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의 봄-01] 항일의 섬 태극기의 섬
감옥에 갇힌 이들을 생각하며 섬 주민들은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섬 주민들이 투옥된 기간을 한데 합하면 300년에 달했다.
섬 주민 6000명 중에서 무려 800명이 ‘불령선인(不逞鮮人)’, 요샛말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요시찰인물이었다. ‘불온한 조선사람’들이 서늘한 결기와 뜨거운 연대로 시대의 암흑을 밝힌 섬.
“도명(島名)은 소안(所安)이나 민불안(民不安)이요 산명은(山名)은 가학(駕鶴)이나 학불래(鶴不來)라.”
편안한 곳(所安)이라는 이름을 지닌 소안도는 일제강점기에 편안하지 않았다. 순응과 굴종이 아닌 저항과 투쟁의 길을 택했다. 나라를 빼앗겼으나 이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얼이 흐르는 섬, 소안에 간다.
일제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 타올라
섬으로 향하는 배 이름도 ‘대한’ ‘민국’ ‘만세’호. 완도 화흥포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이면 닿는다. 당사도·구도·횡간도도 소안면에 속하며, 노화도·보길도·청산도 같은 섬들이 이웃 섬이다. 선착장에 내리면 소안배달청년회가 세운 ‘抗日의 땅 解放의 섬 소안도’라고 새긴 빗돌이 먼저 맞는다.
‘항일의 땅’을 상징하듯 눈길 닿는 곳마다 태극기 휘날린다. 하루도 깃발 내리는 날 없는 ‘태극기 섬’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꿈꾸며 항일에 투신했던 이들이 항시 가슴속에 간절하게 품었을 태극기. 그 뜨거운 마음을 기억하고 잇고자 2012년 북암리를 시작으로 1년에 걸쳐 섬의 온 마을 집집이 태극기 게양을 마치고, 2013년엔 ‘소안도 나라사랑 365일 태극기 섬 선포식’을 열었다. 태극기를 아무 날 아무때나 게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완도군은 소안도에서 365일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했다.
여름이면 무궁화 섬이기도 하다. 무궁화동산이며 무궁화길에 무궁하게 꽃 피어난다. 그 중에서도 월항리는 귀한 노란무궁화 ‘황근’(멸종위기종 2급)의 자생지로 이름났다.
소안도는 장구 모양으로 생겼다. 본디 두 개의 섬이었는데, 파도가 실어온 모래가 쌓이면서 하나로 이어졌다. 섬의 허리에 해당하는 잘록한 곳 가학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사립소안학교가 있던 자리다. 기념관 옆에는 사립소안학교 교사가 복원돼 평생학습원과 작은도서관으로 꾸려지고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도 우뚝하다. 소안도 해변에서 흔히 만나는 몽돌들이 소안도 돌담처럼 층층이 잇대진 형상. 돌멩이 하나하나가 역사의 파도를 굳세게 헤쳐온, 바람 앞에 함께 어깨를 겯었던 소안 사람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함경북도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국내 항일운동의 3대 성지였던 소안도. 소안의 항일운동엔 주민들 대부분이 동참했다. 항일운동기념관에서 그 험난하고도 아름다운 역사의 갈피갈피를 만날 수 있다. 항일정신을 심었던 사립소안학교 관련 자료들을 비롯, 1920~1930년대 신문 지면 속 소안도 관련기사들, 독립운동가의 형사판결 원본 등 당시의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뿌리 깊은 저항의 역사, 자지도 등대 습격사건
저항의 역사는 뿌리 깊다. 구한말에 왜인들이 소안도 맹선리 일대 해안짝지를 한해출어(韓海出漁) 출가어업의 근거지로 무단점거해 우리 어장을 침탈했다. 이에 맞서 소안도 주민들은 1886년(고종3년)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 가옥들을 불태워버렸다. 국토를 불법으로 유린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삶의 터전인 어장을 지키려는 의거였다.
1909년엔 이른바 ‘자지도(당사도) 왜인 등대 습격사건’이 있었다.
기념관 안에 등대 습격사건을 형상화한 디오라마가 있다. 까마득한 절벽이었을 게다. 시대의 어둠을 기어오르던 긴장과 절박함이 전해진다.
