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면 즐겁고 눈 감으면 황홀하고

있어 보이려는 허세 어린 치장은 없다. 다만 정성껏 솜씨를 발휘했을 뿐. 유리창에 손으로 그리고 오려붙인 글씨와 그림들은 서투른 듯 귀염성 넘친다. 그 중 압권은 `모름지기 남자 머리라면∼’이라고 무언으로 호객하는 나름 멋쟁이 남자 그림.
과거의 시간에 멈춰선 듯한 풍모이지만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이 말한다. `지금 영업중이라고 전해라∼’.
“집에서 이발관을 한게 시다 노릇을 했어”
들어서면 낡은 이발의자가 한가운데서 육중하게 존재감을 발하고 있고, 구석에는 물뿌리개 놓인 세면대가 있다. 요금표에 적힌 `조발 12000원’이란 표기(`이발’이 아니고)도 이곳에 고색창연함을 더한다.
나이든 집기와 살림들이 한데 집합한 이곳. 구석구석 칸칸이 그가 수납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 같다.
“오는 사람들도 다 오래 됐어”라고 말하는 이발사 류현열(71)씨.
`오래’는 단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이이기도 하다.
고향이 부안 줄포인 그는 한동안 서울 생활을 하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주욱 이발관을 꾸려 왔다.
어렸을 적 그의 집은 “동네에서 두 번째로 부자”였더란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온식구 이끌고 서울로 이사한 아버지가 새로이 벌였던 일이 바로 이발관. 시대를 반영하듯 상호는 `협동’이었다. 아버지한테 이발기술이 있었던 건 아니라 이발사랑 미용사를 따로 고용해서였다.
“집이 이발관인게 학교 갔다오문 자연히 이발을 돕게 돼. 이발관 바로 옆에가 논이 있고, 논 가운데가 바가지샘이 있었어. 거그서 물을 길어다 써. 학교 갔다 오문 물 길어오는 것이 내 담당이었지. 쉽게 말해 시다 노릇을 했어.”
늘 어깨 너머로 지켜보던 이발이었지만 직업으로서의 이발사는 그의 관심밖이었다.
“근디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치료하느라 돈을 다 쏟아붓고 나니 가세가 기울어 불었어.”
중학교는 겨우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망하다시피 식구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서울에 남아 홀로 제 몫의 삶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때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지.”
부안 지역 여러 동네를 전전하며 이발소를 하다 이 자리에 정착한 것은 19년 전 쯤이다. `등대’는 1993년 읍내에서 이발소 할 때부터 써온 상호. “누구에게든 빛을 드리는 존재가 되고픈 맘으로” 내건 이름이다.
이발관 집주인은 `등대이발관’ 옆에서 `남산슈퍼’를 하는 김용원(72)씨. 형제처럼 식구처럼 날마다 얼굴 보고 사는 그이가 오늘은 이발 손님으로 건너왔다.
“집주인이신게 내가 잘해야 혀.”
“먼 소리여. 내가 잘 해야지. 이발 한번씩 할라문 잘 깎아도라고 해야지.”
서로 `갑’이 아니라 `을’이라고 주장한다.
처음 이곳에 세들 때 그대로, 월세를 십수 년째 동결한 집주인이다.
“내가 (세를) 많이 받아불문 요 사람은 헛장사하게.”
김용원씨는 “옛날 그 식인 집이여. 요새 이런 집 없어, 없어”라고 이 오래된 이발관을 향한 애정을 드러낸다.
“이 양반이 이발도 아조 잘 하지만 정이 짠뜩 붙어서도 나는 통 딴 디를 못가, 안 가. 여그서 안하문 못쓰겄다, 딱 그 생각이여.” 결론은 “우리는 상부상조 하는 사이여.”
사람이 귀한 시골이다.
“사람이 없어, 통 죽어불고 이사가 불고. 시골이다본게 해마다 줄어들어.”
이발사인 류현열씨한테 줄어드는 사람이란 줄어드는 손님과도 동의어. “늘 돌아가셔”라는 담담한 말에 고적함이 깔린다.
“새 손님이 일 년에 다섯 분 늘어났다 하문 돌아가신 분은 열 분 이상이여.”
“옛날에는 앞면도만 하는 분들이 많앴어”
사각사각, 차각차각, 머리를 깎는 소리가 이발관을 채운다.
김용원씨의 눈이 어느새 스르르 감겼다.
“남자들은 이발관에 오문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이 돼. 머리를 만지문 슬슬 잠이 오는 거지. 대개 다 꾸벅꾸벅 졸아.”
이발이나 면도를 하는 동안 살풋 빠져드는 그 잠은 얕지만은 않아서 어깨를 툭툭 쳐야 일어나지는 단잠이기도 하다.
“멀뚱히 눈 뜨고 있으문 미안한 감이 있지. 괜히 잘 한가 못 한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게 암만해도 이발사가 부담시롭지 않겄어. 근게 졸기도 하고 그냥 눈감고 생각도 히봐감서 있는 거여. 어떻게 하문 밥묵고 살까 그런 생각도 하고.”
