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을 향한 찬사, 최면적 감동의 세계
‘늑대 아이’의 판타지는 수인 아닌 모성

 ‘늑대아이’는 분명 판타지일 뿐인데, 왜 이 윤리의식의 부재가 이토록 걸리는 걸까. 우리가 주인공을 보고 ‘싱글맘’이라는 현실의 집단군을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늑대아이’는 분명 판타지일 뿐인데, 왜 이 윤리의식의 부재가 이토록 걸리는 걸까. 우리가 주인공을 보고 ‘싱글맘’이라는 현실의 집단군을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호소다 마모루가 신작을 냈다고. 그가 칸에서 한 인터뷰가 화제가 됐길래 내용을 살펴보니 흥미로웠다. 대충 일본 거장 하나를 저격해 평가하기를, 매번 어린 여성을 히로인으로 삼는데 남자로서 자신감이 부족한 탓 아니냐는 비꼼 가득한 발언. 말 자체로는 여성 혐오 가득한 현 일본 애니계를 꼬집는 일갈로 훌륭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호소다라는 것에 복잡한 심정이 든다.

원작이 있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제외한 그의 작품들 속 히로인, 그리고 여성관은 뭐랄까. 평화롭게 쓰레기나 줍고 다니시는 하야오의 은퇴를 더 가슴 아프게 만드는 면이 있기에.

언급한 거장이 미야자키 하야오냐 신카이 마코토냐 갑론을박이 있지만, 설마 하야오일까 싶다. 지브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싫지만 하야오가 다른 일본 애니 감독에게 여성관 비판을 들을 사람은 아닌데.

의문을 뒤로하고,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워딩은 여성서사와 PC주의였다. 요지는, 지나친 도덕주의로 창작자들이 여성 캐릭터의 고난과 불행을 다루기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묘사를 하지 않고, 그것이 결국 여성서사를 단순 납작하게 만들며 진취적 히로인의 탄생을 막는다는 지적. 이 부분은 문화 소비층인 나도 여러 고민을 하는 주제라, 생각도 정리할 겸 오랜만에 호소다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게 본 늑대아이를 다시 봤다.

묘사의 태도, 관음 아닌 관찰

고난을 때려 붓는다고 캐릭터가 생동감 있어지는 건 아니다. 현실에 없는 어머니를 만들어낸 이 영화가 대표적 예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서사적 완성도는 논외로 하고 윤리적 측면을 고민해 본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다.)

약자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 때, 창작자는 도덕적 조심성이라는 핸디캡을 얻는다. 어떤 창작자들은 그게 몹시도 불만일 것이다. 그러나 열악한 현실을 편견 속에 살아가기도 벅찬 이들은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 영감의 대상까지 되어버린 셈.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 또한 문화를 향유하는 대중이자 소비층이다. 쉽게 말해 ‘눈치를 봐야 하는 집단’인 것이다. 가끔 많은 창작자들이 이 사실을 잊는 것 같다.

작품 속에서는 캐릭터 한 명이나, 그걸 보는 현실의 관객들은 좋든 나쁘든 그 캐릭터가 대변하는 모집단에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창작의 기능이자 위험이다. 따라서 창작자는 캐릭터를 만들고 서사를 꾸릴 때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 당연한 소리.

그렇다면 약자의 불행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까? 현실에서도 충분히 고통 받는 것을, 묘사만으로도 비윤리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극단적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라며 비난을 받는다. 난 호소다의 여성관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의 인터뷰 주장 자체는 동의를 한다. 하지만 창작자는 적어도 염치가 있어야 한다. 약자의 불행을 다루면서도 윤리를 지키는 방법은 많다.

우선, 고난을 묘사하는 태도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관음하지 않는 카메라’다. 창작자는 캐릭터의 모델이 된 대상의 삶을 입맛대로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의 기본은 관음 아닌 관찰. 어려운 일이다.

