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 K 법정
도덕이 결여된 법치(法治)는 비극을 부른다
[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 K 법정
평온한 아침을 급습하는 근면한 국가의 공권력
"누구신가요?"
K는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의 출현을 잠자코 받아들이라는 듯이 K의 질문을 묵살하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이 벨을 울렸소?"
"아침식사를 가져오라고 울렸는데요."
"아침식사를 가져다 줬으면 한대."
그러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옆방에서 울려왔다.
"그건 안 됩니다."
"옆방에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 봐야겠소. 그리고 도대체 왜 이런 소란을 피우는 건지 그루바흐 부인의 해명을 들어야겠소."
"여길 떠날 수는 없소. 당신은 체포된 거요."
카프카, '소송'
선량한 서른 살의 남자가 어느 날 아침 자기 방에서 체포되었다. 이 남자 요제프 K는 무슨 혐의로 피의자가 되었을까? 그의 평온한 아침을 기습한 당국의 체포는 피의자의 불안을 잠재울 정도로 친절하지 않았으며, 이 불친절하고도 위압적인 심문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서른 해를 사는 동안 단 한 번의 불법적 행위도 한 적 없고, 단 한 번의 불온한 마음 품어본 적 없던 K는 당혹 뒤의 불안과 불안 뒤의 짜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건전한 사회는 선량한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이 없는 법, 물리적 공권력을 동원하여 신병을 확보하려 하지도 않았고 강제적 수단으로 신체를 구속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K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념은 파시즘(fascism)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를 방문한 공무집행자들은 체포의 사유만 언급하지 않았을 뿐 합법적으로 심문했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피의자에 대한 기소를 알리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K의 가슴에 남는 불안한 기류의 원인은 무엇 때문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너에게 절대 알려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제가 체포된 겁니까?"
"우린 그런 말을 해줄 입장이 아닙니다. 당신 방에 돌아가 기다리세요. 소송이 일단 시작되었으니 때가 되면 다 알게 됩니다."
이들은 대체 어떤 자들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어느 기관 소속일까? 그렇지만 K는 법치국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나 평화가 지배하고 있고 모든 법률이 엄연히 존속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남의 집에 쳐들어와 그를 덮친단 말인가?
"내가 체포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더군다나 이런 식으로 말이오?"
"우리는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요."
"이게 내 신분증이오. 이젠 당신네들 것을 보여주시오. 먼저 체포영장 좀 봅시다."
"우리가 근무하는 상급 관청이 이런 체포 명령을 내리기 전에 체포의 사유와 체포 대상자의 신원에 대해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 거기에는 착오는 있을 수 없소. 우리 관청은 주민들의 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게 아니고 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죄에 이끌려서 우리 감시인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이게 법이라는 거요.” 카프카 <소송>
‘당신을 도로교통법과 출입국관리법 위반죄의 현행범인으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에르네스토 미란다라는 히스패닉에게서 유래된 이른바 ‘미란다 원칙’은 공권력에 의해 체포되는 시민의 인권을 최소한으로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상국가에서는 수용해야 할 보편적 준수사항이라는 게 상식이다.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자유를 누리던 내가 일시적인 자유를 제한당한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은 아니기에, 내가 어떤 혐의로 체포되는지와 이런 경우에 어떤 행위가 나를 손해 또는 이익을 보는지에 대한 간략하고도 명료한 언어로 압축한 것이 위에 인용한 ‘미란다 원칙’이다.
근대의 법은 국가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탄생하고 발전되어 왔지만, 또한 개인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을 통해 민주적으로 정착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 국가는 지배층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지극히 편의적으로 법을 이용했다. 필요에 따라 인신을 구속했고, 상황에 따라 신체를 고문했으며, 기분에 따라 형인을 석방했다. ‘네가 네 죄를 알렷다?’로 상징되는 봉건적 심문 기술(?)은 사실 근대화가 더뎠던 동방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만 벌어지던 일이 아니었음은 명확하다.
요제프 K가 평온한 아침을 맞은 뒤 자기 방에서 안락한 체포를 당했다고 해서 공권력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여기면 오독(誤讀)이다. 카프카의 이상한 상황 배치는 다른 목적을 위해 의도한 것일 뿐, 가엾은 K는 평화로운 침실에서 체포되고 구금됨으로써 더욱 증폭된 ‘역설의 통증’을 느낀다. 무지(無知)는 공포의 핵심이다. 본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체포되고 기소된다는 것은 주체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공포다.
