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하이테크 분청사기 생산기지

 금곡마을은 행정명으로 하면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에 속한다. 원래 이 마을은 쇠금(金)자에 골짜기 곡(谷)자를 쓰는 곳으로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쇳골’이다. 또 한편으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물이 흘러 ‘서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을은 무등산의 동북쪽 자락으로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해발 1187m)이 바로 예전에는 금곡동 1번지에 해당되어 무등산의 주인 마을인 곳이다.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자락이 원효계곡을 형성하고 그곳에 원효사와 의상봉을 품고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원효폭포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옛적부터 이곳은 물과 산림자원, 그리고 흙과 돌이 풍부해 주검동으로 널리 알려진 철의 생산지이고, 도요지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의 생산지, 닥나무를 주원료로 하는 종이의 생산지, 무등산 고유의 수박인 푸랭이를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오늘날로 하자면 그야말로 ‘생산 클러스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의병을 모아 이곳 원효계곡 주검동에서 병장기를 만들었는데 이는 천혜적으로 무등산 자락에서 나는 돌인 석영안산암과 미문상화강암의 마사토가 야철을 생산하기에 맞춤이었던 탓이다. 또한 도요지의 조건인 땔감이 풍부하고 좋은 흙을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청자에서 분청사기와 백자를 모두 생산했던 것이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문 씨들이 터전을 잡으면서라고 한다. 마을 대부분은 문 씨들의 집성촌과 같다. 마치 충효마을이 김덕령 장군의 후손들의 집성촌인 것과 유사하다. 현재 마을 주민 대부분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밭농사와 포도를 비롯한 과수농사에 기대 살고 있다. 또한 주민 일부는 무등산 자락을 따라 드라이브를 나오는 광주사람 들을 대상으로 음식점이나 노점을 하면서 조석으로는 농사를 짓기도 한다.

 마을은 광주에서 충효동 가는 길이 관통하고 있고 또 동북쪽으로는 소쇄원으로 가는 샛길이 생겨나 번잡스러움을 가중하는 형편이다.

 금곡 마을은 몇 차례의 큰 변곡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청자를 생산하던 도공들이 이곳으로 왔던 과정, 두 번째는 주검동으로 들어간 김덕령의 부대가 검과 창을 만들던 때, 세 번째는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이곳을 침탈하며 도자기의 생산이 멎어 버린 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후에는 원효계곡의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취가정, 가사문학관 등이 유명해지면서 무등산 자락을 타고 찾아오는 탐방객이 늘면서 부터라 할 수 있겠다.

 하여튼 이 마을이 자랑하는 분청사기 전시관을 찾아가 보자.

 

 고려시대부터 도자 생산지

 

 마을에서 동남쪽이 무등산이다. 무등산을 보면서 산장길 즉, 배재마을을 향해 경사길을 오르면 좌측으로 충효동 도요지가 나타난다. 이 일원에서 발굴한 도자기류와 파편, 형태가 완벽하게 남아있는 가마터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사실 이 마을은 논이나 밭자락 어느 곳에서도 사금파리가 나온다. 도자기의 파편을 사금파리라 부른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사금파리는 형태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이 그릇을 사용했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단서로 본다. 마을에 도자기의 생산 공장인 도요지가 들어선 것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60년대 서울의 국립박물관과 90년대 광주박물관에서 조심스럽게 땅을 뒤져서 나타난 것이 14세기 말이라고 했다. 그 시대면 고려의 말쯤에 해당되는 시기다. 강진을 중심으로 뛰어난 청자가 생산되다 점차 그 기술이 소멸되어가고 있을 즈음 이곳에도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정점을 찍었다는 분청사기가 생산되고, 뒤를 이어 백자까지 생산되었으니 그야말로 한국 도사사의 타임캡슐을 가진 곳이 금곡마을이다.