캐릭터의 불행이 가진 오락적 측면은 나도 즐기곤 한다. 고난의 강도가 셀수록, 성장 혹은 각성한 뒤의 살풀이가 더 짜릿해진다. 지브리를 보고 자란 여자아이는 세상 때 묻고 길티플레저나 잔뜩 만들었던 거다. 아무튼. 그래서 현실, 특히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일수록 이 윤리를 빡세게 지켜야 하지만, 판타지의 영역에선 좀 더 자유로워도 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분명 판타지다. 늑대인간과 결혼해 늑대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자의 이야기가 판타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해서 좀 자유로워져도 될 걸, 왜 이 윤리의식의 부재가 이토록 걸리는 걸까?

왜냐하면 우리가 주인공을 보고 ‘싱글맘’이라는 현실의 집단군을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장르만 판타지지 생활감 짙게 느껴지는 일상의 향연을 보며 경력단절 여성의 육아지옥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느끼는 게 결코 과민반응은 아니다. 감독 또한 하나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 현실 싱글맘들의 삶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적어도 ‘판타지인데 뭐 어때?’ 식의 쉴드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기혼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고난들을 하나하나 묘사 관전한다. 그 묘사는 과연 충실한 고증이 이뤄진 결과인가? 모든 창작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그 속에 담긴 관찰한 것과 놓친 것, 일부러 누락한 것을 본다. 모두 창작자의 가치관을 판단하는 재료들이다.

하나는 늑대인간 연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여 아이를 가진다. 영화의 장르가 공포라면 여기부터 본격 시작이다. 임신-출산 시퀀스에 주구장창 깔리는 솜사탕 선율을 모조리 걷어내 보자.

아이들이 늑대임을 들키면 안 되니 하나는 산부인과에 갈 수 없다. 임신한 여성에게 의료 서비스 사각지대에서 열 달을 견뎌 출산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탄도 절레절레할 공포일 텐데, 서점에서 자연출산법 책을 사들고 당차게 웃는 주인공. 체형도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가냘파 보는 관객마저 걱정한 가득으로 만들지만 입덧은 남편이 사냥해온 꿩고기로 잦아들고, 별다른 신체적 무리도 없이 평화롭게 아이를 품에 안는다니. 게다가 얼마 안 가 또 둘째요? 이 대목에서 생각했다. 아, 이건 판타지다. 남편이 늑대인 게 판타지가 아니라 이게 판타지다.

긍정적인 성격은 귀하다. 하지만 수동적 긍정은 어떤가. 더욱 괘씸한 건 이 나사 빠진 낙천성을 방패삼아 캐릭터가 겪을 수많은 고생을 합리화하는 태도다.
긍정적인 성격은 귀하다. 하지만 수동적 긍정은 어떤가. 더욱 괘씸한 건 이 나사 빠진 낙천성을 방패삼아 캐릭터가 겪을 수많은 고생을 합리화하는 태도다.

재밌는 점은 이 초반을 제외하면 이후에 펼쳐지는 인생의 수많은 고난들(사별로 인한 생활고, 독박육아, 경력단절 등)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다. 물론 이조차도 무저항적 낙관으로 어찌어찌 해결되는 솜사탕식이라 만만찮게 비현실적이지만, 아무튼 다루기는 하니. 그러나 임신 출산 고생은 아예 묘사를 안 했다 말해도 될 정도로 없다. 그저 아름다운 작화와 음악이 만든 감동스러운 ‘무드’만 있을 뿐이다. 산모를 주인공으로 할 때 유심히 관찰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일 텐데.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부러 보지 않은 것일까.

수동적 긍정, 현실을 기만

묘사의 태도가 충실한 관찰과 이해라면, 이제 캐릭터 조형과 서사 구성을 논할 차례다.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정답은 없다.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인 만큼 창작에서도 다양한 서사가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편협한 짓이 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 창작자는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도덕적 안일함을 피하려는 염치가 있어야 한다. 가상의 캐릭터라도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과 사람에게 이런 염치를 지키고자 할 때, 창작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서사적 루트들이 있다.

첫째 캐릭터에게 고난 자체를 벗어나는 결말을 주는 것이다. 단 그 동력이 타인의 도움이라면, 캐릭터가 그 타인의 울타리 안에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종속될 합리화를 피해야 한다.

반대로 캐릭터 스스로의 힘이라면, 그것이 보통 사람도 갖기 힘든 뛰어난 능력이나 성품이기를 지양하여 기만을 피하는 것이 좋다.

