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여름’(권정생 글, 고정순 그림 : 단비, 2020)

권정생. 그 이름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똥’ ‘몽실언니’로 대표되는 작가의 책들은 연약한 존재들에 대해 따스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응원하는 시선이 있다.

편견과 차별로 굳어진 세상에서 권정생의 글들은 종소리에 정신이 번쩍 나듯, 어느새 왜곡된 사람들의 생각을 온 천하에 드러내주는 듯 하다.

그런 중에 최근 다시 그림을 그리고 출판되어 나온 ‘눈이 내리는 여름’(권정생 글, 고정순 그림 : 단비, 2020)은 눈 내리는 배경 한 귀퉁이에 자그맣게 그려진, 둥굴게 모여 있는 아이들 모습 때문에 몹시도 기다렸던 그림책이다.

역시 받아 보고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내뱉고 싶어지는 단어들이며 어투에서 권정생 작가의 글이구나 느껴져서 반가웠다. 

‘아이들은 정말 이상하다며 멍청히 바라보고 섰습니다. 모두 빨가숭이입니다.’

한여름 물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만나 이상하게 여기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데없이 한여름에 내리는 눈이라니, 권정생식 판타지다. 원인이나 이유를 파헤칠 새도 없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만난 생의 어려움! 그 앞에서 누구든 속수무책이다. 

‘다만 마주 잡은 손과 손 사이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 
그것으로 온몸을 간신히 버티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눈은 점점 한파로 바뀌고 얇은 여름옷만 입고 있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제는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되어버려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가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나아갈 수가 없다.

어디가 어딘지, 마을을 지나쳤는지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추위와 불안, 걱정으로 점점 힘들어질 즈음 만나는 또 다른 존재들. 

‘영찬이도 흰둥이를 안은 채 가까이 갔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팔을 뻗어 깍지를 끼듯 탑이를 싸안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권정생 작가의 책에는 너나들이 얼싸절싸 싸목싸목 함께 하는 친구들이 많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영찬이가 아침에 걷어찬 바람에 다리가 다친 그 집의 강아지 흰둥이, 가해와 피해의 상황을 넘어 서로 결국 끌어안는다. 늘 마을 어귀에서 아픈 다리때문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바람에 아이들에게조차 놀림 받던 여성 탑이, 그녀의 추워죽겠다는 말에 아이들은 나쁜 냄새가 힘들기는 해도 꼬옥 안아 준다.

서로 끌어안고 둥근 원으로 둘러 앉아 이 눈보라를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다고 갑자기 내리던 눈이 그치지는 않지만 적어도 아픈 흰둥이도 추운 걸인 탑이도 아이들도 모두 따뜻해지는 이 장면에서 그만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맺혔다.

이런 화해와 돌봄이라니, 서로 함께 온기를 나누며 버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마저 없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춥고 힘겨울까. 

난데없이 내리는 눈보라를 여러 차례 맞은 것 같은 올해가 어느새 가을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끌어안고 이 눈보라를 견뎠는지 홀로 웅크리고 외로움까지 견디느라 고통스러웠는지 돌아볼 일이다.

왜 눈이 오냐고 아무리 외쳐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런 이상한 일은 우리 생에 언제든 다시 찾아 올 수 있으니까, 결국 눈보라를 견뎌낼 수 있는 일은 서로를 품는 온기밖에 없는 것이다.

‘5학년 아이들이 아홉 사람 푸른 풀 향기를 맡으며 둘러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권정생 작가는 수 많은 작품에서 사람들에게 ‘우리 이렇게 살아봐요. 그래야 해요.’라고 말하고 있다.

평생 가난이나 질병처럼 난데없이 찾아드는 어려움을 견디며 시골 교회에서 종을 치며 속울음 삼키면서 풀어낸 하고 싶었던 말들,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바보라고 해도 웃으며 ‘난 이 작은 오두막에서 종치기로 사는 게 제일 좋아요.’ ‘친구들과 풀 향기 맡으며 먼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지요’ 하는 맘으로 말이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아이들이 풀밭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삶이란 순식간에 눈이 내렸다가도 또 그치고 그 바람에 소중한 것을 새로이 알게 되기도 하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이유나 획기적인 해결책을 갖고 있진 못하지만, 서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것을 품고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야 말로 바보같지만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이다. 
문의 062-954-9420.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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