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에서

길에 있는 사람은 그랬다. 늘 또 다른 길을 꿈꾸는 것. 방랑벽이라고 할까 아니면 선천성 역마살이라 해야 할까. 지난 가야산행과 변산 바람꽃 기행을 하면서 제주도의 봄을 맞이하자고 했다. 제주행의 가장 중심은 눈 덮힌 한라산 산행이었고, 뒤를 이어 제주의 4·3 유적을 찾자고 했다. 본진은 지난 27일 밤에 떠나고 대인예술시장의 야시장 별장을 치러야하는 필자는 28일날 아침 비행기로 들어가기로 했다. 비행기표가 구해지자 숙소와 렌트카 예약을 마쳤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한 선배는 매일 기상예보를 보는 것으로 제주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가장 편리하게 도달할 수 있는 섬이면서도 쉽지 않은 스케줄을 요구하는 것이 제주도이다보니 설렘이 앞섰나 보다. 일정대로라면 28일 도착한 필자와 더불어 제주 동부권의 관광을 하고 29일 한라산 등반 후 서귀포에서 1박 하고 3월1일 서쪽을 돌아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상청은 29일 악천후를 예보했다. 강한 바람과 눈이 온다는 예보를 신뢰하고 한라산행을 하루 앞당겨 다녀오기로 했다. 함께 가지 못한 28일의 한라산은 청명했다. 백설이 있을 법한 2월의 한라산은 며칠전 내린 비로 질척거림의 연속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한라산행을 마친 일행을 성판악에서 마중했다. 커피를 찾는 선배들에게 성판악의 특미는 오미자라며 권했다.
봄이면 가장 먼저 복수초 피는 곳
오미자 한 잔을 하고,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향했다. 그곳은 30여년 째 봄이면 가장 먼저 복수초를 피워 올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차를 멈추고 그 꽃을 탐닉한 것은 작년이 처음이었다. 차 안에서 보기만 했지 차를 멈출 수 없는 커브길로 교통사고가 다발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곳 양지녘에 해마다 꽃은 노랗게 피어났다. 그 옆으로는 노루귀와 괭이눈, 박새같은 꽃들이 피어나면 그야말로 장관인 곳에 조심스레 차를 정차했다. 카메라와 핸드폰을 든 선배들은 복수초의 장관앞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가만이 있는 복수초를 향해 카메라 세례를 날린후 곧장 그 꽃을 전송했다. 아니 육지부에 봄을 격발하고 있었다. 감회를 물었다. 굿이라는 말을 연발한다. 50대 중반의 사내들이 벌이는 꽃기행은 변산에 이어 두 번째에도 감동의 도가니였던 것이다. 사려니숲길에서 교래리로 가는 길섶의 꽃은 언제나 그대로였던 것이다.
이제 꽃 보는 것을 멈추고 4·3 평화기념관에 갔다. 1948년 1월 해방정국의 혼탁한 정국에서 남북으로 분단되는 상황,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국면으로 치닫을 때 제주는 동의하지 않았다. 4·3의 시발은 1947년 3·1절을 맞아 제주도의 좌익진영이 마련한 기념행사에서 관덕정 앞 시위행렬 사이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는 것으로부터 보고 있다. 이 아이를 두고 그냥 지나간 기마경찰에게 군중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제주의 민심은 금세 악화되고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추진하며 좌익에 대한 검거가 시행되고, 가혹한 취조와 구타와 총살이 이뤄졌다. 결국 궁지에 몰린 제주의 좌익진영은 결사항쟁을 결의하고 4월3일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올랐다. 이후 무장봉기는 5·10 단독선거의 거부로 치닫게 되고 미군은 이를 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단독정부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제주에 초토화작전을 시행한다. 그로인해 희생된 사망자 수는 2만5000명에서 3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00여 개의 마을이 소개령으로 사라졌고, 무장대의 보복 살인도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 등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
유채꽃으로도 감출 수 없는 참혹 역사
피에 젖은 제주의 4월은 1957년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리에서 체포되며 막을 내린다. 너무나 참혹한 그 역사 앞에서 우리 일행은 말을 잃었다. 유채꽃 범벅인 곳에서 이뤄지는 살육의 역사, 제노사이드로 인한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이인 1999년 12월 국회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사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11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4·3 특별법에 서명했다. 그리고 2003년 10월15일 사건의 진상을 담은 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으로 사과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은 4·3 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하였던 바다. 기념관을 돌아보는 내내 참담함을 겨우 누르고 제주시내의 숙소로 돌아와 마음을 달래서 제주항으로 향했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 맛 기행을 해야 할 판, 벌써 10여년 단골이 된 속초식당을 찾았다. 제주로 입도한 두 분을 초대했다. 작년까지 조랑말 박물관장이었던 지금종 선배와 광주의 기획사에서 일하다 힐링을 위해 그곳에 간 후배까지. 제주의 삶은 육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두 분이 들려준다. 7년을 살아도 제주사람 다 됐수다인데 그 말은 30년을 산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주사회가 서서히 입도인에 의해 균열되고 있음도 감지된다고 한다. 모처럼만의 고등어회를 먹고 제주의 밤을 보냈다.
