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안좌도를 가다

▲ 대리 우실과 남근석.

 붕어가 맺어준 인연

 그 섬 안좌도가 내게 다가온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광주극장의 마지막 간판 그림을 그리는 박태규 선생이 안좌도 주민강좌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섬에 들어갔다. 주민센터에 모이신 40여분과 함께 도서지역과 관광에 관한 얘기를 마치고 짬이 나서 저수지를 탐색해 보았다. 이미 차 안에는 민물 낚싯대가 갖춰져 있었다. 읍동이라 불리는 면소재지의 중심에서 가다보니 갑자기 양쪽으로 바닷물이 모아지는 곳이 있었다. 아 여기가 원래 섬이 두 개였는데 하나로 합한 길목이구나 싶어졌다. 노루의 목처럼 좁아진 곳이라 해서 항목리라고 명명하는 곳에 과거 기좌도라 불리는 읍동 지역과 안창도라고 불리는 대리 지역 중심의 두 섬을 합하면서 안좌도라는 이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외로운 섬의 입장에서는 두 개의 큰 섬이 이어지는 것으로 새로운 힘을 돋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을 터이다.

 하여튼 그곳을 지나니 길옆으로 조그만 저수지 하나 눈에 들어온다. 해가 뉘엿거리는 가운데 지렁이를 끼우고 사그라드는 수초 사이의 물골로 채비를 던졌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낚시를 제대로 할 줄 몰라 그랬을 터이지만 넣었다하면 바로 바늘을 물고 곤두박질치는 것이었다. 손바닥보다 더 큰 붕어를 삽시간에 열댓 마리를 잡았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낯선 곳에서 어두운 것도 모르고 낚시 삼매경에 빠졌다가 돌아와 조그마한 여관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배로 목포로 나가기 전에 몸은 이미 그 저수지로 가 있었다. 안좌도를 낚시계에서는 붕어천국이라고 하는 것을 진즉 들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역시 이른 아침의 입질도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나오기가 싫었지만 약속이 있으니 도리 없었다. 그렇게 안좌도는 낚시로 인연이 이어졌다. 일상의 정적을 파열시키기 위해, 나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충만한 힘을 얻어오기 위해서 말이다.

 섬 속의 오아시스 수로

 목포항에서 안좌도까지는 시속 2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1시간이 소요되었다. 흔하게 섬 하면 공을 차거나 때리면 바다로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다. 한데 막상 섬에 들어 가보면 안다. 거기에도 삶이, 튼실한 삶이, 해풍보다 더 강인하고, 소금보다 더 절여있는 침향목 같은 삶들이 잉태되고 꾸려 나간다. 1000여 개의 섬들이 있다는 신안 사람들의 섬은 더욱 남다른 곳이었다. 그중 재미난 것은 안좌도는 섬인데도 바다에서 얻어지는 수확보다 비옥한 땅을 경작하여 얻어 들이는 농사 수입이 더 큰 곳이다. 농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토지와 물이다. 물이 귀하다는 섬에서 안좌도 사람들의 지혜를 물을 쉽게 바다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이들은 오아시스와 같은 수로를 가지고 있다. 논과 논 사이에 수로를 두어 필요하면 끌어다 쓰고 넘치는 물은 수로로 흘려 저수한다. 저수지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물도 바로 수로 안에서 대기 중이다. 이 끊임없는 물의 순환 고리는 수로와 저수지가 고갈되지 않으면서 풍성한 수중 생태계를 만든 것이었다. 하니 낚시꾼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섬과 같은 곳 아니었겠나 싶은 것이다. 육지 대부분의 저수지나 강가에는 배스와 블루길이라는 외래종 물고기로 토종 붕어가 자리할 공간이 사라지는데 말이다. 그러니 한번 소나기 입질을 받아본 입장에서 안좌도는 시간만 나면 가야할 낚시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서히 낚시에 눈을 뜨면서 찌는 더욱 정교해지고, 홀로 저수지에서 밤을 밝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 내 몸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할지언정 거기 첫 저수지에 있었다. 어느 해에는 저수지의 제방에서 막 풀을 뜯기 시작한 소가 150미터 정도 되는 제방의 끝자락 풀까지 다 먹어가는 것을 목격한 때도 있었다. 그 섬에 몇 년 출입하며 명색이 관광을 전공한 입장에서 섬의 이런 저런 자원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우스운 일이어서 한번은 낚시의 유혹을 물리치고 길을 나선 적이 있었다.

