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에 대한 강박

▲ 영화 ‘아가씨’.

 박찬욱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의 이름이다. 그는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낸 이후, ‘복수삼부작’을 탄생시켰으며, ‘올드보이’와 ‘박쥐’가 칸에서 인정받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아가씨’의 칸 입성은 자연스런 귀결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가씨’는 감독의 이름값에 비해 실망스런 영화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아가씨’는, 영국의 사라 워터스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써낸 소설인 ‘핑거스미스’를,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옮겨와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영화다. 한데 문제는,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와 그녀의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 그리고 그에게 고용된 소녀의 이야기를 이식시키기 위해 끌어온 ‘일제강점기’에 대한 묘사와 해석이 어색하다 못해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살고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이 조선 땅에 발 딛고 있는 인물들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착취가 극에 달했던 내선일체(內鮮一體)시기를 영화의 배경으로 선택했다면, 자연스레 영화 속 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시대를 드러낼 법도 하건만, 이 영화는 이에 대해서 일절 언급을 삼간다. 조선인인데 일본인의 정체성으로 살고자 하는 인물인 코우즈키(조진웅)의 심사가 드러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신분제가 철폐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분상승을 하고자 하는 백작(하정우)의 내면 역시 알 길이 없다.

 주요 이야기가 펼쳐지는 대저택도 시대와 무관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공간은 서양 도서관의 모습과 일본 다다미방 양식이 혼재되어 있고, 유럽 귀족의 생활양식이 녹아있는 실내장식과 한국 전통 가옥의 모습까지 하나의 저택에서 한국식과 일본식 그리고 영국식을 모두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식민지조선에 존재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무국적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 공간을 활보하는 인물들의 일상 역시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장면은 신사들이 성적 판타지를 즐기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저택의 서재에서 히데코(김민희)가 반금련전의 선정적인 대목과 사드가 저술한 소설 속의 변태적인 장면을 읽을 때, 수트를 차려입은 신사들이 앉아 경청한다는 설정은 일제강점기의 상황치고는 상상력이 과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여기에다 두 여성인물을 동성애자로 접근하고 있는 대목 역시 일제강점기의 성 의식 치고는 뜬금없다. 인간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환경과 체제를 뛰어넘어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시공간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이 동성애자임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욕망을 인정하는 인물을 이 영화는 상상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영화가 일제강점기에 금기를 깨는 인물을 드러내고 있다기보다는, 소재주의로서의 동성애를 차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여기에다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방식 또한 감독의 자기 복제에 머무른다. 총 3부로 나뉘어 전개되는 이야기는 1부와 2부의 시점의 주인공을 달리하고 있고, 3부는 전지적 시점을 취하며 극적인 효과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이는 ‘공동경비구역 JSA’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의 시점에 변화를 주어 효과를 극대화시킨 적이 있는 감독의 안일한 반복이라는 점에서 신선도가 떨어진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흥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는 영화다. 무국적 공간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과도한 미장센과 시대의 공기를 고려하지 않고 동성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결국 ‘아가씨’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로서 관객들에게 소비될지는 모르지만, 진지하게 인간과 시대를 탐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조대영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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