1909년 1월, 일제는 남해를 지나는 자국 군함과 상선의 안전항해를 위해 자지도에 등대를 세우고 일본인 등대수들을 배치했다. 소안에 딸린 작은 섬 자지도(者只島)의 이전 이름은 항문도(港門島)였다. 조선시대 육지로 드는 관문 구실을 해서 붙은 이름. 등대가 이 섬에 세워졌던 연유를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등대가 불을 밝힌 지 두 달이 채 안된 2월24일, 소안도 비자리 출신이자 동학군으로 활동했던 이준화 등 6명은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 4명을 처단하고 등대 기기를 부숴버렸다. 침략과 수탈의 상징인 등대 습격을 통해 제국주의의 야욕을 응징한 것이다.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한 싸움도 이어졌다. 항일운동기념관 옆에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승리기념비’가 있다.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사립소안학교가 세워진 전사(前史)에는 이 ‘토지계쟁(係爭)투쟁’이 있었다.
소안도는 조선시대 왕실 관할의 궁납전에 속했는데 일제가 조선 강점후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왕실 회유책의 하나로 사도세자 5세손인 이기용(일제가 자작 칭호를 내린 친일파)에게 소안도 땅 소유권을 넘겨버렸다. 주민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1909년부터 일본과 조선 왕실을 상대로 무려 13년간 끈질기게 싸웠다. 마침내 법정투쟁에서 승소했고 덕분에 항일운동의 물적 토대도 마련됐다.
무엇으로 이 승리를 값지게 기념할 것인가. 그 답으로, 주민들은 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1만454원을 모았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70원이었다니, 거금이다. 강습소 수준이었던 기존의 중화학원을 개편해 정식학교로 승격시킨 사립소안학교엔 “배움만이 살길이자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 사람들의 뜨거운 의지가 깃들었다.
‘사립’이란 말 속에 담긴 것은 민(民)이 주체라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1923년 5월16일 개교한 이 학교는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심는 본거지가 됐다.
항일운동의 본거지 사립소안학교
초대교장으로는 중화학원 설립자 김사홍(1883∼1945)이 취임하고 교사로는 김경천, 강정태, 신동희, 송기호, 최형천, 백태윤, 김병섭 등 소안 사람들이 참여했다. 남도 외딴섬에 조선인 최초의 사립학교가 들어서자 교육운동에 뜻을 둔 우국지사들도 전국 곳곳에서 속속 몰려들었다. 학생 수도 270명에 육박했다. 인근의 노화, 청산, 해남 심지어 제주에서도 유학생들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사립소안학교의 봄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항일애국사상을 심고 언어평등, 남녀평등의 근대적 실천교육을 했던 소안학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1927년 5월10일자로 학교를 강제폐쇄했다. 교내에 일장기를 게양하지 않고, 일본 국경일에도 휴무하지 않으며, 일본 국상(國喪)에도 상장(喪章)을 달지 않는다는 것. 일제가 내세운 강제폐쇄의 이유는 사립소안학교의 정체성을 뚜렷이 증거한다.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대운동을 펴고 국내외 운동단체와 언론이 나서 거들었지만 끝내 복교는 되지 않았다. 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도 소안 사람들은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를 거부하고, 각 마을에 야학이나 서당을 세워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서울에서의 기자생활을 과감히 접고 홀로 이 먼데 섬까지 와서 소안학교에서 민족자강교육을 폈던 이시완 선생은 섬을 떠나기 전날 밤, ‘이별가’를 작사작곡해 남겼다.
<떠난다 떠나간다 나는 가노라/ 세월의 꽃동무를 남겨두고서/ 쌍죽에 맺은 마음 굳고 깊건만/ 내 분을 못이겨서 나는 가노라/ 만남도 뜻 있으니 믿음도 큰데/ 마음 속에 맺은 정을 풀기도 전에/ 이별로 애를 끊는 이 웬일인가/ 눈물이 앞을 가려 말 못하겠네…>
노래의 마지막 당부는 <아무리 악풍폭우 심할지라도/ 임향한 일편단심 변치 마시오>. 눈물이 다짐으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소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별가’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사립소안학교와 사회단체, 각 마을의 야학에서는 노래로 항일의지를 다졌다. 때문에 소안에는 유난히 많은 노래들이 전한다. 엄혹한 그 시절에 ‘노래의 섬’이었다.
<섬사람들은 노래를 무기 삼아 일본과 싸웠습니다. 아무리 괴롭혀도 사람들의 입에선 노래가 그치질 않았지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을 부르짖은 노래. 나는 지금부터 내가 품은 노래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소안도가 화자가 되어 100년 전 자신이 보았던 옛일을 조근조근 들려주는 그림책 《노래를 품은 섬 소안도》(글 홍종의, 그림 방현일, 국민서관)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립군가’ ‘옥중가’ ‘독립가’ ‘행진곡’ ‘학도가’ ‘애국창가’ ‘소년남자’ ‘대한혼’ ‘감동가’ ‘여권신장가’ 등등 어두운 시대에 소안도가 품었던 희망의 노래들은 많고 많다.