 

 바람이 보내준 안좌도 답사

 그리고 이번 겨울 낚시를 갔다가 낚싯대를 세우지 못할 정도의 바람이 불어 다시 마을 순방에 나섰다. 마을 지명에 말과 관련된 이름이 많았다. 창마, 마명, 마진 같은 지명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보아도 말목장과 관련한 것은 찾기 어렵다. 마을의 생긴 모양새에서 발원한 지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마을들 사이에 대리 즉, 안창도의 중심이었던 곳을 찾으니 우실이 나타난다. 우실, 비바람이 바로 몰아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한 숲이다. 주로 팽나무와 팽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것이 마을 숲이다. 비금이나 도초도에 들르면 우실이 돌담으로 쌓여져 있는 곳도 있다. 마치 성곽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비해 여기는 나무를 식재하고 잘 관리해서 마을의 경계지점에서 마을을 보호하는 비보 숲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안좌도에 이런 우실은 한운마을, 대척마을, 여흘마을 등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대리마을의 우실은 숲 앞에 남근석을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100미터 앞 농경지에도 남근석을 또 한 기 가지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옛날 중국을 교역하던 선박의 등대 역할을 위해 촛불바위를 만들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수적으로 마을 뒤에 음샘이 있어 마을 아낙들이 바람이 나 동네가 시끄럽게 되자 동네 어른들이 음바위를 쪼개어 두 개의 남근석을 만들어 동네 앞쪽에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 두기의 석물과 함께 우실숲이 마을 당제의 당산으로 현존하고 있다. 대리 마을의 뒤편에는 이제는 폐교가 된 안좌창작스튜디오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수화 김환기가 이곳 안좌도 출신이어서 그의 화업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창작에 몰두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전남문화예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곳이었다. 섬의 거의 모든 이들이 육지로 나간 후 남아있는 분은 대부분 고령화된 어르신뿐이어서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는 것만 아니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친지 오래라고 했던 반월도의 이장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다시 차를 돌려 수화의 흔적이 깃든 생가를 찾는다. 백두산에서 가져와 지었다는 한옥에는 곳곳에 수화의 작품을 복원한 이곳 학생들의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 겨울이라 다소 썰렁하지만 전형적인 남도의 반갓집 형상을 하고 있는 곳에서 한국적 추상화에 몰입함으로서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수화의 정신적 맥이 바로 이곳으로부터 발원했음을 상기해 본다. 또한 저 시야바다의 아름다운 물결과 청정한 하늘과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과 전통미가 서양미술과 융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화단을 놀라게 했던 저력을 되새겨 본다.

 

 고인돌과 성혈

 기왕 나선 길 이제는 방월리로 들어간다. 고인돌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남도지만 이렇듯 섬에서 고인돌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느낀다. 방월마을은 돌이 많은 곳이다. 뒷산의 화강암 안반이 떼어져서 동네 주변에 4곳에 고인돌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방월리 고인돌군이라고 명명한다. 이런 고 인돌군은 마을로 들어서기 전 서부교회 위쪽에 일군의 무리들이 있고, 좀 더 마을로 향하면 서부초등학교 위쪽으로 또 무리지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아래 켠 들판에 다섯 기의 고인돌이 풍찬노숙을 하고 있다. 소나무와 근처의 축사 지붕이 어우러진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마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는 듯 한 착시에 빠져들 정도의 풍경을 이룬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의 공동 우물로 사용하는 곳에는 칠성바위라고 불리는 고인돌군이 있다. 몇 기는 민가의 담을 형성하고 몇 기는 시멘트 콘크리트에 묻혀있지만 과거에는 일곱 개의 큰 지석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그 이름인 것이다. 가장 메인을 이루는 것은 철제 울타리에 둘러져 있다. 한쪽 부분은 흙과 연접해있고 다른 쪽은 두 개의 지주돌이 있다. 비탈이 심하니 지주를 세웠는지 남방식과 바둑판식 사이의 절충된 형식인지 모를 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위 곳곳에 구멍이 패여 있다. 성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바위에 돌로 구멍을 파고 치성을 드린 흔적이다. 순산의 기원이나 자식의 점지나, 풍년의 기원이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안좌도가 사람 살기에 편안했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역사적 유물이다. 이렇듯 안좌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천사다리도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안좌고등학교 뒤편 읍동리 고분군도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기름진 안좌도의 뻘에서 자란 낙지도 먹지 못했다. 더 거친 바람이 불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선창 곳곳의 벽이나 유휴공간에는 수화의 흔적을 잇는 안좌도인의 작품이 들어 있다. 아! 바람이 준 선물 안좌도 답사는 다음번 날 좋은 봄에 또 한 번 다녀와야겠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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