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이전 ‘고깔씌운’ 수박 선구적인 재배
성주농고 졸업생 대부분 정착, 동력 뭘까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역문화진흥법을 근거로 하여 지속가능한 지역을 만들기 위한 문화도시 지정 사업이 매해 열기를 더하고 있다. 금년에는 70여 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예비 문화도시를 신청하겠다고 열정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소도시에서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주민의 문화력과 문화자치의 노력으로 버젓이 문화도시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님에도 저렇듯 불붙는 이유는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생활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가져온 문화 욕구의 증대이며, 두 번째는 지방 소멸, 인구절벽이라는 당면한 현실을 돌파하는 출구로서의 문화도시 지정이며, 세 번째는 장르 예술 중심으로 바라보았던 문화에 대한 개념이 삶이 곧 문화라는 시각으로 확장되며 이뤄진 결과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내부 요인이 있지만, 여기에 따라붙는 5년간 200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정책 사업이 갖는 문화인프라의 증대와 휴먼웨어, 프로그램 웨어의 운영이 가져올 지역의 실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자치단체장은 문화도시 지정을 매우 중요한 정책이자 치적으로 여기며 주민 앞에서나, 행정 앞에서 맨 앞자리에 문화도시 얘기를 꺼내는 화두로도 작동한다.
자치단체마다 이렇게 뛰어들다 보니 그간 별로 대우받지 못했던 문화활동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서울 중심 체제로 있었던 이들의 발길이 지역 곳곳으로 분산되어 지방 중심 문화활동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기도 하다.
강의안 작성 위한 성주 사전 학습
5월 18일 경북 성주군으로 강의를 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조금은 서운함이 드는 부탁이었다. 41주년 5·18인데 이런 날 광주를 비워 주라는 것이 종내 아쉬웠다. 미안하게 되었다며 일이 화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이고 꼭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니 초청한다는 것을 뿌리치기는 민망했다.
수락하고 나니 이제는 강의 원고가 문제였다. 지독히도 싫어하는 것이 발제문이나 강연자료를 만드는 것이 체질화되어 버렸다. 원고 마감을 지켜본 기억이 없이 서로 상처받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말의 근거는 또 남아야 하니 개발새발 겨우 써냈다. 내가 강의할 곳이 몇 해 전부터 현재까지 사드에 관련하여 최전방이라는 점이 가장 큰 중점 사안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요즘 길거리 어느 곳에도 황금색으로 빛나는 참외를 쌓아 놓고 20여 개에 만 원이라는 플래카드를 휘날리는 정경의 본향이 성주라는 사실과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사실 써지지 않는 원고를 두고도 이곳저곳을 다니는데 마음 한켠을 짓누르는 중압감이 손에 박힌 가시처럼 따끔거리는 경황이다. 이럴 때 무언가가 확 잡히면 일필휘지처럼 빛의 속도로 글을 마감하는데,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가지가 나를 끌어당겼다. 하나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을 퇴임하신 진옥섭 선생님이 보내주신 퇴임 영상 중에 담긴 어록이었다. “글에는 마감이 있을 뿐이고 현장엔 답이 없다. 늘 문제만 있을 뿐이다”라는 이야기가 내 가슴에 커다란 공명을 주었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 외치면서 현장으로 가자고 주창하던 나의 가식에 비수를 꽂는 것 같았으며 글에는 마감이 있을 뿐이라는 문장의 여운은 내내 나를 괴롭혀 왔다.
그 순간 또 하나의 압박이 다가왔다. 압해도의 삼거리에 커다란 특장차가 화물칸 한쪽 날개를 열고 “성주 참외 25개에 만 원”이란 펼침막과 함께 성곽처럼 참외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아 이제 마감의 시간이 섬으로까지 출장 와서 나를 감시하는구나 싶어지며 마침내 성주를 알아내려고 버둥거려 봤다.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의 한국의 발견 경상북도 편 성주군을 먼저 접했다. 그 도시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것은 내게는 나중의 일이다. 어제가 있어서 오늘이 있는데, 각 도시의 홈페이지에는 오늘과 잡히지 않는 내일만 가득하다. 인과관계가 생략되어 버린 오늘 내일을 알기 위해서도 고루할지라도 나는 책을 집어 든다. 내 인생의 성경과 같은 책을.
척박한 농토 극복 위한 농민들의 의지
성주의 역사는 깊은데 특히 물로 통하던 김천, 대구, 칠곡과의 물길의 중심역할을 했었다고 전한다. 때문에 한개나루 즉 큰 나루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커다란 물목이 있었고, 이것을 바라보는 언덕에 한개마을이라는 자작일촌의 한개 이 씨 동족 마을이 여태 건재하게 있다.
