 주지스님인 일장스님이 가만히 불러 “처사님 차나 한잔 하시고 가세요”라는 시간도 생각난다. 한참을 불전에서 있다가 산신각에 오른다. 성벽처럼 돌로 둘러진 곳에 옹위된 산신은 여전히 건재하시다. 돌 많은 고장답다는 생각하고 이제 유마사의 마지막 탐방지를 향해 가다 불현 듯 화장실이 생각난다. 그 때 누었던 번뇌는 아직도 떨어지고 있을는지 하면서 찾아가는 화장실은 아직도 신발을 벗어야 들어가는 곳이다. 또 한 번 번뇌를 떨어뜨리고 돌아와 물 한 모금 마신다. 제월천은 유마사를 창건했다는 유마운의 딸 보안낭자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리따운 이 낭자에게 흔들린 스님이 잦은 유혹을 하자 그에게 샘에 비추인 달을 꺼내라고 했더니 결국 꺼내지 못했단다. 그럼에도 다시 그녀를 넘보자 불전 앞에서 몸을 내어주니 그 스님이 “어찌 신성한 불전 앞에서”라고 말하니 보안낭자는 “니 눈에 저 나무토막의 부처는 보이고 살아있는 부처는 아니 보이느냐”라는 말을 남기고 부처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머리에 남은 제월천의 샘물을 다시 한 모금 담아본다. 신비로운 전설과 그 전설을 지키는 돌들이 아직 건재한 모후산의 유마사, 이제부터 늦은 가을까지 적요의 사찰에 들어봐도 좋겠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