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 의성의 시간을 찾아서(2)

고운사 삼층석탑.
고운사 삼층석탑.

예천에서 안동을 거쳐 다시 의성으로 들어와야 내 목적지인 고운사에 다가간다. 그런데 도로의 밤색 이정표가 나를 유혹한다. 하회마을 6km. 불과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경상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마을이 있다는 것, 그 앞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어느 날부터 아니 정확히 내비게이션을 차에 부착한 날 부터다. 지도를 보지 않는다. 그냥 내 목적지만 찍고 내 달리는 것이다. 하니 길의 중간은 생략된다. 그 무엇도 나를 멈추지 않게 하는 내비게이션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내가 살아가고 있다.

 AI의 시대가 본격화되면 나는 더욱 기계들에 종속될 것이다. 그가 정한 수학적 평균율의 지배 하에서 선택은 나의 몫이 아닐 것이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예 기계의 계산식에 굴복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하다. 멀지 않은 날 도래할 그 순간이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기며 또 다른 고민은 까짓것 여행의 기본이 해찰인데 들렀다 가지 뭐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핸들은 그 방향으로 가지지 않았다.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을 지나려는 찰나,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들어온다. 물굽이 동네 바로 하회마을이 강 건너에 보이고, 내가 10초전에 지나친 곳이 부용대라는 절벽이 있는 곳이었다. 이쯤 되면 차를 되돌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부용대에 들러가라는 계시로 받아 들여야 한다.

 논두렁 같은 길을 타고 차는 언덕 사면 앞 주차장에 두었다. 한 무리의 중학생들이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내려오고 있다. 역사적인 공간에 체험학습을 하러 온 것 같아 보인다. 인솔하시는 선생님들의 조심하라는 외침은 경상도의 말법인데, 아랑곳 않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서울 말씨를 닮았다. 억센 듯 하면서도 정겨운 경북 북동 지역의 말투는 봉화사람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현암사에서 나온 책만 보더라도 “니:껴” 형을 쓰는데 아이들의 말속에 그런 기미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슬며시 “어데서 왔는공”하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제땅말들, 표준어라는 감옥으로 언어가 지닌 깊이와 넓이를 말살하는 국어 정책들이 이제 도로명 표지판과 함께 편리성이라는 획일화 된 삶을 강요받아지는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

부용대서 내려다본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본 낙동강과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본 낙동강과 하회마을

여튼 생각을 멈추고 부용대에 다시 몰입한다. 바위 벼랑에 소나무들이 기를 쓰고 삶을 기록해 가고 있다. 용처럼 비상하려는 것과 꽈배기 같이 비틀어진 것들이 숲을 이루는 가운데 엄청난 규모의 바위 벼랑이 하회마을을 감싸고 있다. 발아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물은 그 끝자락에서 바위 사면을 치며 흘러가고 있다. 모래사장을 걷는 어느 가족의 산보가 아름답게 내려 보이고, 졸던 물새들이 휘적휘적 날아가고, 맞은편으로 새로 지붕을 인 하회마을의 초가지붕과 검은 듯 들어오는 기와지붕의 처마선이 아름답다.

 부용대에서 내려 보이는 하회마을은 풍경과 하회마을에서 올려 보이는 두 개의 시선은 수많은 싯귀 속에 담겨있고 한편으로는 선유줄불놀이 같은 연희의 광경도 떠 올려 본다. 음력 7월 16일 기망에 새끼줄을 부용대와 아래쪽 만송정 사이에 묶고 각각의 간격에 창호지에 싼 뽕나무 숯과 소금을 버무린 것을 엮어 두었다가 부용대쪽에서 당기면서 불을 붙이면 숯이 번쩍거리며 물 아래로 내려앉는 것을 배 위에 있는 선비들이 감상하며 시를 연찬하는 것과 한편으로는 부용대 위에서 소나무단에 불을 붙여 내던지며 “낙화야”라고 소리를 지르면 커다란 불덩이가 별똥별처럼 내리꽂는 장관을 연출했다는 양반들의 놀이. 저 정도 웅장한 바위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리다. 하니 당연히 우리 남도의 화순 적벽에서도 이런 놀이들이 이뤄졌다. 낙화놀이라고 명명한 그 놀이는 사멸된 지 오래지만 이 또한 선유놀이를 하는 가운데 벼랑 위에서 미리 묶어놓은 건초 잎 다발을 던지며 장엄한 불꽃놀이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회마을 전경.
하회마을 전경.

다만 안동과 다른 점은 그곳은 양반들의 놀이였다면 적벽은 제액을 물리치고 서민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놀았다는 점에서 민속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무주안성에서도 이런 줄불놀이가 있었다. 몇 해 전 전주천으로 자리를 옮겨 재현했던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언젠가 화순 적벽에서 낙화놀이를 하는 꿈을 그리고 있다. 하늘로 쏘아올린 폭죽놀이가 태반인 이즘에 우리 고유의 민속축제의 성격을 복원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의 연꽃 같은 모습을 뒤로 하고 이제 고운사로 향한다. 3시에 탑리역에서 만나야 하니 마음이 급하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봐야 할 곳이었던 부용대를 얼떨결에 만나고 또 내가 해야 할 숙제에 대한 마음가짐을 상기하니 굶어도 배부른 일이다.