둘째, 자신에게 고난을 준 실체를 심판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서사적으로 힘들다면, 최소한 남의 입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가치판단하는 독립적 인격체로 그려낼 수는 있어야 한다. 고난만 취하여 메시지 전달의 재료로 삼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기깔나도 불행 포르노밖에 안 될 테니. 셋째,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서사를 주는 것이다. 단, ‘고난을 겪었으니 성장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제거하여 숨구멍을 만들 필요가 있다. 또 ‘성장에는 반드시 고난이 필요하다’는 해석 또한 배제하여 가스라이팅을 피해야 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중 하나라도 안 지키는 작품엔 무조건 철퇴를 내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걸 꾸역꾸역 다 지킨다고 무조건 좋은 작품이란 법도 없고. 하지만 적어도 깊게 고민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재밌고 감동적이어도 거부감이 든다. 늑대아이가 보기 힘들었던 이유다.

하나가 고난을 극복하는 방식은 신급의 긍정적 성격이다.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내며, 힘들어하거나 울긴 해도 단 한 번도 인간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추위에 몸이 얼도록 떨며 기다리게 한 연인에게 화는커녕 웃는, 팔자에 없던 자연출산을 하게 돼도 불평 않고 웃는, 하루아침에 명문대 자퇴와 독박육아에 내던져져도 받아들이고 웃는 여자는 없다. ‘만약 그런 여자를 만난다면 도망치십시오.’ 라고 끝나는 나폴리탄 괴담이면 몰라도.

자신에게 닥친 고난, 사회와 현실의 문제, 타인의 무례함. 하나는 한 번이라도 스스로 판단했는가? 뭐든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그녀는 쉽게 말해 의견이 없는 사람이다. “엄마 참 못났다, 그치?” “내가 모르는 게 잘못이야.” “실수만 한 걸.” 현실에선 아이 키우는 엄마의 자존감을 깎아내릴 뿐인 말들을 아무런 분노나 상처 받음 없이 웃는 얼굴로 되뇐다. 이는 근래 여성주의 창작물에서 자주 보이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류의 위로와 공감을 주는 대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르는 게 대체 왜 잘못일까? 아차, 부모의 무지가 아이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 해도 그 자기반성을 왜 아무 상관없는 타인인 동네 할아버지에게 할까? 물론 츤데레 컨셉 장착한 그 할아버지, 밭가는 법 하난 기가 막히게 잘 가르쳐준다. 그렇다 해도 반말 찍찍 성인 여성을 무시하는 예의 없는 태도에 상냥할 이유는 없는데. ‘모르는 게 잘못’이라니.

긍정적인 성격은 귀하다. 하지만 수동적 긍정은 글쎄. 캐릭터를 물러터진 사람으로 만들어서 주는 교훈은 얼마나 유익할까? 더욱 괘씸한 건 이 나사 빠진 낙천성을 방패삼아 캐릭터가 겪을 수많은 고생을 합리화하는 태도다.

하나가 이토록 심히 낙천적인 성격이 돼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불합리한 역경도 군말 없이 웃어넘겨야, 창작자가 생각하는 강한 어머니가 되어 의도한 감동을 줄 수 있으니까. 이걸 인정하기가 조금은 껄끄러웠던 것일까? 두 남녀가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에서 숨겨둔 묘한 변명이 드러난다.

“왜 ‘하나’야?”

“이름 말야? 내가 태어났을 때 뒤뜰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었대. 심은 게 아니라 저절로 핀 코스모스. 그걸 보고 아빠가 떠올린 거래. 꽃처럼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이로 기르고 싶다고. 괴로울 때나 힘들 때도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그럼 웬만한 건 극복할 수 있다고…. 그래서 아빠 장례식 때도 계속 웃고 있었어. 친척 어른들한테 엄청 혼났지. 역시 불경스러운 거겠지?”

“불경스럽지 않아.”

“다행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유니크한 흠결을 가진 안타까운 여자. 그런 여자를 토닥이며 받아들여주는 마음 넓은 남자. 결과적으로 남자의 이해심은 다른 여자들에게 없는 진가를 알아본 안목으로 인정받는 셈이 되니, 이 전지적 시점의 가스라이팅을 견뎌야 하는 건 관객의 몫.

