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리 어매들의 그림속 인생 -09] 양양금
한 색으로만 칠하는 게 아심찮아서, 색동옷 입히듯 칸칸 나눠서 고운 색이란 색은 다 칠하고 싶었던 마음. 지붕이 색색이 곱다. 어린 시절의 고향 집을 그린 양양금(76) 어매.
“방 두 개짜리 째깐 오두막집이었제. 내가 고운 것, 얼룽덜룽한 것, 새뜩한 것을 좋아혀. 물짠 집에 살았지만 기림이라도 이삐게 기릴라고.”
복닥복닥 살았다.
“우리 성제간이 열 남매여. 내가 두째인디, 동생들 다 봤어. 업어서 다 키왔어. 큰 언니는 있어라도 인공 때 아들 잃고 노인들만 살던 외갓집에 보내불어서 내가 큰언니 노릇을 했제.”
“시방 생각하문 그때 나도 애긴디 그 째깐한 등거리에다 동생들을 업어서 차례차례 다 키왔어. 전에는 옷이 넉넉하요 어쩌요. 빤스 한나도 활발하게 입들 못하던 시상인디, 동생 업어서 둥개둥개 까불고 있다가 오줌 싸불문 속옷까지 다 젖어불고. 날마동 모를 새가 없어. 동생 야답(여덟) 중에 막둥이 두 개는 친정어매가 나를 여우고 나서 났응께 그 둘을 빼고는 다 내 등거리 맛을 뵈이고 키왔제.”
놀 때도 일할 때도 늘 동생을 업고 살던, 동생의 무게에 익숙해져 살았던 그 시절의 어리고도 의젓한 누나 언니들이 떠오르는 말씀. 째깐한 등거리로 감당해야했던 삶의 무게일 수도 있으련만, ‘등거리 맛’이란 말에 실린 마음은 아무 생색 없이 다숩다.
“이날 팽생 하루를 쉬어본 적이 없어”
옥과 무창리가 어매의 고향. 눈이 펄펄 날리던 날, 20리 길을 걸어 시집왔다.
“시집오던 날 눈이 몸썰나게 많이 왔어. 전날에는 날이 좋았는디 어매가 새복에 일어나선 아고야야야 어찌끄나 어찌고 가끄나 걱정시런 소리를 하더니 니가 잘 살라고 눈이 이러코 많이 왔는갑다 그래. 절름절름 물팍이 다 닿게 많이 왔어. 어매가 시긴 대로 부엌에 가서 솥단지 뚜껑을 뒤집어놓고 (인자 이 집 밥 안해묵고 이 집 식구가 아니다 그 뜻인갑서) 어매가 쥐어준 양산 쓰고 집을 나섰제. 신랑 앞에 세우고 눈밭에 풍풍 빠짐서 이십리 길을 걸어왔어. 새각시 티도 안나게 치매를 허리끈으로 둘러 뭉끄고 아랫터리를 다 멍치고 왔제.”
그때 각시는 열여덟 살이었고 신랑은 스물한 살이었다.
“시아바니는 탄광 모집 가서 돌아가셨다그래. 징용 갈때 우리 아자씨는 째깐 애기였제. 7월에가 돌인디 인자 돌이 돌아올라고 한디 시아바니가 시어무니한테 ‘애기 잘 키우소’ 하고 가갖고 여영 못 오셨다더만. 몇년을 돌아가신 중도 모르고 소식을 모르고 살았는디 곡성서 함께 갔던 사람이 와서 죽은 날짜도 갈쳐주고 글더래. 나는 가난해도 어매아부지 밑에서라도 컸는디 우리 아자씨는 아부지 소리를 한번도 못불러보고 그전에는 사진도 뭣도 암것도 없응께 아부지 얼굴도 모르고 컸제. 고것이 너모 짠해. 긍께 서로 짠한 중 알고 서로 애껴감서 살아야제.”
자신의 고생보다 남편 고생에 먼저 측은지심이 가닿는 어매.
“우리 아자씨는 나 시집 안와서 7년을 놈의집 머슴 살고 나 시집와서 7년을 또 놈의집 살고. 일을 말할 수도 없이 힜어. 이날 팽생 하루를 쉬어본 적이 없어.”
방앗간 일도 마흔 해를 했다.
“우리 아자씨는 방애실 할 때도 바닥에 곡식 한 톨만 떨어져도 기언치 다 씰어담아. 허퉁버퉁이 없어. 없이 살아와갖고 그 정신이 백였어.”
없이 살아도 닳지 않고 잘 간수해 온 것은 그런 정신과 마음.
“마음을 곱게 쓰고 살아야제. 부모가 마음이 궂으문 자식들한테 안 좋아. 놈한테 물짜게 하문 내게도 좋을 일이 없어. 놈을 찍어서 물에다 널라문 내가 몬자 빠져. 우리 새끼들은 허튼짓 안하고 다 착실혀. 놈한테 가서 쌈박질 한번 안하고 못된 짓 안하고.”
“나도 우리 아자씨도 배고픈 설움을 알아”
방애실을 하던 시절, 끼니때 되면 어매는 꼭꼭 밥을 차려냈다.
“손님이고 장사꾼들이고 내 집에 온 냥반들한테는 때 되문 기어니 내가 밥을 채려드렸제. 우리 시어마니도 항시 나를 갈쳤어. 쌀이 없으문 고구마라도 삶아서 대접하라고. 애려서 하도 곤란하게 살아놔서 나도 우리 아자씨도 배고픈 설움을 알아. 그것이 상설움이제. 젤로 큰 설움. 긍께 방애실에 온 사람마다 막걸리도 드리고 밥이랑 반찬이랑 채래드리고 그랬어.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을 배를 고파갖고 보내문 안되제. 반찬 없이는 못 채래드린께 옥과장에 가서 배추를 다발로 사서 이고 오고 그랬어. 지금도 유재 마을 아짐들을 만나문 그 말을 해. 우리 방애 찌러 가문 지비가 밥을 채래줬는디 그 밥이 그리 맛났다고, 그때가 엊그저께 맹기네 그래.”
어매는 근처 금호타이어공장에서도 오래 일하고, 다라이장사도 많이 했다.
“전에는 헐 것이 없어. 긍께 복숭아장사도 했어. 무건지도 모르고 이고 폴고 댕갰어. 복숭아 이고 치매 딸딸 걷어올리고 시퍼런 물도 건너고 컴컴한 굴도 지내고 ㅤ몇리고 걸어서 가. 시째를 배갖고도 배는 이러코 불러갖고.부른 배가 고프문 더 고파. 어떤 집을 들어선께 아짐이 복숭은 못 산디, 조깨 쉬어갖고 밥을 묵고가시오 그러더만. 고마왔제. 근디 옆에 있던 아짐이 날 보곤 밥 안묵고도 배부르구만 그래. 안묵고 나와붓서.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드캐. 놈의 가심 아프게 할 못씰 소리는 안하고 살아야써.”
복숭아 장사 다니던 그때도 어매의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인지까 걸어온 길은 너모나 힘들었제.”
하지만 그 무엇을 그리든 그냥 고와져버리고 마는 어매의 손길과 마음. 복숭아 이고 치매 걷어올리고 힘겹게 건너던 물도 졸졸 명랑한 노래 부르며 흘러가는 듯하고, 한없이 컴컴했을 굴도 분홍빛으로 환하다.
“꽃을 좋아한께 그림마다 꽃이여”라고 말하는 어매. 꽃천지다. 고생도 설움도 다 지우고 그 위에 다만 선량한 웃음과 인정을 피워낸 부부의 얼굴 같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