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울진을 향해 떠나다(2)

 사실 울진 소광리의 소나무 숲은 내 기대를 저버렸다. 연거푸 두해 동안 보았던 숲이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 숲이었다. 다른 나무가 자랄 틈을 주지 않고 지들끼리 쑥쑥 솟아올라 하늘 기둥처럼 서 있는 장대한 자작나무의 숲은 마치 대숲과 같은 묶음의 행렬이었다. 그런 숲을 보다가 다른 나무들에게 내어줄 공간 다 내어주면서 자라는 소나무 숲은 낱개로는 대단했지만 묶어지지 않아 신비함도 군집의 위용도 시각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숲은 모든 나무들을 다 안아주고 키워주어야 할 영토인데, 그런 숲이 소나무에게만 무한대의 사랑을 실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종내 아쉬웠다.

 함께하신 선생님께 여쭸다. “참나무 종류가 굉장히 많네요.” “네. 그게 걱정입니다. 종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함께 살아야하는데, 이곳이 1959년부터 좋은 나무를 키워야 할 육종림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81년 ‘소나무 유전자 보존림’으로 지정하여 더 깊은 관 심속에 보호를 받고 있지요. 하지만 자연의 일을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소나무가 비워진 틈 사이에서 낙엽 관목들, 특히나 참나무 종류가 차고 올라 지금의 숲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50:50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참나무를 베어내지 않으면 삽시간에 소나무의 숲이 무너질 것입니다”라는 답변이었다.

 

 귀한 솔숲… 참나무를 제거해야 하나?

 황선하 시인의 ‘불영사 가는 길목의 굴참나무’라는 시가 떠오른다. <신라 진덕여왕 5년에, 의상대사가 구룡사- 지금의 불영사를 창건한 기념으로 심었다는 유서 깊은 나무. 덧없어라, 하늘을 가리던 그 무성했던 푸른 잎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무정스런 세월은 단단했던 껍질마저 몽땅 벗겨내어, 햇빛이 부끄러운 나신. 다시금 청정하게 살아나라. 살아나, 천둥 같은 소리로 무지한 인간을 일갈하라. 살아나지 못할진대, 차라리 활활 타서 형체 없는 재가 되어라. 재가 되어, 허공중에 산산이 흩어져라. 영광과 치욕의 흔적을 아주 지워버려라. 아주 지워버려라> 물경 1300살 먹은 굴참나무가 금강송 숲의 초입 불영사에 있었지만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을 아파한 시인의 마음이 깃든 것이었다. 이와 역으로 금강산 자락에서 시작하여 이곳 울진에 이르기까지 해송과 소나무의 교잡에 의해 형성되어 더욱 단단해진 나무가 이 숲을 지키는 정령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자연의 현상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기에 숲은 자연 천이의 과정을 겪으려는 순간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워낙에 귀한 솔숲이다 보니 참나무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연의 엄연한 순리는 우리가 그곳에 들기만 해도 금방 느낄 수 있다. 담양의 죽녹원에 들어가 보면 빽빽한 대나무 숲을 뚫고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오동나무와 참나무를 만난다. 해를 보아야만 생존할 수 있기에 오동이나 참나무는 제 몸집을 키우는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우선 키부터 쑥쑥 키워 올린다. 대나무 통보다 조금 더 굵은 몸집에도 나무는 굳건하게 대나무와 크기를 겨룬다. 광합성을 향한 치열한 경쟁의 흔적이 거기 있다. 다시 솔숲 사이 길을 걷는다. 솔내음이 진한 것은 그저 솔숲이어서만 아니다.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서 내 강토를 침범하지 말라는 외침으로 들려온다. 계절이 겨울이니 그렇지 9월경이었다면 송이들이 불쑥 지붕을 내밀 법한 그런 곳이다. 한해 송이를 얼마나 채취하냐고 여쭈니 근 100억 원 가까이는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그전까지는 나물이었던 송이가 귀한 대접을 받아 “송이 밭은 시집간 딸에게도 안 가르쳐 준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제는 일부에서도 송이 맛을 볼 수 있지만 외화가 귀하던 시절에는 우리 남도의 키조개와 전복과 순채가 그랬듯이 일본으로 전량 수출되었던 것도 상기된다. 우리가 걸었던 길은 숲길의 2구간과 닿은 임도였다. 이곳은 무슨 무슨 안내 표식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이 또한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이다. 주민과의 합의를 통해 생태를 지키면서 주민도 이로부터 공존하려는 몸짓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때문에 아무 때나 들어가지 못하고, 수많은 인원이 들지 못하고, 내부에서는 함부로 행동하거나 취사 행위도 제한이 되어 있으며, 숲해설가와 동행해서만 들어가는 탐방의 원칙이 있다. 90년대 초반 타이완의 옥산을 갔을 때 10명당 1명의 가이드를 동행해야 하고, 그에게 하루당 10만 원의 안내비를 분할해서 드렸던 기억이 새록하다. 소중한 것일수록 그렇게 귀하고, 아끼면서, 그 가치를 공유하면서 나눠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때문에 소나무 숲에서 시행하는 공정여행과 책임여행이 고맙기만 하다.