“눈감고 옛날 애인 생각 한갑만.”
“그러제. 그런 생각도 히보고, 허허.”
손님맞이 드문 이발소 바닥에 머리칼이 쌓인다. 그 역시 훈기가 어리는 풍경.
뒷꼭지의 잔머리는 칼로 손질한다.
“암만해도 칼로 마무리 해야 섬세하고 개안한 맛이 있지.”
이제 면도를 할 차례다.
“믿고 맽기요. 요 양반이 기술잔디 상처나게 하리라고.”
따뜻한 물에 헹구어 짠 김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덮는다.
“아조 춘 겨울날 요 뜨뜻한 수건을 얼굴에 대문 그 행복감이 있지. 피부가 따뜻해져서 털구멍이 열리문 면도할 때 안 아프고 잘 밀려. 겨울에 얼굴이 얼어갖고 있는디 막 밀어불문 털구멍에서 피가 나지.”
풀썩풀썩 비누거품 일으킨 붓솔을 물 끓는 뜨끈한 찜통 표면에 스윽슥 둥글게 문지르는 살뜰한 서비스도 추가.
“차가운 거품이 살에 닿으문 선뜩하지. 근게 옛날에는 꼭 난로 연통에다 한번 문댄 다음에 면도를 했잖애. 거품이 따뜻하문 살에 닿을 때 면도도 스르르 더 잘 되야.”
얼굴에 비누거품을 칠하고, 10년 넘게 써오고 있는 면도칼을 꺼내 가죽에 썩썩 문질러 날을 고른다. 헌 가죽잠바 쪼가리를 활용한 피대. 나무토막에 씌워서 야물게 단속했다.
“옛날에는 일회용 면도기도 없었어. 일회용 칼은 있어도 집에서 면도 한번 할라문 번거로와.”
이발 후 목덜미 뒤쪽을 정리하는 뒷면도와 구별해, 얼굴의 수염과 잔털을 정리하는 것을 이르는 이름이 `앞면도’.
“옛날에는 앞면도만 하러 오는 분들도 많앴어. 지금은 그럴라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지. 옛날에 멋부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쩨쟁이라 그래. 쩨를 낸다고. 쩨쟁이들은 다 앞면도를 했어. 매일같이 와서 앞면도 하고 머리도 감고.”
앞면도 값은 이발 요금의 반절 이상이었다.
“옛날에는 앞면도 하는 거나 머리 감는 것은 사치 축에 들었응게 값이 좀 비쌌어.”
집도하듯, 의식을 치르듯, 내내 진중한 손길이 이어지는 면도. 네모 반듯하게 자른 신문지조각도 동원된다. 거품과 함께 면도기에 밀려난 털을 처리하는 용도.
“신문지가 젤로 편혀. 화장지는 물 묵으문 금방 쳐져불어. 여름에는 요 조각을 좀더 크게 잘라. 에어콘 바람에 날린게.”
이발에서 면도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극진한 정성으로 채워지는 1시간이다. 이윽고 거울 속에 말끔한 얼굴 떠오른다.
“요금은 만이천원이 협정요금인디 우리집은 그냥 만원만 받아.” 벽에 걸린 `요금표’를 볼짝시면 성인은 1만2천원, 중고생은 6천원.
“근디 중고생 손님은 한 명도 없어. 촌에 어린 사람들이 있가니. 옛날에는 애기 데꼬 와서 엄마가 얼르고 달래고 한바탕 난리를 침서 이발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디, 요새는 그럴 애기도 없지만 행이나 있더라도 다 미장원 가는 시상이여. 이발소 찾는 인구는 50대부터여. 50대, 60대도 미장원 가는 사람도 많애.”
의자 팔걸이 위에 걸쳐 어린 아이들의 키를 돋우던 나무판.
여전히 한피짝에 간수해 두었지만 쓸 일이 없다.
이발을 마친 김용원씨가 머리를 감고 있는 새 미닫이문이 열린다. 또다른 단골 나봉석(62)씨다.
“형님, 혹시 드라이기 쓰다가 못씨게 된 거 있소? 소집(소축사)에 수도 같은 것이 언 데가 있어서 좀 녹여 볼라고.”
용건은 이발이 아니었다.
“이발 할 일 없어도 하루이틀에 한번은 꼭 들르게 되는 곳”이란다.
“무단히 누구 있는가 딜여다볼라고도 문 열어보고.”
그냥 지나치기 서운한 동네사랑방인 것이다.
고무풍선에 대고 면도 연습하던 시절도
거울 위에 걸린 이용사 면허증에 박힌 연도는 1973년. 어엿한 이발사가 되기까지 수련과 인내의 시간 길었다. 가위와 면도칼은 로망이었다.
