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영화읽기]비우티풀

2000년, 멕시코시티를 질주하는 영화가 세계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모레스 페로스’가 바로 그 영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이하 이냐리투)는 이후 자신의 영화속 공간을 세계로 확장했다.

`21그램’은 미국의 멤피스를 무대로 했고, `바벨’에서는 미국과 멕시코, 일본과 모로코를 오간다. `비우티풀’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변두리이다.

먼 이국에서 바라보기에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의 바다와 햇살을 만끽할 수 있는 낭만의 도시를 연상할 수 있다. 허나 `비우티풀’이 묘사하고 있는 이 도시는 잿빛이다.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이 활보하는 엘 라발 지구는 더럽고 후미지며 음성적인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의 이야기가 인물들의 개인적인 고통에 국한한 서사였다면, `바벨’과 `비우티풀’은 전 지구적인 차원의 세계진단으로 나아간다.

`바벨’은 4개국의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연출하면서, 계급문제와 인종편견 그리고 테러리즘을 드러냈던 영화였다.

`비우티풀’은 `바벨’의 문제의식보다 더 직접적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세계의 민중들이 더 비참해지고 있음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응시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의 뒷골목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중국인 밀입국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하다가, 난로에서 새어 나온 가스에 질식해 떼죽음 당한다.

또한 아프리카계 밀입국자들은 노상 판매를 하다 경찰에게 쫓긴다. 그들은 제 한 몸 누울 곳을 찾아 이곳에 왔지만 방 한 칸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영화는 제3세대 이주민들의 위태롭고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냐리투의 관심사는 한없는 어둠 속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세계의 비참에 관해서이다.

그 어둠의 복판에서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인력 브로커로 살아간다. 그는 짝퉁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인과 그 가방을 파는 아프리카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뇌물상납과 중계를 알선하는 일을 한다.

말 그대로 쓰레기같은 삶이다. 그렇다고 그의 심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가슴 한쪽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비천한 직업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준 것인지도 모른다.

`비우티풀’의 서사가 욱스발과 이주민들의 불법적인 일상이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면, 또 다른 축은 욱스발의 가족과 연관된 이야기이다.

욱스발에게는 두 자녀와 아내가 있다. 아내인 마담브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기에 자식들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고, 자녀들은 중국계이민자인 `리리’나 세네갈에서 온 `이헤’ 사이를 오가기 일쑤다. 이 와중에 욱스발은 말기암 판정을 받아 죽음을 앞둔 상태로 심란한 마음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똑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그 내용은 삼대 째 이어지는 비극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욱스발의 아버지는 프랑코 정권 시절에 억압을 피해 도망치다 죽음을 맞이했다. 욱스발은 아버지를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으며, 욱스발은 어떤 보살핌도 없이 자라난 사내였던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욱스발과 자신의 자녀들의 운명 역시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간직했던 전 재산을 세네갈 여인 `이헤’에게 맞기며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긴 했지만 그녀가 지켜 줄지는 미지수다. 그녀 역시 젖먹이 아이를 키우는 데 힘이 부칠 것이기 때문이다.

`비우티풀’은 세계의 비참을 직시하는 영화이자, 계속해서 실패하고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자리에 관한 영화이다. 조대영<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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