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꽃과 시를 찾는 변산행

▲ 변산에서 만난 봄의 전령사 바람꽃.

 

 횟수로 세어보니 12년 전이다. 그해 겨울 부안의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시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가 연상되듯 눈이 폭폭내리는 날이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는데, 세상은 한결 고운 자태로 눈이 쌓여 갔다. 더러운 세상을 버리기 좋은 날이었다. 우린 함께 섞여 변산의 백합죽과 젓갈과 우럭을 먹으며 몸을 뎁혔다. 그리고 웃풍이 아주 쎈 민박집에 몸을 뉘였다. 여기서도 백석이 따라 붙었다. ‘흰바람벽이 있어’ 같은 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래 소중한 사람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했다. 그 전 년에 김상윤 선생께서 선물로 주신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古枯孤高’ 란 집안 거실의 화제가 떠오르기도 했다. 1972년 부안의 김철수 선생께서 울릉도에 가셨다가 아득히 높은 절벽 위에 갖은 풍상을 겪고도 의연한 향나무를 보면서 휘호하신 귀한 글을 단지 전고필이라는 이름의 연관성으로 내어 주신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삶이란 외롭고 높고 쓸쓸할 터이지만 자신만의 향은 가져야 할 것이야 뭐 그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소금바람·눈보라 이겨낸 꽃대

 

 다음날 일찌감치 선배들이 찾아왔다. 소복한 눈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파고들었다. 내소사 앞 사하촌 마을의 돌담을 이은 양철대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눈을 치우고 푸른 손을 파르르 떨며 드디어 큰 길 앞에 섰다. 도로는 제설이 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조심스럽게 떠난 곳은 변산의 한 저수지 지나 골짜기라고 했다. 마을 앞에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지나 마을 뒤편까지 걸었다. 산악인의 러셀 수준은 아니었지만 예부터 눈이 많은 고장으로 정읍·고창·영광·변산을 쳐주는 것이라서 목이 깊은 등산화를 신고 걸었다. 이미 햇살을 받은 눈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게다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니 눈 위에 발자국은 온전히 우리 일행의 것이었다. 이규보의 시가 떠올랐다. 친구를 찾아 말을 타고 친구네 집에 당도했는데 벗은 어딘가에 가고 없었다. 해서 채찍으로 눈 위에 글을 썼다. 나 다녀갔다고 이 눈발에 네가 정말 보고 싶어서. 한데 바람이 걱정이었다. 눈 위의 글씨를 지워버릴까봐. 아마도 우정을 시샘하는 무리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한 2킬로쯤 걸어가니 골짜기가 나타나고 가시덤불과 잡목들이 드러누워 원시의 정경을 간직한 듯한 곳이었다. 이런 날씨에 얼어있을 법한 개울물은 도란거리며 봄이 와 있는 듯한 청량한 소리를 들려준다. 그럼에도 이런 눈쌓인 골짜기에서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은 왠지 거짓일 것 같았다. 하지만 우려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지열의 탓인지 아니면 양지녘이어서 인지 놀랍게도 산길과 둔덕에는 듬성 듬성 눈이 녹은 곳이 있었다. 눈이 십여센티를 왔으니 당연히 눈에 덮혀 보이지 않을 법한 꽃, 아니 이런날은 결코 피우지 않아야 할 꽃이 거기 연약한 잎새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변산 바람꽃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생명이었다. 해안의 소금바람을 맞으며 거센 눈보라와 얼어붙은 산하를 녹이며 그 스스로 꽃대를 올려내어 봄의 채널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일순 머리가 띵하고 충격을 받았다. 참으로 예기치 않은 기쁨이 내게 전이 되는 순간이었다. 쪼그리고 보고, 위에서 아래로 보고, 아래에서 위로 보고, 상세하게 보고, 떨어져서 보고, 보고 보기를 반복했다. 10여 송이의 겨울꽃을 보기 위해 왕복 2km 정도의 발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와 변산바람꽃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변산 바람꽃 기행의 추억들

 

 2년전 가을 광주드림 식구들과 대포를 기울이다 필진들이 가진 특징을 가지고 테마를 부여해서 여행으로 독자들을 모셔보자고 했다. ‘광주 갈피갈피’의 조광철 선생은 목포의 근대유산을 찾아가고, 수의사 최종욱 선생은 전주동물원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때 필자는 2월14일 변산바람꽃을 찾아서 가겠다고 했다. 언제 필지 모를 꽃에 모험을 걸었던 것이다. 참으로 간절하게 소망했다. 제발 피어 달라고, 그리고 답사를 떠나기 이틀전 그곳에 다녀왔다. 복사하기 힘든 궁금증과 제 발저림 때문에. 성공이었다. 꽃은 피었고, 그 옆에 노루귀까지 한데 피었으니 눈만 맞추면 초춘의 성찬을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 참여해주신 분들은 한번도 이런 생태여행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지라 이리 저리 당부를 하며 산길을 걸었었다. 그리고 동토의 땅에서 봄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꽃이 변산바람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날 우리는 모항가는 길이라는 시를 지은 안도현 시인과 부안의 생태계를 손금 보듯 환하게 읽는 허철희 선생님도 만났다. 참으로 즐거운 여행으로 기억되었다.

