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다자이 오사무의 유다의 고백 & 배신의 정치
"토라진 남자의 열등감이 빚은 배신의 정치"

가리옷의 유다는 스승을 배신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의 이름 앞에 오욕의 성(姓) '가리옷'을 달았다. 신의를 횡렬한 서울의 유다는 제 이름 앞에 무엇을 달게 될까. 이스가리옷(iscariot)인가.
가리옷의 유다는 스승을 배신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의 이름 앞에 오욕의 성(姓) '가리옷'을 달았다. 신의를 횡렬한 서울의 유다는 제 이름 앞에 무엇을 달게 될까. 이스가리옷(iscariot)인가.

그 사람을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적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압니다. 안내해드리지요. 갈기갈기 난도질하여 죽여주세요. 그 사람은 저의 스승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처럼 심한 차별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지금까지 저를 얼마나 조롱해왔는지 참을만큼 참았어요. 제가 지금껏 남몰래 얼마나 그 사람을 감싸주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사람도 깨닫지 못한 듯해요. 그 사람은 거만합니다. 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이 스스로 너무 분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봤을 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아요. 만약 제가 없었더라면 그 사람은 이미 한참 전에 그 무능력한 얼간이 제자들과 함께 들판 한 구석 어딘가에 늘어져 죽고 말았을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 '유다의 고백'

어떤 분노한 제자의 이유있는 고변

한 사람이 배신의 칼을 들었다. 어떤 스승의 어떤 제자인 그는 상당히 화가 나 있는지 제가 모시던 주인을 고변하면서 갈기갈기 찢어달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의 분노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 그의 성정이 모진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변자의 일방적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스승이라는 사람은 헌신적인 제자의 은공을 저버리고 그를 차별하며 조롱하는 못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특별한 까닭도 없이 사람을 경멸하는 인격적 모독은 누구나 분노할 수 있으며 앙갚음으로 돌려주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예수를 팔아넘기고 끝내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한 장본인 유다, 그는 스승을 배신한 후 2천년이 지나도록 역사에 가장 ‘빛나는’ 배신자로서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는 어찌하여 세상을 구할 메시아를 배신한 것일까? 역사와 종교는 사리사욕에 눈먼 그가 재물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 스승의 목숨을 제 이익과 맞바꾼 ‘악마의 하수인’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에는 늘 예기치 못한 이면과 그 이면에 진실이 숨은 경우도 허다하다. 도둑질로 이미 부유해진 그가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을까? 유대의 대제사장을 찾아간 유다의 고변을 상상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붓끝을 따라가 보자.

유다는 예수를 사랑했다. 스승을 향한 제자의 사랑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온한 혁명가를 메시아로 모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열두 제자 안에 든다는 것은 핵심 중의 핵심이라는 것인데, 이는 스승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 없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깊이 사랑한다 해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유다는 '베드로와 야고보 무리들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과 자기가 스승의 '뒤를 따라다녀 자 아무런 득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곁을 떠날 수가' 없다며 자신의 무한한 사랑을 고백한다. 만약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자신도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 어이하여 증오로 돌변해버린 것일까?

당나귀를 탄 혁명가? 천박한 추태!

예루살렘 궁전에 가까워졌을 때 그 사람은 길가에서 노쇠한 당나귀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당나귀에 올라탔습니다.

“시온의 딸이여, 무서워 말거라. 보라, 네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어찌나 초라한 모습이던지. 이것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루살렘 궁전에 들어가는 다윗의 자손이 보여줄 모습이라니. 저는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실로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지요.

하루 빨리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저의 괴로운 결심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점점 더 불어났고 그 사람이 지나는 길마다 형형색색의 옷을 던지거나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그 길 위에 깔아주며 떠들썩한 환호로 그 사람을 맞았습니다. 그 사람의 주위를 가득 메우며 따르던 군중들은 큰 파도처럼 그 사람과 당나귀를 뒤흔들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저마다 열광하며 찬송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은 멍청하게도 이미 눈앞에서 천국이라도 본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젖어 서로를 얼싸안았습니다. 어찌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입니까? 머지않아 실망하게 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터리지요. 저는 어느 것 하나 믿지 않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유다의 고백'

신앙을 전파하는 메시아가 정욕에 매달린다는 것은 유다에게 용납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의 어머니가 동정녀임에랴. 스승의 발을 향유로 씻기는 여인의 행위는 유다의 인식틀에서는 섹슈얼리티요 페티쉬다.
신앙을 전파하는 메시아가 정욕에 매달린다는 것은 유다에게 용납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의 어머니가 동정녀임에랴. 스승의 발을 향유로 씻기는 여인의 행위는 유다의 인식틀에서는 섹슈얼리티요 페티쉬다.