어디에서 재판을 받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율리우스 거리에 도착하자 거리 양쪽으로 빈민들의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건물은 상당히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정문은 높고 널찍했다. 아마도 안뜰에 물건을 실은 화물 차량들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K는 심의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계단 입구에 '재판소 사무실 입구' 라는 푯말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 허름한 임대주택에 재판소 사무실이 있다는 말인가.
( ... 중략 ... )
어느 저녁, K가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는데 창고 같은 공간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벌컥 열게 되었다. 방 안엔 세 명의 남자가 서있었다. 두 남자를 채찍으로 때리고 있던 남자는 가죽옷 차림이었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여보시오. 당신이 예심판사한테 비난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매를 맞고 있는 중이오."
K는 그들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카프카, '소송'
두 눈을 가린 디케(Dike)의 위압적 신상이 상징으로 모셔진 근대의 재판소는 그 자체로 위압적이지만, 기소를 당한 모든 피고인들은 디케를 바라보면서 적어도 자기를 심판하는 판관이 두 눈을 가린 인간은 아닐 것으로, 신상의 뜻은 받들지언정 신상의 이미지를 내면화한 불구의 소양을 가진 인간은 아닐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선량한 시민들에게 법정과 재판소는 멀면 멀수록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왕 어쩔 수 없이 소송을 당한다면 위압적이지만 번듯한 건물의 법정이 다소나마 불안을 줄여줄 수 있으리라.
K의 법정은 어디인가? 그는 단 한 번도 그럴 듯한 법정에 들어간 적이 없다. 법정은 고사하고 디케의 신상을 구경한 적도 없다. 요제프 K를 기소한 공권력은 그의 거처를 심문하는 자리로 사용하고, 허름한 다세대 주택을 재판소로 지정하며, 삐걱거리는 그 집의 계단을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어두운 다락방을 공판 서류를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한다.
짐이 곧 국가이고 짐이 곧 법이던 시절에는 짐이 머물던 정궁(正宮)이 재판소요 법정이지만, 왕의 행차에 따라 재판소는 행궁(行宮)에도 설치가 되고 법정은 이궁(離宮)에도 자리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공평무사를 자랑으로 여기는 근대의 법은 재판소의 소재지를 법률로 정함으로써 장소에 따라 들쭉날쭉 달라지는 법 적용의 위험을 애초에 차단해버렸다. K의 법정은 율리우스의 거리에도 있고 빈민가의 다락방에도 있어 다소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자유가 권력에게만 부여될 때 개인은 바로 악몽이다. K의 불면은 박명같은 승소(勝訴)를 선고할 법정의 부재에 기인한다.
누가 너를 심판하는지 너에게 결코 말해줄 수 없다
화가는 죄가 없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고 말했다. 화가의 말에 K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K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법원이 별 것도 아닌 것에서 죄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K는 화가가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정말 확신을 갖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무관심으로 그러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화가는 K에게 공개적인 법정이라면 사건의 번복이 힘들겠지만 법정의 배후, 즉 회의실이나 복도, 여기 이 화실과 같은 곳이라면 소송에 관한 흥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변호사도 말했듯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판사들을 주무를 수 있다면, 허영심 강한 판사들과 화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고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중략 ... )
K는 신부 곁에 바짝 붙어 걸어야 했다. K는 출입구가 어디쯤인지 물었다. 그러자 신부는 벽을 따라 걸어가면 나올 테니 혼자서 가보라며 K를 떨어뜨려 놓았다. K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지자 당황하면서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신부는 자신은 재판소 신부이고 재판소에 속해있으니 K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은 없다고 말했다. 재판소 역시 K에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K가 오면 받아들이고 가면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카프카, '소송'
요제프 k의 심판자는 누구인가? 소송은 기소와 재판으로 이루어진다. 당국에 의해 고발된 k는 심문다운 심문과 수사다운 수사도 받지 못한 채 기소되어 바로 법정에 선다. 피의자에 대한 고지 의무와 심문에 태만한 감독관과 그의 식량과 의복을 편취(騙取)하려는 감시인, 독직폭행(瀆職暴行)을 일삼는 태형관(笞刑官), 공정성을 상실한 예심판사, 부화뇌동하는 배심원들이 K가 만난 소송 과정의 모든 당국자들이다. 기소와 재판에서 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보인 법조인을 K는 단 한 명도 마주하지 못한다.
