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을 만나다] 이장욱' 겨울의 원근법’ & 프란츠 카프카 ‘성’

르네 마그리트, 친구의 질서
르네 마그리트, 친구의 질서

너는 누구일까?

가까워서 안 보여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

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떨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소리 없이 내린다는 것

​나는 너의 얼굴을 토막토막 기억해

네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스쳐갔을 때

혀를 삼킨 입과 외로운 코를 보았지

하지만 눈과 귀는 사라졌다

구두는 태웠던가?

​너는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했네.

계란의 속도로 부서졌네.

뜨거운 이야기들은 그렇게 태어난다.

가까운 눈송이와 먼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나는 겨울의 원근이 사라진 곳에서 너를 생각해

이제는 아무런 핵심을 가지지 않은

사슴의 뿔이 무섭게 자라는

이 완전한 계절에

-이장욱 ‘겨울의 원근법’

겨울의 원근법과 디지털 노마드

원근법은 사람이 만든 인위의 시선이다. 기준인 중심을 설정하고 중심으로부터 가깝고 먼 거리를 통해 질서 짓고 척도화 하는 배열의 눈이다. 영토의 중심에 도시와 관청이 있듯 원근법적 중심은 시선을 끄는 동시에 모든 것을 보는 눈동자, 혹은 두뇌의 역할을 한다. 영토의 원근법적 배열인 도시와 외곽을 중심으로 아침이면 교통편은 번화가를 향해 길게 늘어서며 저녁이면 바깥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인간의 밀물과 썰물은 도시와 변방이라는 원근법적 배치가 이룩한 인공의 결과, 높은 밀도로 들어선 고층건물과 아파트는 중심을 향해 절하듯 굽고 시스템에 합류한 사람들은 안도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구글과 아마존, 페이스북 등 유수의 검색엔진과 소셜 미디어, 전자 상거래 분야를 넘나들며 자료를 모으고 사업상의 일을 처리하며 미래를 구축한다. 인터넷의 시대는 변화가 생체 흐름을 능가하는 초고속의 시대, 혼돈에 몸을 맡기고 속도에 적응하는 유연함이 필수인 ‘노마드’의 세계.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와 유목주의를 의미하는 ‘노마디즘’은 오늘날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로 널리 알려졌다. ‘디지털 노마드’는 유목민처럼 자유로운 주거 이동과 함께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거나 몰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과거의 유목민이 야만이나 떠돌이 등 사회 주변부에 머무는 소수자를 지칭하는 언어였다면 21세기 노마드는 스마트 폰과 태블릿 같은 디지털 장비를 활용, 정보를 결합하고 생산하는 디지털 시대의 각광받는 인간형이다. 디지털 노마드들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노트북을 들고 스마트 워치를 차고, 언제라도 세상의 모든 사항에 접속할 준비를 갖춘 리좀들이다. 그들을 지배하는 윤리는 평등과 관용, 그들이 신봉하는 신은 세계화 - 그러나 디지털 노마드들이 가는 곳은 현실이 지배하는 외곽의 영토, 사람의 영토, 대중의 영토가 아니다. 그들이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는 곳은 영토의 중심인 초거대 도시, 뉴욕 런던 서울 부산 도쿄…. 숫자화 된 문서를 클릭 한 번으로 처리하는 디지털 노마드에 의해 세계는 다원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원근법적으로 재서열, 재배치된다. 인터넷은 개인과 개인의 무한 접속이 가능한, 중심의 개입 없이 간단한 신원정보 확인만으로 팬카페와 맘카페 등 강한 영향력을 갖는 무리를 만들 수 있는 사회이나 원근법이 제거된 수평의 세상은 아니다.

‘겨울의 원근법’에서 시인 이장욱은 ‘폭설’이 내리는 사태, 시인에게 다가온 우발적 만남 속에서 원근이 지워진 세상, 강건한 질서와 규범이 지워진 자리에 경이로운 세계가 들어서는 체험을 한다. 그것은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사자를 뒤쫓는 사슴이 가능한 세계. 그러한 세계를 만드는 것은 각각 다른 눈송이들로, 눈은 중심과 주변 없이 단번에 쏟아져 내려 장대한 폭설의 장면을 연출한다. 사슴의 뿔처럼 질주하고 계란의 속도로 부서지는 눈송이들은 원근을 지우며 ‘본질 없음’이라는 핵심에 가까워진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중심이 견고함을 주장하면 주변은 중심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하여 중심을 의문하지 않는 중심의 노예가 된다. 자전거 바퀴가 구를 수 있는 까닭은 바큇살의 중심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태풍이 몰고 오는 거대한 변화는 중심인 눈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중심의 유동성!