 예부터 이런 사금파리가 소문이 자자했던지 일제 강점기에는 도굴꾼들이 찾아와 산언덕이나 밭자락을 파헤치고 가는 일이 많았다. 마을 주민 중에는 1950년대 당시 학교 다닐 때 선생님 한 분이 자주 학생들과 함께 밭과 산자락을 다니며 도자기의 유물을 수습했었다고도 말씀하신다. 주민들이 이런 도요지가 가지는 역사를 잘 알 수는 없다.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얘기로 옛날에 여기 가마터가 있고, 도공들이 도자기를 구웠다는 것 정도만 알지 이후에 그분들이 어디로 갔는지, 왜 도자기 생산은 하지 않는지 잘 전해오지 않았다. 도요지가 정식적으로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61년의 일이다. 그리고 1963년 6월부터 7월까지 한 달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서둘러 발굴에 나서게 되었다. 발굴조사 후 밝혀진 것은 고려시대부터 도자 생산지였던 것이다. 시간의 지층을 파보면서 위쪽에는 가장 가까운 시기의 백자가, 그 속에는 분청사기가 그리고 가장 아래에서는 청자가 나왔다. 이로써 금곡마을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백토와 땔나무와 물, 인력이 충분한 조건이 되었음을 입증했으며 무등산이 품은 금곡이 초기 청자 생산에서 분청사기를 생산하고 뒤를 이어 백자를 생산했던 한국 도자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입지를 갖게 된 것이다. 특히 분청사기는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관요로 알려진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의 ‘분청사기의 멋’이란 글을 보면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줄임말로, 우리나라에는 분청사기와 관련한 관요가 전국에 3백 수십 군데에 걸쳐 존재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못생긴 것이 잘생긴 분청사기 세계

 

 그 글을 더 보자면

 “쇠퇴한 고려청자를 치장한 분청사기의 기술은 한편으로 새로운 예술의 건설에 활력소가 되었다. 거칠어진 솜씨가 오히려 신선한 맛을 더해가고 대담해진 문양들이 오히려 근대성을 띠며 새로운 미를 탄생시켜 조선조 문화의 새로운 건설에 이바지했다. 고려청자에 바탕을 둔 분청사기의 기법은 한층 대범해지고 민중적이었으며 서민적이었다. 중략.

 분청사기의 좋은 점은

 첫째, 거친 살결에 분을 바르는 화장술은 새 맛으로 승화되어 장식 의장 이상의 장식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데가 없이 자연스러운 신선미를 자아내어 마치 한산모시나 안동포 같은 자연스러움을 자랑한다. 둘째는 대담한 과장, 대담한 생략, 대담한 왜곡이 그 특징으로 이것은 근대미술의 세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셋째는 전체의 생김새로서 예쁘게 생긴 아름다움보다 잘생긴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분청사기의 세계다. 좌우대칭이나 둥근 맛을 무시하고 되는 대로 빚어낸 것들이지만 억지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이 자연스럽다. 다시 말하면 못생긴 것이 오히려 잘생긴 세계가 분청사기의 세계다. 넷째는 상상의 날개가 자유스럽게 활개 친 치기의 아름다움이 곧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추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또한 비단 분청사기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군더더기나 잔재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특색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미술품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분청사기는 특히 가까이 뜯어보는 아름다움보다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당장에 느끼는 아름다움보다는 돌아서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라고 무한한 칭찬을 보내준 것이 분청사기다.

 

 원산지·생산자 표기 당당 ‘자신감’

 

 주민들이 영예로 여기는 것은 또 하나있다. 우리나라에 국립박물관이 설립되면서 대부분 한양 도성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뤄지다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발굴이 이뤄진 곳이 바로 금곡동이라는 것, 그만큼 이곳 도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가마터와 분청사기의 기법인 박지, 조화, 상감, 인화 등의 조각이 나왔고 상층부에서는 덤벙, 귀얄, 분청과 같은 백자기법의 조각들이 발굴되었다. 이후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재발굴이 이뤄지며 보다 정밀한 발굴이 이뤄졌는데, 당시 발굴조사 결과 4기의 가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근동의 가마터를 살펴보면 금곡마을에 4곳이 있고, 배재 쪽에 한곳, 평촌의 버성골 쪽에 한곳으로 총 6곳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고, 화암마을과 분토마을에는 백자가마터가 각각 한곳씩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발굴되었던 것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수장되어 있으며, 2014년 무등산 분청사기전을 개최하여 새롭게 주목과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현 시대에 계승발전하기 위해 아랫마을인 평촌에는 평촌도예공방이 있고, 무등산 주변의 도예인들이 결집한 무등산분청사기협회(회장 이은석)가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충효동 도요지에서 발굴된 주요한 유물은 도자기의 생산지를 증거하는 광(光)이라는 명문, 광일, 광산, 광별, 광공, 광무 등의 명문과 어존 등의 한글로 된 명문이 있고, 도자기를 만든 사람의 성씨나 이름, 만든 해가 표기된 것도 있다. 원산지와 생산자의 표기가 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지방관요로서 일종의 품질보증의 증표이기도 하고, 만든 이의 자존감에 대한 표현이기도 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현재는 2차 발굴을 통해 발견된 보존상태가 양호한 가마터를 경화 처리하여 통째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기를 전시하고 있어 출토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 주말 가까이 한 번 찾아보면 좋겠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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