자신에게 닥친 고난, 사회와 현실의 문제, 타인의 무례함을 스스로 가치판단하지 않는, 뭐든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하나는 쉽게 말해 의견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 사회와 현실의 문제, 타인의 무례함을 스스로 가치판단하지 않는, 뭐든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하나는 쉽게 말해 의견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고난도 무한 긍정과 자기희생으로 이겨내는 여성이 정말로 있다면, 그 누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사람에게 기만이니 뭐니 손가락질할쏘냐. 그저 초인을 보는 심정으로 박수나 칠밖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허구다. 싱글맘들더러 “하나처럼 살면 어때?” 묻는 것만으로도 무례를 넘어 상당히 낯부끄런 짓거리가 되는 현실에서, 이야기를 만든 감독이 한 번도 싱글맘으로 살아보지 않은 남성이라면 당연히 기만이 될밖에. 늑대 아이의 가장 큰 오점은 허구성인지도 모른다. 다큐가 아닌 것이 창작의 패착이라. 지독한 모순이다.

희생의 찬사, 최면적 감동

비판은 비판이고, 사실 난 이 영화를 아주 최악으로 보지 않았다. 감동과 불쾌함이 함께 느껴지는 특이한 영화랄까? 좋아하는 남자애 앞에서 조심스레 늑대의 얼굴을 내보이며 “나도 너처럼 있는 그대로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 털어놓는 유키의 고백은, 남들과 다름에 대한 고민으로 조금 더 아픈 성장통을 겪는 수많은 아이들을 위로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 끝에 자연에서 늑대로 살 것을 결심한 아메의 독립은,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국 자신의 의지로 미래를 선택하는 아이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장면,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며 우는 하나를 뒤로한 채 산길을 달려 봉우리에 오른 아메가 토해내는 멋진 울음은 ‘이렇게 잘 컸어요, 당신 덕분에.’ 라는 말을 대신한다. 아마도 자식이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헌사를.

그러나 최면적 감동은 의문의 쓴맛을 남긴다. 감독은 그런 찬사를 받아 마땅한 캐릭터라고 하나를 만들었다. 그는 과연 현실에서 그런 여자를 본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사람을 본 것일까, 일루전을 본 것일까? 영화가 아이들의 성장을 응원하는 데 부족함이 없기에 더욱 아쉽다. 이 영화는 결코 홀로 자녀를 양육하는 삶에 던져지는 여성들을 대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전자를 위해 후자를 희생시켰다고 이해하면 쉬울까. 그리고 이는 단순히 자식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희생 같은 게 아닌, 사회적 우선순위에 의한 무의식적 해석이 반영된 결과. 즉, 어린이를 ‘미래자산’이라 여기며 성인 여성의 인생을 희생시키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창작자가 정말로 그런 삶을 아름답게 여겨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사실,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들이 좋은 평을 남겼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더한다.

늑대아이는 벌써 9년 된 영화다. 개봉 년도에 봤다면 나도 지금같은 비판적 사고를 하진 않았을지 모른다. 소비자는 물론이고 창작자도 마찬가지로 생각과 가치관은 변한다. 발전이든 후퇴든, 사람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물갈퀴를 젓는다. 적잖은 논란이 된 호소다의 발언은 어쩌면 신작에서 페미니즘적 성과를 거둔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온 말일까? 희망을 품어본다. 그가 누굴 저격했건 포스트 누구로 불리건, 여성주의적 희망이 전무한 일본 애니계에 큰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대를 걸어볼 사람인 건 맞지 않은가. 막상 까보니 전작들과 별 차이가 없다면 김새는 거지만. 이말년 선생 말마따나 어린이는 만화를 먹고 자란다. 난 호소다나 신카이의 만화를 볼 여자 아이들이 고난과 불행을 이겨내는 자신만의 방법을 얻기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신카이보다는 그래도 호소다인지라, 모쪼록 그의 다음 영화가 재밌었으면, 그리고 부디 성장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연우 <소피움 인문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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