각각이 중심인 사유의 게릴라성을 학습할 수는 없을까. 지금까지 배운 것들에 덧댄 새로운 사유의 관점, 새로운 가치관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디지털 노마드가 신인류로서 경제와 예술, 재생과 창조를 이끌며 도시를 살찌우는 하나의 흐름이라면, 바깥으로부터의 일어섬 - 사자가 사슴을 쫓듯 사슴도 사자를 쫓는 세상을 꿈꾸는 일은 불가능할까. 이러한 기회가 가능한 세계야말로 약육강식으로 일컬어지는 짐승의 세계 아닌 진정한 경쟁, 흥미로운 놀이가 펼쳐지는 인간의 장 아닌가. 진짜 노마드는 탈출이 아닌 탈주하는 자다. 강자는 더욱 강하고 약자는 더욱 약해지는 규정된 세계를 탈주하려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눈송이의 - 인간 개개가 그러하듯 이 세상에 모습이 같은 눈송이는 없다 - 얼음 되기, 서로 뭉쳐 눈사람 되기, 빙산 되기, 그리고 다시 수증기 되기. 되기와 되기의 변이 속에서, 원근법이 사라진 진짜 세상 안에서 노마드적 인간들은 탈출 아닌 탈주선을 만든다. 탈출이 취미와 기호를 추구하면서 노동의 피로와 자본 같은 거대성에 포섭된 개인의 왜소성을 잊으려는 도피라면. 탈주는 고착화된 체계와 가치를 넘어 변화를 시도하려는, 가치를 만들어보려는 적극적 의지에 가깝다. 이러한 시도들은 마치 지치지 않는 축제처럼, 잔치처럼 반복되며 이 세계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카프카 '성 '열린책들.
카프카 '성 '열린책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성

K는 저기 위쪽으로 맑은 대기 속에서 또렷한 윤곽을 그리며 서 있는 성을 쳐다보았다. 모든 물체의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주면서 얇은 층을 이루며 두루 쌓인 눈 때문에 성의 윤곽은 한층 더 또렷하게 나타났다. 실제로 성이 있는 산 쪽에는 이곳 마을보다는 눈이 훨씬 더 적게 내린 듯했는데 이곳은 어제 국도를 따라 걸어올 때만큼이나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이곳 마을에는 눈이 오두막집 창문까지 쌓여 나지막한 지붕을 내리누르고 있었으나. 저기 산위에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경쾌하게 위로 솟은 모습이었다. 적어도 여기 아래쪽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 카프카 ‘성’

카프카의 ‘성’은 토지측량사 K가 끝까지 입성하지 못한 중심과 주변부를 다룬 이야기이다. 베스트베스트 백장의 의뢰로 외지에서 들어온 K는 관리의 지시사항이 올 때까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으려 애쓰며 성 밖 마을에 머문다. 성의 규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 밖 마을 사람들의 K를 향한 태도는 모호하며, 성의 체계와 규범에 대한 그들의 이해 또한 제각각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성안을 향한 동경과 염원, 자신의 생계가 성안 관료의 손에 달려있다는 두려움 섞인 상상의 산물일지 모르나 고통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중심을 갈망하고 중심으로의 영입을 꿈꾸며 중심이 전하는 지령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고투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전갈은 매번 간단명료하며 상투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상상은 온갖 예측과 함께 커져가는 것이다. 성으로 갈 방법을 꿈꾸며 자신을 불러줄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K가 알아낸 사실은 성의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인이 클람이라는 것. 마을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클람의 영향력은 지대하여 한때 클람의 관심을 받았던 사람은 마을 내부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주막 벽에는 클람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반면 관료의 명을 거절한 가족은 어떤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마을로부터 배척당한다. 스스로 체계를 내면화한 사람들의 자기 감시와 자기 검열! 그림자처럼 취급되는 아멜리아 가족과 한때 클람의 애인이었던 프리다 사이를 오가며 K가 알아낸 것은 이렇다.

