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영화읽기] 모비딕
‘모비딕’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음모론영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영화다.
‘음모론’이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쉬운 예로 ‘존 F 케네디 암살 배후설’과 ‘9·11테러 미국 정부 자작설’이 있다. 음모론이 자주 제기되는 미국은 세태를 반영하여 음모론 소재의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만들어진다. 몇 편만 언급해 보자면, ‘LA 컨피덴셜’ ‘컨스피러시’ ‘J F K’ ‘다빈치코드’ 등은 대표적 음모론영화들이며,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나 ‘마이클 클레이튼’ 등도 음모론과 관련이 있는 영화들이다.
한국 역시 비근하게 음모론이 제기되는 나라다. 그 중 ‘김현희(마유미) KAL기 폭파사건’이나 작년에 일어났던 ‘천안함 침몰사건’은 정보 차단의 정도가 심하여 지금도 그 궁금증이 남아있는 경우이다. 작년의 ‘천안함 침몰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등장한 ‘모비딕’은 그 타이밍이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한데 문제는 이 영화가 관객들이 원하는 대한민국표 음모론 영화의 모범을 보여 주었는지는 의문이다.
1994년 경기도 인근의 발암교라는 다리가 폭발한다. 정부는 북한의 소행이라고 여론을 몰아간다. 이에 신문사기자들은 팀을 이루어 진실을 파헤치려 하고, 이들이 진실에 접근해 갈수록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 뼈대이다.
‘모비딕’은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에서는 막힘이 없다. 영화의 첫 쇼트는 폐쇄회로를 통해 장시간 동안 발암교를 보여주다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교각이 폭발하면서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안겨주며 시작한다. 영화는 이내 사건을 조작하는 검은 그림자의 음모에 맞서 열혈기자들이 진실을 파헤치는 필사의 여정이 이어지고, 이 와중에 불법사찰내용이 담긴 디스켓을 들고 도망친 내부고발자를 배치하며 나름 정교한 플롯을 구성해 낸다.
문제는 ‘1994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이 영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1994년은 김일성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가 있었던 해로 혼란스런 시국이었고, 이때부터 PC통신이나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지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변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박인제 감독은 바로 그 ‘1994년’이라는 해가 영화 속에서 캐릭터처럼 보여지기를 갈망한다. 하여 인물들은 삐삐로 호출받고 공중전화로 향하며, 도시의 골목은 90년대 중반으로 보여지기를 의식했으며, 단관극장의 상영시간에 맞춰 인물들은 접선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다. ‘모비딕’은 ‘1994년’이라는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영화이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소급하게 하는 대목이다. ‘살인의 추억’이 80년대 중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묘사를 통해 관객들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면, ‘모비딕’이 재현한 90년대 중반의 시공간은 영화에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직접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1994년’일 이유가 부족해 보인다. 숨 막히는 진실공방을 담아내는 음모론 영화의 요소로서 90년대 중반의 공기는 거추장스럽다. 인물들이 삐삐를 치고 전화를 걸러 가는 시간의 긴장감을 견디기에는, 관객들의 영화 체감의 속도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시간을 아껴 검은 그림자의 거대한 위협의 세계에 공을 들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또한 ‘모비딕’은 대중영화로서의 통쾌함도 안겨주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이방우(황정민) 기자는 음모론의 밑바닥까지 파헤치지 못하고 진실을 견인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감독의 영화적 자의식이 대중영화 그 이상을 열망했지만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것도 이유이다. 이쯤 되면 ‘모비딕’이 한국영화에서 첫 ‘음모론 영화’라는 꼬리표를 달기에는 무색해질 법도 하다.
조대영 <영화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