 

 ‘소나무의 정부’ 더 깊이 보기

 안도현 시인은 이곳 금강송을 노래했다. 바로 소나무의 정부(政府)라고 한 것이다. 소나무의 정부라는 시비가 있는 곳에서 생각해 본다. 정부가 아니라 소나무의 조국이라는 말을 애써 피했다는 느낌이 온다. 우리 소나무는 안타깝게도 일본인 식물학자인 우에끼 박사가 1928년 분류를 했다. 6개의 지형적 특질을 가진 분류법인데, 해안지대 동북형으로 북한의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에 해당하고, 서남부 저지대와 중남부 평지형은 미인송이라고 불리는 안면도가 대표적이다. 중남부 내륙지역의 고지형은 금강형과 중남부 평지형의 중간형에 속하고, 전북의 위봉형은 완주군의 위봉산 지역으로 전나무 형태로 자라는 특징을 지닌다. 경북 동남부지역의 안강형은 경주와 포항·울산 지역에 있는 것이고, 오늘 내가 선 자리의 금강송은 경북과 강원도 일대에 분포하는 것이다. 품종으로 보면 39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지지난주 여행지 안좌도에서 수화 김환기의 생가를 지은 나무가 백두산에서 온 소나무라고 하듯이 다양한 품종의 소나무가 국가를 받쳐주고 백성의 살림을 돕는 나무로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친김에 황장봉산까지 알아보자. 설악산에는 황장금표가 있다. 모두 같은 말이다. 이것은 궁궐에서 사용할 나무이니 입산하지 말고 벌채도 하지 말라는 표석이다. 왕실에서 사용할 소나무는 크게 강원도와 경상도, 전라 3도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것을 황장목이라고 하는데 황장목은 내재궁과 외재궁으로 분류된다. 내재궁은 궁궐 등을 지을 때 사용하던 것으로 관재라고 하고, 외재궁은 관곽을 짤 때 사용되는 것으로 왕실의 관을 만들 때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고려말 일본 정벌을 위해 변산의 소나무와 천관산의 소나무가 쓰였음은 옛적 배를 만드는 기법이 관을 만드는 기법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황장금표와 황장봉표가 남아있는 곳을 찾아보면 인제의 한계리, 영월의 두산리와 법흥리, 원주시 치악산의 학곡리, 문경시 명전리와 이곳 소광리에 2개해서 도합 7개소가 남아있다.

 

 흔하지만 우리 삶과 궤적 같이하고…

 530살 먹은 소나무를 다시 살펴보았다. 아래에서 가지를 보니 용틀임의 흔적이 강하다. 땅속 바위와 생사를 겨룬 싸움에서 가지가 저리 몸을 비틀었을까 싶기도 하고 자연의 바람이 이 가지를 저렇게 만들었을 성 싶기도 하다. 나무는 자기가 겪은 내환과 외환을 나이테에 간직한다고 한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해의 나이테는 길어지고, 물이 가물었을 때 나이테는 간극이 짧아진다는 말도 있다. 풍찬노숙을 겪은 500살의 나무는 식영정 마루턱의 소나무와 흡사했다. 그 맞은편에는 소나무 전시가 되어 있다. 60여살 먹은 나무에서부터 200여살 먹은 나무의 심재를 만져본다. 단단하기 그지없다. 송곳 하나 들어가기 힘든 지경이다. 이런 나무가 조선을 살렸다. 강토를 먹여 살려왔음이 다시 느껴진다. 한편으로 아까 보고 온 못생긴 500살 먹은 소나무도 되새겨 본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 지킨다” 그런 나무들이 오히려 단단하게 종족을 퍼뜨리고 보존하면서 지상을 수호해왔다. 어릴 적 국토의 70%가 산지라고 들었는데 이제는 63% 정도라고 한다. 숲이 자꾸만 없어지는 것이다. 저 숲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물경 73조 원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용하는 숲에만 천착한다. 심고, 가꾸고, 보존하는 데는 인색하다. 식목일도 이제는 휴일이 아니다. 이만하면 숲이 안정되었다고 보는 것은 착시다. 내가 소나무 초가집에서 태어날 때 아버지는 왼새끼로 꼰 새끼줄인 금줄에 생솔가지를 꽂고, 고추와 숯을 매달고 사내가 태어났으니 잡귀들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솔숲에서 뛰어놀고 나무도 하면서 자랐다. 이제는 죽으면 한줌 재로 가고 싶지만 옛적에는 송판의 관에서 흙으로 돌아갈 터였다. 흔하디흔한 소나무지만 우리의 삶과 궤를 함께한 그 솔숲, 더군다나 소나무의 정부에서 나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힘차게 부르거나 선구자를 부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좀체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200만 년 동안 생명을 유지해온 산양이 놀랄까봐 거둬들였다. 다음에 가야할 숲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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