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만만치 않은 사유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가 ‘박카스 할머니’인 소영(윤여정)의 일상과 매춘하는 장면들에 집중하고 있다면, 후반부는 소영이 살아있는 것이 더 괴로운 노인들의 죽음을 돕는 장면에 할애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제목인 ‘죽여주는 여자’가 중의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소영은 자신의 성(性)을 사는 노인들에게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생을 지탱할 만한 상황이 아닌 노인들을 ‘죽여주는’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영은 노인들에게 에로스(성충동)와 타나토스(죽음충동), 즉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인 것이다. 이쯤 되면 소영은, 픽션의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소영의 노인들의 죽음을 돕는 행위가 범죄의 차원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영화는 소영이라는 인물의 결코 만만치 않은 개인사를 제시하고 있고, 소영의 일상을 연출하는 것에도 공을 들인다.
소영은 한국현대사의 아픔이 응축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전 태어나 고아가 됐고, 식모살이를 하다가 ‘양공주’로 살았으며, 그곳에서 만난 미군과 동거해 아이를 낳았으나 입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거를 갖고 있는 소영은, 현재는 ‘박카스 할머니’로 살고는 있지만 소외된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부에 코피노(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소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것도 그렇고, 장애인 청년과 트랜스젠더 여성 등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이들과 정을 나누고 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소영이 까칠하긴 하지만 따뜻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독은 소영이라는 인물의 인간됨됨이와 그녀가 헐벗은 몸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살아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인물의 형상화에 공을 들인 결과 소영의 행동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곧 죽여주기를 원하는 노인들의 죽음을 돕는 소영의 행위가 일정 정도의 설득력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재용 감독이 이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고령화 시대에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논쟁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재용 감독은 ‘중풍’과 ‘치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이유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은 노인들을 죽이는 여자를 상상해 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사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세 명의 노인과 같은 처지에 스스로가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으며, 소영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이 아닌 사회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백세시대가 도래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률 1위, 자살률 1위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대한민국은 도래해 있는 것이다.
‘죽여주는 여자’는 사는 것 이상으로 잘 죽는 것도 중요한 문제임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에 시의적절한 영화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조대영 <영화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