제주 허씨 달리다
아침 기상이 늦었다. 가야할 4·3 유적은 많은데 어제 달린 술이 해를 중천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바람까지 심상치 않게 호출해 두었다. 겨우 일어난 셋이 회의를 한다. 어제 4·3평화공원에서 심상하게 보았으니 오늘은 좀 맑고 쾌활한 곳으로 가자는 것으로 결정했다. 결국 우리는 제주 허씨들이 되기로했다. 7만2000원을 주고 빌린 차량이 제 역할을 다해줘야 할 소명을 가진 것이다. 맨 먼저 간 곳은 해장국집이었다. 구제주의 은희네, 번호표를 받아 해장을 했다. 대인시장에도 이런 송곳 같은 맛집이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동쪽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월정리 해안이었다. 육지에서 지친 심신들, 더 이상 경쟁의 사다리를 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촌락을 이룬 곳, 바다가 포말로 부셔지며 끊임없이 맥주 거품을 생산하는 그곳의 바다를 보았다. 바람에는 소금과 모래가 섞을 정도였지만 산소는 달디 달았다.
두 번째는 성산 일출봉을 향했다. 파도가 거세서 해녀들의 숨비소리 대신에 해녀 할머니들의 홍삼을 먹었다. 한접시에 3만 원했다. 한라산 올레 소주가 한순배 돌 참에 육지로부터 각자 전화가 왔다. 하긴 나는 노트북까지 가져왔으니 할말 없지만 술맛이 다 달아났을 것 같았다. 삶으로부터 도피를 꿈꾸지만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30여년전부터 삐삐가 있었고, 휴대폰이 등장했으며, 손과 발은 그로부터 도망치지 못했다. 늘 감금된 일상. 하지만 여기 제주라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반문도 해 보며 애써 자위했다.
일인당 1000원하는 사설 유채밭에 들어갔다. 제주의 유채가 본격적으로 심어진 것이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아는 이 별로 없지만 어느 사이 제주는 유채의 섬이었다. 조춘의 유채를 즐기고 다시 우리는 제주의 바람을 온 몸에 각인한 사나이 고 김영갑 선생을 만나러 갔다. 바람을 타고 눈발이 거세진다. 그가 손수 옮겼다는 돌 사이로 수선화꽃 노랗게 눈과 마주한다. 4만여컷의 제주, 밥은 굶어도 필림을 샀던 그만의 제주가 눈에 밟힌다. 겹꽃의 홍매화에도 눈이 내린다. 향내가 진하다. 두모악을 뒤로하고 오름으로 간다. 그 사내가 가장 잘 새겼던 용눈이 오름. 바람이 두발로 정상부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름 한바퀴 도는 꿈은 깨졌다. 뒤를 이어 다랑쉬 오름을 가자는 계획도 파기되었다.
주마간산 여행 종지부는 속초식당
차를 몰아 휴애리의 매화축제를 찾아간다. 사람은 없고 매화만 만화방창이었다. 그 꽃대궐에서 접사 사진의 기술을 배우려는 두 선배는 물경 삼십분을 카메라와 씨름하고 나는 그 향내에 취해 몇 개의 꽃잎을 따와 매화차를 즐기려던 계획도 망각했다. 화순이라 불러야 될지 안덕이라 해야할지 어중간한 곳에 마지막 제주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흑돼지 타령을 하는 선배의 시위에 저녁식사는 마을 식당의 흑돼지 구이로 마감하고 몇순배의 술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곧장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제주 여정의 마지막 아침. 깨우지 않아도 모두들 잘 일어났다. 차를 달려 1만5000원 하는 별볼일 없는 성게미역국을 먹고 송악산에 가서 마라도와 가파도를 실컷 보았다. 두 섬 모두 일박을 해봤던 터지만 두 선배에게는 가고 싶은 섬속의 섬으로 남겨 두었다. 제주의 화산 지질이 가장 잘 보이는 수월봉으로 향했다. 수월봉의 지질공원을 보며 화산의 분출과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맞은편의 차귀도와 어우러지는 경관미에 넋을 놓았다. 포장마차를 차리고 한치와 오징어를 파는 할머니들이 즐비한 곳에서 한치 세축을 사고 한축씩 나눴다. 벌써 시간을 정오를 가르키려 하는데 날이 맑으니 욕심이 났다. 또 달려 협재해수욕장 5분의 시간을 주었다. 고려 목종 10년인 1007년 제주의 마지막 화산분출로 생겨난 섬 비양도가 산호를 담은 무지개빛 해수와 어우러진 광경으로 우리의 어지러진 눈을 씻어내고 제주로 향했다. 주마간산 같은 여행의 종지부는 다시 속초식당이었다. 고등어회와 찌개를 먹으며 언제 다시 올것인지 계획하려다 수포로 돌아갔다. 3일간의 제주 허씨 생활은 KE1906이 개운한 이륙으로 소실하고 오늘 이 글에만 잔뜩 남게 되었다.
전고필 <여행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