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석 사회분석]고 박원순 시장 미완의 애도

12일 고 박원순 서울시장 추모 광주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애도하고 있다.
12일 고 박원순 서울시장 추모 광주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애도하고 있다.

우리는 또 한 명의 정치인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놀라움, 당황스러움,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경험한다. 그에 대한 죽음, 장례, 조문 등에 대해 온전한 수용이 불가능해진 상황은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한 애도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조문 여부에 대한 논쟁은 장례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은 지난할 것이지만 사회적 성숙과 통합을 지향해야 것이다. 
조문에 반대하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폭력 가해자로 고소된 자이기에 조문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자살은 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므로 성폭력 가해에 대한 진실이 규명돼 법적 처벌에 근접한 처벌이 사후에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주장을 살펴보았으면 한다. 박원순 시장과 그의 유가족에게 조문하는 것은 틀린 것인가? 정치인을 포함해서 국민이라면 어느 누구도 조문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조문 불가에 대해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조문은 성폭력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의 논리가 명확하지 않다.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성폭력 고소인의 피해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성폭력 고소인에 대한 공감이 병행하는 것은 불가한 것일까? 

죽음 애도, 피해자 공감 병행 못하나?

인간에게는 가족에 대한 부모로서 도덕, 시민에 대한 정치인으로서 도덕, 동료에 대한 친구로서의 도덕 등 여러 가지 도덕적 영역이 존재한다. 그에 대한 평가에 오직 성적 영역만이 유일해야 하고, 어느 한 가지만으로 그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외면하자고 하는 것은 다른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려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아닐까?. 박원순 시장을 조문하려는 사람들의 경험, 의도는 각기 다를 것이며, 그들의 의도를 임의대로 재단해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폄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조문하지 않겠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의 가치에 따라 조문하라’고 해야 한다. 박원순 시장에 대해 조문하는 사람 중 다수가 고소인의 고소 때문에 그가 자살했다고 책임을 돌릴 만큼 미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의 선택이자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고소인의 명예가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모든 피해상황에 적용돼야 하는 올바른 주장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적 제한이 너무 크다. 박원순 시장이 법적 과정을 통해 진상을 밝히고, 그에 대한 사법부의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면 모든 사람들이 임의적 평가를 하지 않고 공동의 이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인이 된 자는 말할 수 없다. 고소인의 고소내용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간접적 증거를 통해 부분적으로만 밝혀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진실규명을 위해서라도 박원순 시장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공평하고 객관적인 방법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면 왜 문제 해결을 하지 않고 자살로 회피했냐며 그를 나무라는 것은 지는 해를 나무라는 것과 같다. 
그의 자살이 결과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게 되었지만, 그가 성폭력 고소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단일한 목적으로 자살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한 이후 일부 보수적 정치인과 언론이 동일한 주장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비리에 대한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 비겁하게 자살했다는 논리였다. 노회찬 의원의 자살에 대해서도 동일한 프레임이 씌워졌다. 그의 불법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그가 자살한 것은 책임회피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며, 의도에 대한 것은 추론일 뿐이다. 그들의 진보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비난은 그들과 관련된 문제를 이슈화하여 정치적 이득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읽힌다. 

“아파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주자”

박원순 시장을 비롯한 과거 정치인의 자살은 단순히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거나, 책임회피만을 아닐 것이며, 병리적 결과도 아닐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정당인으로서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은 대상에 대한 책임을 떠안은 것일 것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결과적으로 진실을 밝히지 못하게 된 면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책임 회피라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아쉬움만으로 상대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너무 독단적이기 이기적이다. 
우리 사회는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좋은 정치인을 잃어버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생채기에 상처가 더해주는 느낌이다. 다수의 시민들이 나름 자신의 영역에서 이상을 위해 분투했던 이의 상실을 아파하게 기다려주는 것은 어떨까? 그들을 넓은 의미의 국가적 유족으로 인정해주고, 그들의 충분히 슬퍼한 후 진실규명과 고소인에 대한 치유에 관심을 가짐으로서 사회적 도덕성이 더 성숙해지는 과정을 가지면 어떨까? 
타자의 장례식을 인정해주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도덕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임을 돌이켜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정의석 <지역사회심리건강지원그룹 모두(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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