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희극과 격언 1’ 에릭 로메르 (2020 : 고트GOAT) 
옳고 그름 혼란 속 허물어진 경계선

프랑수아 : 내가 오늘 너한테 귀찮게 매달린 건 사실이야. 하지만 우린 아예 보지 못하는 날도 많잖아.
안 : 난 그게 좋아.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끔씩만 만나. 자주 못 봐야 애틋한 마음이 커지는 법이니까.
프랑수아 : 그런 거라면 이제 우린 아예 만나지 말아야겠네! (66쪽)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파도, 누벨바그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인 에릭 로메르는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등의 연작 영화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이야기가 사랑과 유혹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에릭 로메르의 ‘사계절 이야기’ 역시 그렇지만, ‘희극과 격언 1’ 만큼은 아니다.

정말 로맨스, 사소하다고도 여겨지는 사랑 이야기가 그 작품의 전부라면 어째서 누벨 바그는 세계 영화 사조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질문을 스크립트를 읽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영화의 장면을 온전히 바라보면야 가장 좋겠지만, 영상, 언어, 시대, 다양한 장벽들이 있었다. 가장 쉽게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대사와 대본. 출판사 고트의 ‘사계절 이야기’ 이후 그 쨍한 수채화나 유화 같은 감성을 만나고 싶어 책을 펼쳤다.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것처럼 여겨진다. 낭만적인 이야기, 서로의 삶을 서로에게 맞추어가는 바람직한 이야기. 그런 식으로 삶의 방향은 힘을 얻고, 그런 식으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다고. ‘희극과 격언’에서 그런 사랑은 주연의 몫이 아니라 조연의 몫이다. 예민하고, 날카롭고, 무언가 불안한 사람들이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에릭 로메르는 그대로 보여준다.

클라리스 : 결혼은 그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과정일 뿐이야.
사빈 : 결혼이 네게 무엇보다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 보이는데.
클라리스 : 아마 그럴지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런거지, 우리 둘 사이의 관계에선 그렇지 않아. 우리의 유대감은 약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무척 강하지. 그게 바로 사랑이야. 사랑만이 그런 거잖아.
사빈 : 사랑은 변하는 거야.
클라리스 : 형태는 변할 수 있겠지. 하지만 강도는 편하지 않아.
사빈 : 사랑 안에도 어느 정도 의지는 담겨 있다고.
클라리스 : 네가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 관점은 터무니없이 이기적이야.
사빈 : 현명한 이기주의지. (88-89쪽)

애인이 낯선 남성과 길 걷는 것을 발견한 뒤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프랑수아, 유부남과의 불륜을 멈추기로 한 날, 자신도 확정할 수 없는 이유로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빈, 그리고 하나같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스스로도 상처를 입고 마는 마지막 단편 ‘해변의 폴린’ 속 인물들. 다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적이라 별로 읽기가 즐겁지 않다.
그럴 때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희극은 희극이지, 격언은 뭘까? 어디서는 잠언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은 결국 어떤 조언이 되는 말이라는 뜻 아닌가. 이런 비유적으로 징그러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너희는 이런 식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택들이 엉망진창이긴 했어도, 어느 부분이 명확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결국 이 이야기들은 구질구질하지만 비극은 아니고, 읽기는 힘들지만 반면교사가 된다. 그렇기에 희극과 격언이 되는 것이다.

마리옹 : (시동을 끄며)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어제 기차에서 생각한 게 있거든. 결국 그 여자랑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앙리가 그녀랑 같이 있어놓고 그게 실뱅이었다고 속였는지도 모르잖아. 나야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렇다면 정말 끔직한 일이지. 하지만 넌, 혹시 네게 위안이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되잖아. 그럼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로 더는 슬퍼할 필요가 없게 되니까.
폴린 : 난 슬프지 않아.
마리옹 :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봐.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반대라고 믿을게. 그럼 우리 둘 다에게 만족스럽지 않을까?

폴린 : 전적으로 동감이야. (213-214쪽)

우리는 옳고 그름을 완벽히 나눌 수 없는 순간을 마주치게 된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거나, 깨뜨리고 싶다거나, 아무튼 감정과 애정의 단계에서는 항상 경계선이 흐려진다. 그럴 때 인간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행동할 수 밖에 없을까? 누군가는 그들의 선택을 관찰하고 판단할 것이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자신의 과거나 현재를 떠올릴 수도 있다. 누군가는 미래에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길 바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도록, 에릭 로메르는 우리에게 보편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의 062-954-9420.
안혜민 <동네책방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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