예전에는(일제 강점기) 이곳을 지나는 기차 철로를 만들고자 했지만, 마을주민의 반대로 옮겨서 가설되었다고 하고, 그 후로는 육상 교통이 더욱 발전하게 됨에도 이 마을을 비롯해 성주는 늘 큰길로부터 비켜난 지역이었다. 게다가 합천군의 것으로 알고 있는 가야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 덕분에 험준 지역이 많고, 중산간 지역 같은 고지대가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산가야의 중심인지라 옛 고분군과 성곽을 지니고 있고 성의 역사를 증명하듯 성밖숲이란 숲쟁이도 지니고 있다.
특히 성주를 깊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참외 생산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이보다 먼저는 수박 생산의 중심지로 1940년대부터 보리밭 이랑에 참외와 함께 심어 생산하다가 1956년 무렵 수박에 기름종이 고깔을 씌워 촉성 재배를 하여 좀 더 일찍 생산해서 여느 지역보다 먼저 출하했다고 한다. 요즘이야 고창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이 수박 생산의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박 뿌리와 접을 붙여 윤작의 폐해를 극복하고, 이어 70년대에는 비닐하우스 생산을 하며 출하 시기를 더욱 앞당기고 80년대에는 온실재배로 이어져 왔다.
이런 내력을 읽다 보니 그 배경에는 역시 척박한 땅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살려 하는 농민들의 의지와 더불어 이 동네에 있는 성주농업고등학교의 졸업생 70%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에 기대어 살 궁리를 꾸준히 하며 기술을 발전시켰음도 새삼 크게 다가왔다.
빨간 호박으로 불리는 관상용 호박에 접을 붙여 색이 유난히 빛나는 성주 참외란 사실도 참으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수박의 명성을 뒤로하고 참외로 옮겨온 이유를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수박에 견주어 참외는 나쁜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기에 출하량을 조절하여 시세변동에 신축성 있게 적응할 수 있는 데다가 부피가 작고 흠이 날 염려가 적어서 운반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빛깔을 보고 골라잡는 서울 사람들의 눈에 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참외는 맛이 달고 씨가 적고, 껍질이 얇고 빛깔이 좋은 것을 으뜸으로 치는데, 성주 참외는 이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8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이 알려주는 지식은 성산여씨의 동족마을이 양로소를 기품있게 운영하고 있는 사례와 도미 전설의 주인공인 성주 도 씨 후손들이 벽진면 해평동에 동족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내력까지 전해 주고 있다.
보성 강골마을 흡사한 집성촌 내력
강의를 위해 한 지역의 정보를 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이곳 성주에 대한 역사의 개관을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문화도시와 관련한 성주의 특질을 연계하여 강의안을 작성하고, 현장에서 강의할 때 이렇게 익힌 내력이 어떻게 현재와 조응하며 미래를 연결할 것인지 까지 풀어나가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가 내게 지역 간의 유사성으로 다가오는 게 있었다.
첫 번째는 고깔 씌운 수박이었는데 이것은 70년대 담양 와우마을에서 딸기를 재배하며 하우스에 전기조명을 넣어 딸기가 늘 낮으로 알고 생육 활동을 멈추지 않아 조기 출하한 데다 맛도 좋아서 그 시절 호텔이나 백화점에 납품되어 “담양 봉산의 전조딸기 한 알에 연탄이 한 장”이란 말이 생겼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모두 부지런한 농민들의 땀방울이 일군 성과였음이다.
두 번째는 성주농업고등학교의 졸업생이 대부분 지역에 정착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지방소멸의 가장 주된 이유가 서울 중심, 대도시 중심으로 모든 부와 권력과 활동이 집중된다지만 그 시절에도 시골은 변변치 않은 벌이와 힘든 노동으로 도피의 대상이었는데, 이를 마다하지 않고 극복해 낸 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전개 과정과 그 이후를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지는 구절이었다.
세 번째는 한개마을이나 해평동 같은 집성촌이 고려 시대부터 혹은 조선 시대부터 반듯하게 남아있는 저력에 관한 것이었다. 민속 마을이라고 알려진 한개마을은 제주의 성읍이나 아산의 외암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같은 격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 지역에 유사한 마을이 있다면 보성의 강골마을과 흡사하다.
이런 문화적인 유사성 사이에 또 다른 차이가 있는데 이를 차분히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 비교문화 쪽이라 한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내가 성주에 찾아가 낯선 분들에게 강의를 할 때 이러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훨씬 부드러워진 자리가 될 것임을 알기에 서서히 강의안을 완성해 간다.
강의는 오전 10시경에 시작해서 12시 반에 끝나니 나는 강의를 마치고 내가 언급한 지역 중의 일부는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올 것이다. 성주야 기다려라.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