법원 정리(廷吏)의 아내가 법정 견학생과 놀아나며 하찮은 조언을 하고, 변호사의 간병인이 의뢰인과 사통하며 쓸모없는 충고를 하고, 판사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불법적인 변호를 하는 상황은 소송에 문외한인 K를 무척 당혹스럽게 한다. 변호사는 충실한 변호와 소송의 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무의미한 청원에만 매달리고, 법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한 신부는 법의 존재 이유와 공정성보다는 형식적 법리 해석과 편의적 법 적용을 종교인답지 않게 강조하여 또한 K를 당황하게 한다. 그의 소송을 지원할 정상의 법조인은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죄로 처벌되는 시민들
나태와 조롱, 협박과 방치로 일관한 당국은 서른한 살 생일을 하루 앞둔 저녁,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납치하듯 K를 끌고 간다. K는 서른한 살의 태양을 보지 못한다. 서른 살의 생일 아침에 체포된 이후 만 1년 만에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이 말을 명백히 틀린 말이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적이 없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에게 사형을 판결한 판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를 처형한 곳도 형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심원의 판결과 판사의 선고도 없었으므로 K는 최후의 발언을 할 기회도 얻지 못했고, 사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지도 않았기에 시신을 보전하지도 못했다. 누가 그의 영혼을 위로할 것인가?
K의 법정은 K에게는 공포와 저주이며 불행이고 비극이다. K의 법정은 오직 문학일 뿐인가? 불운하게도 우리는 K의 법정과 흡사한 ‘K 법정’을 가까이 두고 있다. ‘K Pop’에 포괄된 온갖 ‘K’들이 세계를 누비며 한껏 국위를 선양하는 가운데 제발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K’들도 우후의 죽순처럼 돋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독초는 ‘K 법정’이다.
오랜 세월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차지해온 검찰은 도덕과 윤리에 맡겨야 할 문제를 프론티어 정신을 발휘하여 스스로 판단하겠다고 덤비는가 하면, 도덕과 윤리에 맡겨서는 안될 어떤 일들은 남용의 폐해와 자숙의 미덕을 들어 갑주에 대가리를 처박은 자라 마냥 외면하기도 한다. 불리한 증거는 위생학적 관점을 차용하여 깨끗하게 인멸하고, 유리한 증거는 세균학적 실험을 원용하여 두둑하게 배양하는 짓을 그들 법조의 덕목으로 삼는 듯하다. 법의 마지막 수호자라 자임하는 법원과 판사는 정치와 외교에 맡겨야 할 문제를 스스로 행정부가 되어 국제질서를 염려하고 한국경제를 걱정하여 판결한다. 논리가 빈약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경우엔 피고인을 훈계함으로써 면피를 도모하고, 구태를 저버리지 못하는 판결을 내려야 할 때엔 아름다운 전통과 오랜 관습을 끌어옴으로써 억지를 상쇄한다. 오늘날 K 법정의 민낯이다.
요제프 K는 31세의 생일을 몇 시간 앞두고 무고하게 처형되었다. 하얀 달빛에 반사된 하얀 칼은 가슴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그의 심장을 도려내었다. 떨리는 심장으로 인해 불안한 나날을 보낸 요제프는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완전하고도 평화로운 안식을 얻었을까? 역설의 안식에 위로받아야 하는 우리들은 매우 불행한 시민들이다. ‘도덕성이 배제된 법은 쓸모가 없다’고 했던가? 법이 존재해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을 망각하고 법 자체를 숭배하는 자들이 그 빛나는 의미를 알 턱이 없건만, 책상에 앉아 줄줄 외우기 좋아하는 그들의 습성을 아는지라 달달 외어 멋 부리는 데나 쓰시라고 남의 언어로 된 경구를 두 개씩이나 애써 선물한다.
Leges sine moribus vanae.
Laws without morals are in vain.
김시인 (소피움 인문연구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