 의성의 동북쪽 방향에 고운사는 위치해 있다.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만큼 접근성이 어려우니 그 유명세에 비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보였다. 전국 곳곳에 고운 최치원의 이야기가 살아 있다. 경주는 물론이고 마산에서는 최치원의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납치된 후에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의 교혼을 통해 태어난 이물교구의 신화라고 이야기 되고 있다.

 함양 상림은 태수 최치원이 수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숲을 만들었고 그 숲을 관리하는 금호미를 나무에 걸어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신안의 우이도에도 상산봉 바둑바위가 남아있기도 하다.

밭고랑 처럼 일렁이는 구름 속 사찰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고운 최치원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운사(高雲寺)에 여지와 여사라는 두 대사와 함께 중창을 하며 가운루와 우화루를 세웠는데 이로 인해 고운(孤雲)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땅에 가장 많은 절의 창건자로 알려진 도선국사도 이곳의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우는데 일조를 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이 근동에는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라고 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소나무가 울울한 등운산 자락에 안겨 있으니 입구부터 나무들이 옹위하듯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 길을 따라 들어서니 산지 가람인지라 골짜기 사이로 계곡이 있고, 산사면에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예사롭지가 않다.

가운루 내부.
가운루 내부.

 근 30여동에 이르는 건물들이 일주문부터 천왕문, 고불전, 가운루, 우화루 등으로 이어져 있다. 예전 같으면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내렸을 그리하여 안개라도 머물렀을 법한 공간에 자리한 가운루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고운 최치원이 지었다고 하니 더 관심이 끌리는 터일 것이다.

 세월의 켜가 흠뻑 묻어 있는 기둥과 우물마루를 보며 오랜 세월에 풍상을 겪어온 이 나라의 사찰들과 오버랩 된다. 범종각에는 절에서 이르는 사물들이 한데 모여져 있다. 법고, 목어, 운판, 범종으로 이뤄져 온 세상을 구하겠다는 서원이 계곡을 가로질러 사바의 세계에 이르는 시간의 소리를 상상해 본다.

 신축한 대웅전이 사찰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고 그 위로 드러나는 하늘에는 구름이 밭고랑처럼 일렁이고 있다. 이 절이 구름속의 사찰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대웅전을 흘깃 보며 참배라도 드려야 하는데 하면서도 발걸음은 오른편의 삼층석탑을 찾는다.

 나한전 앞에 석탑이 있지만 본디 탑은 절의 가장 중심 공간인 대웅전 앞에 있는 게 타당한지라 지금의 나한전이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던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러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아 약간 기우뚱 거려진다. 세월에 낡아진 탑이고 해체와 보수를 겪었는지 귀퉁이가 깨지고 이가 빠진 것이 오히려 친숙하게 다가온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약사전을 찾는다. 여기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아프지 말라는 약병을 쥐고 인간의 질병을 다스려주는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명부전과 삼성각을 돌아 아래편으로 내려온다.

연수전의 위용.
연수전의 위용.

 사찰스럽지 않은 반듯한 형태의 서원 같은 공간이 아까부터 눈에 걸렸는데 드디어 들를 차례다. 연수전이라고 불리는 이질적인 건물은 역시나 조선 영조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가 70이 넘어 기로서에 들어가며 왕실의 혈통과 역사를 기록한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솟을삼문에 왕실의 위상과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벽화 들이 사찰의 원래 그림과는 이질적으로 그려져 있다. 억불을 주창했던 왕가에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는 결국 종교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본 듯하다.

우화루 벽화 속 호랑이

우화루 호랑이 벽화.
우화루 호랑이 벽화.

 기왕 왔으니 이제 이 절의 자랑거리인 우화루까지 찾는다. 주지스님이 주석하는 고운대암 앞 뜨락의 석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뭘까?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는 것일까 아니면 등불을 놓아두는 것일까 궁금해 인터넷을 보니 등불거치대라고 한다. 궁금하면 신통방통 즉석해서 답을 주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이제 드디어 우화루다. 오래된 벽화들이 낡아지며 퇴색해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호랑이 벽화는 쌩쌩하다. 눈초리를 보니 쌍심지를 켠 듯 나를 노려보고 있다. 마치 너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곧 어흥 할 자세로. 사진에 담으며 더 왼쪽으로 갔는데도 이 호랑이 눈은 계속 나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다. 고운사의 모든 역사는 저 매서운 호랑이의 눈에 다 담겨 있을 법 하다.

 워낙에 이 벽화가 유명해서 진본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대체한 그림인데도 한결 같은 느낌이 그대로란다.

 잠시 종무소에 들른다. 기와 불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몇 푼 안 되는 현찰을 만지작거리며 행여 돈이 모자라면 어쩌지 걱정하며 들렀는데, 다 해결된다. 기와 하나에는 건강을, 공양미는 용왕전에 쉼 없는 낚시로 희생된 물고기의 영혼을 위로하며 올리고 돌아왔다. 마늘 보다 더 찐한 고운사의 향내음이 아직도 여여하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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