유다의 실망을 이해한다.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스승이 군중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군중을 휘어잡는 힘은 카리스마와 퍼포먼스에 있다. 열정적 선동(agitation)과 강렬한 현상(imaging)은 혁명을 꿈꾸는 전략가들에게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유다의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웃는 꼴이라니. 그보다 몇 천 년 먼저 살다간 신화시대의 세속적 정치인들도 백마(白馬)를 타고 군중 앞에 나서는 퍼포먼스쯤은 연출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귀 새끼가 웬말인가.

제자는 스승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본다. 유다가 꿈꾸는 세상은 예수의 그것과 다를까?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 유다에게 나귀를 타고 촐랑거리는 예수의 모습은 그가 그리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카리스마 가득한 메시아와 그를 따르는 늠름한 제자들, 그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유다를 꿈꾸었던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던가? 핍박을 받아온 세월을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에서 권세 좀 누려보자는 것이 죄인가?

미천한 여자와 사랑? 한심한 추문!

마리아가 향유가 가득 든 항아리를 안아 기름을 그 사람의 머리에 부어 그 사람의 몸이 흠뻑 젖었습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앉아 자신의 머리칼로 그 사람의 젖은 발을 정성스럽게 닦더군요. 참으로 묘한 광경이었기에 저는 너무 화가 나서 무례를 범하지 말라고 그 자매에게 소리쳤습니다. 제가 호되게 꾸짖자 그 사람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꾸짖지 말라. 이 여인은 내게 아주 좋은 일을 해주었다. 가난한 이에게 돈을 베푸는 것은 너희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냐. 나는 더 이상 베풀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 여인만이 알고 있다. 이 여인이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한 준비이다."

말을 맺는 그 사람의 창백한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와 눈동자 색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묘한 기운이 느껴져서 저는 당황했고, 그 사람의 불그스름한 뺨과 살짝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 사람은 이토록 가난한 여인에게 사랑, 설마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그것과 비슷한 위험한 감정을 품은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그토록 무지한 여인 따위에게 잠깐이라도 특별한 사랑을 느꼈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문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유다의 고백'

유다의 염려를 이해한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은 동서양을 불문하지만 그의 스승에게는 절대 적용되어서는 아니 될 보편이다. 완력을 쓰는 영웅이야 호쾌함과 담대함이 미덕이니 색을 밝히는 것도 어울릴 법한 일이지만 신앙을 전파하는 거룩한 메시아가 정욕에 매달린다는 것은 그에게 용납될 수 없는 문제다. 더군다나 그의 어머니가 동정녀임에랴. 스승의 발을 향유로 씻기는 여인의 행위는 유다의 인식틀에서는 섹슈얼리티요 페티쉬에 다름 아니다.

자기가 모시는 스승과 주군이 다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일은 대단히 흡족한 일이다.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무언가를 도모하는 자들에겐 천군만마와도 같다. 그러나 특별한 소수의, 또는 단 한 명의 사랑과 흠모가 존재하게 되면 그들의 거사에는 막대한 리스크다. 게다가 접근자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자라면 조직의 결속력은 와해될 공산이 크다. 유다의 우려는 거기에 있을 터이지만 그가 여러 차례 혈기방장한 서른네 살의 스승과 본인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섹슈얼리티를 두고 경쟁을 벌이는 두 수컷의 긴장을 보는 듯하다. 거룩한 일에 하찮은 일 따위가 무슨 가당치 않은 일이냐 생각하겠지만 역사의 고비마다 거대한 흐름을 바꿔놓거나 일을 망가뜨리는 지점에는 늘 사소하고 옹졸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끼어있었다.

궂은일은 모두 내가? 부당한 차별!

베드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 요한, 도마 같은 얼간이들 집단은 그 사람의 뒤를 졸졸 뒤따라 걸으면서 소름 끼치는 달콤한 아부를 늘어놓고 천국이네 어쩌네 하며 열광합니다. 그 천국이라는 곳이 가까워지면 한자리씩 꿰차기라도 할 셈인 건지.

저는 군중들에게 몰래 헌금을 걷고, 마을 유지들에게서 곡물을 얻어 잠자리에서부터 먹을 것, 입을 것까지 번거로움을 마다치 않고 돌봐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물론이고 그 얼간이 제자들까지 제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가 없더군요.