<사랑하는 우리 동포야/ 죽든지 살든지 우리 마음에/ 와신상담을 잊지 말고서/ 우리 국권을 회복해 보세…>(‘감동가’ 중)
<노동과 학문으로 직업을 삼고/ 정의와 사랑으로 정신을 삼아/ 같이 먹고 같이 살자 평화세계는/ 우리들의 눈앞에 완연하구나…>(‘소년단가’ 중)
<천하의 어머니는 여자로구나/ 여자의 책임은 중하고 크다/ 책임은 중하나 권세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깨쳐라 찾아라 잃었던 권리를…>(‘여권신장가’ 중)
송내호 등 독립운동가 89명
송내호 정남국 김남두 김사홍 김통안 박흥곤 송기호 이각재 이정동 정석규 최형천 김경천 강정태 신준희 신만희 이갑준 박기숙 김홍기 백형기 정창남. 항일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소안도의 독립유공자들이다. 최근 신동희님이 추가되어 모두 21명. 이들을 포함해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모셔진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89명.
완도 본섬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 섬 소안도의 항일운동이 이렇듯 뜨거웠다.
평화적 시위와 무력항쟁, 교육운동과 노농운동, 비밀결사와 법정투쟁 등등 일제강점기 내내 줄기찼던 항일운동의 면면을 기념관에 전시된 독립운동가들의 연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소안 항일투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송내호(1895~1928) 선생이다. 여각을 하던 송윤삼씨의 아들이었던 송내호는 1914년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소안도로 돌아와 사립소안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으며 각종 대중단체와 비밀결사를 주도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2주 뒤인 3월15일 완도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으며 1915년엔 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 배달청년회는 친일면장이나 일제경찰과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이른바 ‘불언동맹’을 맺어 실천했다.
수의위친계, 소안노농대성회,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등도 조직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신간회 간사로도 활동했다.
1927년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옥중에서 지병이 악화돼 34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 3·1운동을 주도했던 동생 송기호(1900∼1928)도 수차례 옥고를 치른 끝에 그 후유증으로 병에 걸려 형보다 몇 달 일찍 앞서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식민통치 시절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소안 독립운동가들의 뜻과 소안항일투쟁사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는 해방 후 수십 년 세월이 필요했다. 이들은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걷기도 했고,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기도 했다. 일부는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념대립과 연좌제의 굴레에 휘말린 소안 사람들은 ‘항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소안항일투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89년 이후다. 1990년에야 비자리에 조그만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고, 그때부터 해마다 사립소안학교 설립일인 5월16일이면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모진 역사 속에 소안 사람들이 오랫동안 맘속으로만 다독여온 큰 아픔이 ‘소안면 희생자 추모탑’에 새겨져 있다.
1949년 단독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는 등의 이유로 이승만정권에 의해 사살되거나 수장된 사람들과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집단학살된 소안 사람들을 기리는 탑이다. 탑 뒤로 희생자 250명의 이름 하나 하나를 새긴 빗돌이 있다.
오랜 아픔과 억압의 세월이 ‘남북’을 금기어로 만든 것인가. 소안 사람들은 섬 북쪽을 동부(북암, 이목, 월항, 비자리)라고 부르고, 남쪽을 서부(가학리, 맹선리, 미라리, 서중리, 동진리, 부상리, 소진리)라고 부른다.
시대의 암울함에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이땅의 봄으로 일어섰던 이들, 시대의 폭력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이들….
그 위에 오늘 우리의 삶이 있다.
가는 길
완도 화흥포항에서 출발하는 소안도행 배 시간표는 06:40, 7:50, 08:50, 09:50, 10:50, 11:50, 12:50, 13:50, 14:50, 15:50, 16:50, 18:20. ‘항일의 섬’으로 향하는 뱃길답게 소안농협에서 운영하는 배 이름도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소안도에서 나오는 화흥포행 배는 첫배 6시40분과 막배 오후 6시20분 사이에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뱃삯은 1인 7700원, 승용차 2만원. 동천을 경유하며 소요시간은 50분.
식당
사랑채(061-552-9808), 동창식당(553-7564), 소안식당(553-5071), 청포도식당(553-7248), 우정식당(555-2788), 맛나식당(553-7335), 짜짜루(553-8046) 등.
숙박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소안미라펜션’(061-552-4711)을 비롯, 미소펜션(555-3667)·동남펜션(553-0770)·제일장(553-7650)·소안장(555-0050) 등 다수.
문의
소안면사무소(061-550-6530), 완도군 관광안내소(550-5151), 화흥포항 매표소(555-1010), 소안도항 매표소(553-8177), 소안농협(553-8188)
글 남신희 기자·김창헌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김창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