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영화읽기] 조제

영화 조제.
영화 조제.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은 색다른 영화였다. 6분 남짓의 이 단편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의 얼굴 표정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영화를 연출한 김종관 감독은 그 무엇도 아닌 인물의 미세한 감정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82년생 김지영’의 정유미였다.

그렇게 김종관은 이어지는 영화들에서도 감각적이고 섬세한 이야기들을 줄곧 펼쳤다. 최근작들이 유령과 죽음의 흔적을 쫓고 있기는 하지만, 김종관은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런 그에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리메이크 제안이 들어온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김종관이 처음부터 리메이크를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원작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메이크를 수락한 김종관은 한국의 현실에 맞게 인물들을 세우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원작의 동갑내기 20대의 사랑은 30대 여성과 20대 남성의 사랑으로 바뀌었으며,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그러니까 김종관은 원작과는 다른 캐릭터와 분위기를 고집했다. 캐릭터만 해도 그렇다.

원작의 조제(이케오키 치즈루)가 신비롭고 사랑스런 캐릭터였다면, 김종관의 조제(한지민)는 냉소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밥 한 끼를 대접받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원작에서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조제의 음식 솜씨에 반하는 반면, 영석(남주혁)은 조제에게 “왜 그렇게 먹어? 독이라도 타놨을 까봐?”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종관이 보여주는 조제는 폐쇄된 삶을 오래 살아 까칠해진 인간이다. 

따지고 보면 김종관이 제시하는 조제가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인물에 가까울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영석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영석은 지방대생으로 취업을 앞두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상황이고, 여자 친구와 함께 누운 고시원의 침대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김종관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의 형식에 있어서도 감독은 서두르는 법이 없이 느리고 긴 호흡으로 현실을 중계한다.

그 기반 위에 두 주인공이 서로 만나 사랑의 감정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과정을 연출한다.

이런 이유로 관객들은 조제와 영석이 느끼는 감정의 동반자가 된다. 결국 ‘조제’는 인물들의 감정을 축적시키는 것을 통해 관객들이 인물들에게 동화되도록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장애와 비장애, 30대와 20대의 연령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사랑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런 이유로 이 영화 속의 조제와 영석도 이별을 통과하게 된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이들의 이별장면을 연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토록 섬세하게 쌓아 올렸던 이 영화는 이별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이별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감독은 관객들로 하여금 두 사람이 왜 헤어졌는가를 상상해 보도록 제안한다. 이런 이유로 관객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를 채워 넣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관객들마다 엇갈린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영화가 이별의 모습을 직접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관객들은 불만이 있을 수 있고, 이별의 연유를 스스로 미루어 짐작하는 관객들이라면 참신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여튼, 감독이 의도한 것은 관객 각자의 보편적인 체험으로 이별을 상상해 보라는 주문이다. 

이쯤 되면 ‘조제’는, 김종관 감독이 원작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형식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조대영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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