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문제 대부분 해소 가능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영화처럼 인류의 대부분은 사라져 버렸고, 몇몇은 살아남았는데 당신은 살아남은 자인가 아닌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늘 (농촌지역의 유일한)생존자였다. 영화 속 살아남은 주인공들처럼 인류 재건이라는 사명감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고, 언제 어떤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지를 떠올리고, 할 수 있는 요리목록을 만들고,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생필품은 무엇이 있는지를 헤아리다 잠이 들기도 했다. 다 죽어도 왠지 나는 살아남을 것 같은 특별한 존재였다.
사람들 중엔 자신이 남과 다르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다. 남보다 더 똑똑하고, 더 능력이 있으며, 더 돈이 많고, 더 예쁘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란다. 늘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혹은 나은’ 조건이 자신에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누구에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이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이들은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지각을 갖는다. 예를 들면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하고 근거가 없으면서도 우월한 존재로 인정되기를 바란다. 무한한 성공과 권력, 탁월함과 아름다움 또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집착한다. 또한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라고 믿으며 특별하고 상류층의 사람들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자신은 그런 사람들하고만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다. 더불어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더욱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이유나 조건이 안 되는데도 그런 대우나 복종을 원하는 불합리한 기대감이 있다. 게다가 타인이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자신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질투하는 경향이 크다. 거만하고 오만한 행동과 태도가 나타난다. 열거했던 내용 중 5개 이상의 항목에 해당한다면 대인관계에서 큰 문제를 경험하고, 정신과적 진단을 받을 수도 있다.
장애 진단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던 때 나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었음을 간증한다. 동기가 먼저 논문을 써서 졸업했을 때 마음속에서는 ‘저런 것을 누가 못해, 시간만 있었으면 더 잘 썼을텐데’, 누군가가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더 예쁜데 수준이 낮기는’, 누군가가 나를 무시한다고 여겨지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내 말 한마디면 너는’, 나이 어린 이가 상사로 오면 ‘운이 좋은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진심으로 누군가의 성공이나 성취를 축하해 주지 못했고, 그들의 다양한 면모를 놓치게 되고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나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너무 커 늘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웠고 자신감이 점점 없어졌다.
‘인류가 멸망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은 하지 않는다. 인류가 멸망할 때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를 바란다. 생존자로 고군분투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는 길을 가는 것이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 속에 포함된 자연스러운 나, 그러니 특별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지 않아도 되고, 거짓이나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닌 줄 알면 괴로운 문제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린다. 자신에게 ‘특별한’ 글쓰기 재주가 없음을 알면,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글이 나오지 않아도 ‘나름’ 만족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대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높은 평가와 애정은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누누이 강조했건만….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 ‘특별’하다. 다만 모두가 ‘특별’하니 공평하게도 모두가 ‘똑같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듯. 그러니 모두가 존중받고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실수해도 되고 잘 하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다 그런 존재다.
조현미 <심리상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