먹을 거라고는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전부였을 때도 그 사람은 눈앞의 군중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고, 그러면 제가 뒤에서 고생스럽게 변통을 해서 명령받은 만큼의 음식을 겨우 구해 오곤 하는 식이었습니다.다자이 오사무, '유다의 고백'

유다의 상심을 이해한다. 어떤 일에든 궂은일은 있고 항상 그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 궂은일은 빛나지 않고 묻히게 마련이다. 메시아는 아름다운 설교를 하고 똑똑한 제자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군중 앞에 얼굴을 내밀지만 누군가는 밥을 준비해야 한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각지를 떠돌며 가난한 백성들을 만나야 하는 무리들에게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며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다. 유다는 상인이었기에 그 일을 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고 그 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고생한 만큼의 보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열두 손가락 중에서도 유독 아픈 손가락들이 예수에게 있었던 것일까? 틈만 나면 스승은 베드로와 시몬의 가난함을 상기시키고 요한과 야고보의 가엾음을 호소함으로써 재주가 비상한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유다는 확신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했던가? 떡을 만지면 떡고물이 묻어 손을 더럽힌다고 하듯, 유다의 손에도 떡고물이 묻고 비린내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는 그 궂은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궂은일에 대한 보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유다는 몰라주는 섭섭함과 차별하는 억울함이 섞여 스승에 대한 분노가 겟세마네의 표고를 넘어서고 있다.

토라짐과 열등감이 빚어낸 남자의 배신

어서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벌해주십시오. 그를 붙잡아 몽둥이로 때린 다음 옷을 홀딱 벗겨 죽이는 것이 좋겠군요. 저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나쁜 놈 입니다. 지독한 놈이지요. 지금까지 저를 이렇게나 괴롭혀 왔습니다. 하하하하.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이제 유예기간은 끝났다. 어차피 그 사람은 죽을 거야. 내가 하자. 지금까지 내가 그 사람에게 바쳐온 일편단심의 애정에서 우러나온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다. 한결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나의 이런 행동을 누가 제대로 이해해 주겠는가. 내 사랑은 순수하다. 사람들의 이해를 얻기 위한 사랑이 아니다. 그런 천박한 사랑이 아니다. 나는 영원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겠지. 그렇지만 이 순수한 사랑의 탐욕 앞에서는 그 어떤 형벌도 지옥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밤, 그 사람과 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있는 광경을 꼭 지켜봐 주십시오.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과 동갑입니다. 저도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젊은이지요. 다자이 오사무, '유다의 고백'

제자는 스승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본다. 유다가 꿈꾸는 세상은 예수의 그것과 다를까.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 유다에게 나귀를 탄 예수의 모습은 그가 그리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제자는 스승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본다. 유다가 꿈꾸는 세상은 예수의 그것과 다를까.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 유다에게 나귀를 탄 예수의 모습은 그가 그리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한 남자가 스승을 팔아먹고 친구들을 배신했다. 역사와 종교는 유다의 배신을 재물에 눈먼 욕심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단정하고 그를 배신자요 악마의 하수인으로 배치했다. 하지만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언(傳言)일 뿐 팩트가 무언지는 불분명하다.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는 유다의 고변과 고백을 통해 그의 배신의 기저에 물리적 요인보다는 심리적 계기가 있었음을 주장한다. 번지르르한 퍼포먼스를 연출하지 않고 추레하게 나귀나 타는 쫀쫀함에, 짜잔한 여자 하나를 두둔하는 왜소함에, 사람 차별하고 공치사 하나 없는 '째째함'에 실망한 남자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죽여버린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 남자가 권력을 팔아먹고 신의를 배신했다. 부패한 정치와 타락한 언론은 전직 검찰총장의 변신을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다 쫓겨난 의인(義人)으로 배치하고 그의 미담을 읊어대지만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전언(傳言)일 뿐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한때 그는 임명권자를 존경한다 했고, 임명권자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에 시비를 걸지 않았으며, 공직에 봉사하는 자신의 근면함에 보상을 바라거나 우쭐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상인의 덕목에 충실했던 유다는 돈을 탐했다지만 검사의 덕목에 충실했다고 자처하는 전직 검찰총장은 무엇에 탐닉했던가? 사랑받지 못했다고 삐지고, 대접받지 못했다고 토라진 남자가 자기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며 스스로 메시아가 될 야망을 품고 자신의 지지자가 어디에 있나 ‘도리도리’ 찾느라 고개가 분주하다. 가리옷의 유다는 스승을 배신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기가 횡렬한 땅에 육신을 묻고 그의 이름 앞에 오욕의 성(姓) ‘가리옷’을 달았다. 신의를 횡렬한 서울의 유다는 제 이름 앞에 무엇을 달게 될까? 이스가리옷(iscariot)?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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