“오 년이 되아도 칼도 안 줘. 머리카락 쓸고 머리 깜겨주는 일만 해. 근게 고무풍선에 바람 넣어서 비누칠을 해갖고 칼로 슥슥 밀어봄서 면도 연습을 했어. 실실 조심해서 밀어도 까딱 잘못하문 풍선이 터져불어. 그러문 살을 빈 거나 마찬가지여. 실패지. 대고 연습할 사람이 없응게 연구해서 고무풍선을 생각해 냈지. 풍선 수없이 많이 터쳤어.”
면도할 줄 안다고 눙쳐서 취직했다간 쫓겨난 적도 있다.
“흑석동에 있는 이발소에 갔는디 종업원이 일곱 명 있더만. 면도를 할 줄 안다고 했어. 그러문 머리는 안 깜긴게. 고무풍선만 하다가 갔는디 면도 실력이 제대로 됐겄어. 면도가 쉬운 일이 아녀. 한번은 엄한 생각하다 한쪽을 많이 밀어불어 갖고 다른 한쪽을 똑같이 맞출란게 잘 안돼. 코메디 하던 서영춘이 콧수염같이 돼 불었어. 그래갖고 냅다 도망쳤다가 한참만에 돌아간 적도 있지.”
가위 들고 이발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던 시절. “면도하는 사람은 `중함빠’, 고데나 드라이 하는 사람은 `함빠’라 했어. 큰 이발관 같으문 머리 감기는 세발사도 있고 손톱 깎는 아가씨도 따로 있고 한 일곱 명씩 정도는 일했지.”
아이 아닌 어른 이발을 드디어 처음 하던 때의 긴장감이나 설렘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렇듯 어렵사리 도달한 이발사의 길. 도중에 호떡장사도 해보고 미장 일도 해보고 그랬지만, 천직은 이발사였다.
“뭐이든 하다 안 되문 다시 이발로 돌아오고, 돌아오고. 이발이 내 인생의 비빌 언덕이었어.”
아내 임귀례(64)씨와는 연애결혼을 했다.
“그때가 서울 살때여. 밤에 효창공원에 놀러갔는디 여자 세 분이 걸어가고 있어. 그 중에 키가 제일 크드라구. 백구두에다가 하얀 원피스를 채려입고. 나도 그때는 멋쟁이였지. 뒷굽 올라온 캉캉구두 신고 바지는 세탁소에 맡겨 칼날같이 다려 입고 옆머리는 포마드 딱 발라 귀 뒤로 붙이고 와이샤츠에 수건도 꽂고. 내가 용기가 좋아. 말을 걸어갖고 `내가 몰르문 그대에게 배우고 그대가 몰르문 가르쳐드리고, 우리 사귀어보자’고 했지. 글고 내가 맘에 들문 다음날 밤 9시에 효창공원 벤치에서 만나자’고 했어. 다음날 밤 9시에 나가본께 벤치에 딱 나와 있어. 그래갖고 이뤄졌지.”
스물다섯에 결혼해 아들 3형제를 낳고 키우며 함께 한세상을 헤쳐왔다. “집에 가문 별 인기는 없지, 돈을 못 버니깐, 허허.”
“수족이 안 떠니까 평생 할 거여”
예전엔 명절이면 대기 번호표를 나눠줘야 할 만큼 북적거리던 이발소.
“옛날에는 명절의 맛이 있었지. 기다리는 손님들이 술도 묵고 윷도 놀고. 아무리 번호를 불러도 안 오는 손님은 술 묵고 취해서 어디 둔눠버린 경우고. 옛날에는 여중고생 상고머리도 이발소에서 깎았어. 동네서 애사 말고 경사, 근게 결혼식이나 돌잔치라도 가고 그러문 손님 많았지. 봄에 한창 꽃필 때 단체로 놀러갈 때도 그랬고.”
이제는 손님 한 명도 없는 날이 예사다.
“요참 월화수요일 쭈욱 한 명도 없었어. 겨울에 눈 오고 출때는 안와. 제로여.”
그래도 네 평 남짓한 이 이발소는 여전히 그의 삶의 척추 같은 공간.
“손님이 이발하고 난 다음에 거울 쳐다보고 뺑긋이 웃고 가는 그 모습을 보면 희열을 느끼지.”
그래서 벽 한피짝에 `눈 뜨면 즐겁고 눈 감으면 황홀하고’라고 써두셨는가. 이발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까지 누리는 궁극의 즐거움이 그 말에 다 함축돼 있다.
술담배는 멀리했다. 가위나 칼 잡은 손끝이 떨리면 이발사로서 끝이기 때문.
“앞으로도 계속 해야지. 수족이 안 떠니까 평생 할 거여. 내가 문 닫으문 요 근동 사람들은 더 멀리로 이발소 찾아가야혀. 근게도 해야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마음이다.
<…새벽녘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눈은 폴폴 날리고, 손님은 오지 않고, 고요한 이발관을 채우는 것은 그의 흥얼거림. `안동역에서’란 애창곡이다. 그의 마음도 안타까이 녹고 있는가.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