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봄으로-07]
<햇살을 길이나 부피로 헤아리는 경지는 나이와 함께 오나보다. 늙어빠지면 길이와 부피뿐 아니라 무게로까지 느끼게 된다. 햇살은 이제부터 춘분 무렵까지가 어깨에 지고 다니기 알맞은 무게가 된다. 그때가 되면 그 무게가 벌써 노구(老軀)에는 버거워지고 만다.>(박완서 작가의 글 중)
설도 지나고 봄이 머지 않았노라고, 완연하게 도타워진 햇살이다. 할매는 알맞은 무게의 햇살을 지고 마당가 텃밭에서 무릎걸음으로 전진중이다.
“많애. 나, 팔팔이여.”
나물 캐던 아가씨가 나물 캐는 할매가 됐다. 이순란(88·해남 계곡면 사정리) 할매.
“(마을)회관에 갖고 가서 여런이 나놔묵을라고.”
그러느라 괜히 고생중이다.
“고생하고 캤응께 나놔묵제.” 나놔묵는 이유란 그렇다.
“놈들이 맛있게 묵는 거 보문 좋제. 카마니 앙겄으문 좋을 일도 웃을 일도 없제.”
이 봄날,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할매는 뽈깡 일어서 마당가 텃밭에 행차한 것이다.
그곳은 햇빛이 모태지는 자리, 초록이 우우우 쑥쑥쑥 돋아났다.
“겁나게 나왔어. 그래갖고 나를 불러.”
할매가 소맷단을 위로 걷어올리고 팔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매, 금세 두 시간이 지내가불었네.”
허리도 구부정하고 다리도 아픈 할매는 흙밭에 “납딱하니 앙거서” 나물을 캔다.
“모도 지가 절로 났어. 유채 곰밤부리 나팔쟁이….”
바구리에 든 나물들을 호명하는 할매. 봄을 부르는 주문 같다.
나팔쟁이는 진분홍꽃 피는 광대나물. 밭이나 길가에서 흔히 보는 봄꽃이다. 코딱지나물이란 이름도 있다. 꽃피기 전, 어린 순을 나물로 무쳐먹는다. 꽃말은 ‘그리운 봄’.
“다 같이 아우라지문 더 맛나. 양님해서 무쳐. 된장 여코 고치장도 여코 젓갈 참지름 마늘 고로고로 여코….”
나물 캐는 할매의 손마디마디는 휘고 굽었다. 서른 여덟에 남편이 먼길 떠난 뒤 어린 자식들을 홀로 키웠다.
“벨 일을 다하고 살았제. 험상시론 세상을 보도시 살았제.”
험상시론 세상을 헤쳐오면서도 마르고 닳지 않은 인정이 꽃다발인 양 한 무더기의 초록다발이 되어 이편으로 건네진다.
“가지가. 도시에서는 귀한 것인께.”
봄볕도 인정도 도탑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김창헌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 2020년 3월호에 게재됐던 원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