K는 클람이 있는 먼 곳, 그의 난공불락의 거처, 아직 K가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외침에 의해서나 중단될 수 있는 그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또 반박할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 저 위에서 알 수 없는 법칙에 따라 그어놓아 순간적으로만 눈에 보일 뿐 K가 있는 낮은 곳에서는 깨트릴 수 없는 그의 세력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 모두가 클람과 독수리의 공통점이었다. … 관청에 대한 경외심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것이고,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모든 방면에서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들에게 주입되고 있어. 또 당신들 자신도 가능한 최선을 다해 거기에 가세하고.…천으로 두 눈을 가린 사람은 아무리 격려해주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지. 천을 벗어야만 볼 수 있어.

- 카프카 ‘성’

‘성’은 너무나 거대해 내막을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장치들 - 국가, 시장, 국적을 불문하고 커져가는 다국적 금융기업, 디지털 권력 기구 등을 닮았다. 디지털 사용자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믿으나 빅테크 기업들은 사용자 정보를 빅데이터화 하여 거대 규모의 경제 가치를 창출한다. 인터넷은 상냥한 제국주의자, 다양체들은 빅테크 안으로 포섭되며 디지털 성역은 끝없이 넓어져 간다. 개성과 특이성이 하나의 망으로 연결되는 세계, 모든 정보가 기록되고 축적되어 자본으로 포섭되는 체계! 토지측량사 업무를 위해 왔으나 기관에 의해 학교 사환으로 일하게 되는 K는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일을 언제든 방향 전환할 수 있도록 리셋 되는 현대인을 닮았다. 그럼에도 K는 끝끝내 마을에 남는다. 성의 일방성에 맞서면서,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K의 시도는 무표정한 관료 체계 앞에 허공의 먼지처럼 매번 좌절하지만 나는 K의 시도가 실패로 여겨지지 않는데 까닭은 그가 부름 받은 그곳이 중심인 ‘성’이기 때문이다.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인간의 숭고함은 때로 예정된 실패에도 옳음을 자각하고 맞서거나 행동하는 데 있다. 뛰어난 사업 수완과 신분 상승의 의지로 충만했던 유사 클람 아버지에 맞서 무용(無用)한 문학을 끝까지 고수했던 카프카. 프라하의 백인 사회에서 소수자 유대인이었으며 같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도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외되었던 카프카. 그러나 그것이 카프카였다.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머무는 소설의 결말은 어쩌면 성안으로 포섭되기를 끝까지 미루면서 밀어냈던 그의 자화상 아닐까. 오늘날 권력구조의 바깥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모색하는 유사 카프카 - 청춘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젊음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니 탈주하는 인간은 언제나 젊다. 그리고 서늘한데, 기관의 무소불위한 위엄과 강철 같은 확고부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허구’로 지어진 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 진정한 노마드, 제로(0)들이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눈으로 본 것, 소문으로 들은 것, 그리고 왜곡을 가하는 몇 가지 부수적인 의도가 겹쳐져서 클람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윤곽은 대략 맞을 거예요. 그러나 윤곽만 맞는 거죠. 그 밖의 클람의 이미지란 가변적인데, 물론 그것도 클람의 실제 생김새만큼은 아니지만요. 그는 마을에 올 때와 떠날 때의 모습이 다르며,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의 모습이 다르고, 깨어 있을 때와 잘 때의 모습이 다르며, 혼자 있을 때와 대화할 때의 모습이 다르다고 해요. 그렇게 보면 저 위 성에 있을 때의 모습이 거의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이해가 되죠.

- 카프카 ‘성’

기업이나 돈과 같은 허구 없이 인간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기업은 직원들과 옳다고 믿는 공통의 이야기가 있어야 존속하고, 돈은 많은 사람이 같은 가치를 믿어야 성립한다. 이것이 허구니 맹신을 멈추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허구에 대한 믿음을 거둔다면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시스템 전체가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끼리 협력하지 못할 것이다. … 인간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구별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 결과 무수한 사람이 국가나 사회, 그리고 신이라는 상상의 산물을 위해 전장에 나가거나 수백만 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현실인지 허구인지 구별하는 최상의 방법은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고통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고통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국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전쟁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주체는 국민이다. 기업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거액의 손실액이 발생하면 기업이 아니라 그 조직에 속한 경영자나 사원이 초조해한다. 인간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허구가 필요하지만, 허구를 도구로 보지 않고 그것의 목적이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초래될 고통은 실존하는 우리들의 몫임을 명심해야 한다.

- 유발 하라리, ‘초예측’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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