 설을 쇠자 마자 평소 산행을 함께하는 선배들과 가야산을 갔었다. 산록의 험준함 속에서 만난 정견모주는 각별했다. 한 국가의 건국설화를 말하는데 천신과 토신의 만남이 작동하는 기저에 숨겨진 것은 그들의 신비성과 함께 문명의 교류사를 담아내고 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변산에는 개양할미를 모시고 있으니 이번주는 변산으로 가서 개양할미의 바다와 변산바람꽃을 찾아가는 가벼운 트레킹을 하자고 권했다. 해서 4명의 중년들이 일요일 오후 길을 나섰다. 꽃보다 술을 더 좋아하고, 정상 등정이나 완주를 더 좋아하는 분들이 선선히 막둥이의 제안에 응해준 것은 바로 매주 토요일 마다 대인예술시장의 야시장인 별장 행사를 치러야 하는 노고를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고마움을 느끼며 예정대로 일요일 낮 모처에서 지천명을 넘긴 4명의 중년이 뭉쳤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지난 일주일간의 삶이거나 지역 현안이거나 집안의 건강과 안부에 관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 한데 이건 경우가 다르다. 변산이 간직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공유하지 않고 꽃만 본다고 바닷가만 본다고 해서 무슨 의미일까. 결국 전직 가이드로서 입을 뗐다. 변산은 반계 유형원이 우반동에 머물면서 실학의 큰 틀을 형성한 땅입니다. 이에 허균은 그 자신 또한 이곳 변산에 둥지를 만들고자 했지만 공사만 하고 끝내 살지 못했으면서 홍길동을 통해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땅인지를 담아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반계선생의 지혜와 우반동의 삶을 찬양했지요. 매창과 허균과의 애틋함도 이곳 변산의 아름다움이 함께해서였고요. 특히나 매창을 위해 부안의 유림들이 기생인 그녀의 시집을 발간하고 제를 지낸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임까지. 거기에 여덟의 딸과 함께 바다를 관장한 거인 여인 개양할미는 딸들을 8도에 보내고 막내딸과 함께 이곳 칠산바다를 다스리는 여신이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변산이 낳은 아름다운 경관과 노을은 뭍시인들을 이곳으로 불러 들여 시를 짓게 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아 그런데 모두들 심드렁하다. 오로지 꽃 보는 것이 주 목적이었나 보다. 결국 우리 일행은 바람이 세찬 저수지를 지나 12년 전의 그 꽃자리에 갔다. 어제까지 18도까지 오른 기온을 믿었는데 꽃은 4송이가 보였다. 이제 올라오는 중, 약간의 몽우리를 진 것, 바짝 약오른 것, 그리고 핀 듯 아슴찮은 것. 발걸음이 모두 조신해진다. 그리고 몸의 자세들이 이래 저래 바뀐다. 꽃을 바로 보기 위해, 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꽃의 향기를 맡기 위해.

 

 변산은, 시가 펄펄 살아있는 곳



 50대 중반의 사내들이 보여주는 몸짓은 그 자체로는 우스꽝스러웠지만 참으로 고결한 순간이었다. 뭐랄까. 무대도 아닌데 일종의 무언극을 보는 것과 같았다.

 꽃 네송이와 바닥의 노루귀 한촉을 두고 우리는 두시간을 그 골짜기에서 봄을 찬양했다.

 돌아와 석양을 향해 달렸다. 모항의 바닷가에 시인은 없고 몸으로 시를 쓰는 연인들이 있다.

 어느때처럼 해는 홍길동이 살았을 법한 죽도로 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은 서걱이는 모래를 발에 묻히고 차로,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가 모항 모래사장에 이런 글을 썼을 법 하다.

 “정순아 보고자파서 죽껐다씨팔” 대문짝만한 글의 환영이 보인다.

 이 시는 정양 시인의 토막말이라는 시이다. 변산은 언제고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시가 펄펄 살아있는 곳으로 말이다.

전고필 <여행전문기자>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