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 우리 책들] ‘여행의 시간’(소연정 쓰고 그림, 모래알)
코로나 시대가 장기화하며 우리 세상은 점점 있을 자리 바꾸는 일이나 새로운 곳 가로지르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여행은 뒤로 미루어야 할 것, 위험부담이 큰 것이 되었다.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 불운과 같은 말이 되어버린 시기다. 이러한 불운에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 소연정 작가의 <여행의 시간>(2021, 모래알)을 읽어보자. 다정하고 소담한 그림들이 두려움에 붙박지 않는 다른 해결책을 말한다. 새로운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여행을 간다는 것. 코로나 시대에 여행을 꺼리는 이유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여행이 관광이란 생각이 달라붙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지라는 도식에 맞추어 아름다운 공간들을 이리저리 접붙이는 바람에 다들 같은 길 걷는 것이 익숙해져 버렸다. 더 쉽게, 더 싼값에 멋진 경험을 하기 위해 최적의 길이 깔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몰리고, 방역이 취약해지고, 과도한 유입을 통제하기는 어렵고… 이러한 이미지들이 여행을 위험으로 인식시킨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이란 편리하지만, 동시에 모두 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위험을 낳는다. 작은 것보다 큰 것을 보는 일의 정해진 순서기도 하다.
‘여행의 시간’은 반대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들을 담는다. 아름답고 역사 깊은 이야기가 담긴 장소들에서 사소한 것을 기억하는 순간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시간 아까운 일이라고, 제대로 된 여행을 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곤돌라와 콜로세움이 아니면서도 소중한 것을 만났다. 아침의 물안개와 길고양이 밥을 주는 사람, 들꽃 향기와 비 맞은 개를, 새벽녘의 별을 만났다. 이렇듯 사소한 것을 꼭 가보아야 하는 명소들보다 더 깊이 마음속에 담았다.
사소한 것은 홀로 있을 때 당연히 약하다. 날씨의 변화나 은은한 꽃향기,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의식중에 흘러가 버린다. 하지만 거대한 바위들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는 곳에서라면, 사막이나 정글 한가운데에서라면 그것은 단순한 일상이 아닌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일상’이 된다.
정해진 길을 걷더라도 잠시 멈추어 설 수 있다면 그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을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랜드마크를 위해 바삐 걷기보다는,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두고 그 배경 속 일상을 찾는 것이다. 그런 여행은 우리의 세계를 넓힌다. 일상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확장된다.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쳤어.
그 순간 시간이 멈춰 버렸지.
바쁘거나 힘이 들면
나는 그 벤치를 생각해.
바람 한 자락을 떠올리며 싱긋 웃지.
그러면 내 가슴은 삶에 대한 사랑으로 차올라
다시 두근거려.
‘여행의 시간’ 중에서.
그럼 그 일상은 다시 나의 공간으로 돌아오더라도 힘이 된다. 삶에 대한 사랑을 되짚을 수 있게 하는 기억이 된다. 사진과 경험으로 남는 관광명소만큼 사랑으로 남는 타국의 일상은 소중하다. 이것이 여행이라면 아무리 사람을 피해야 하는 시국일지라도 마냥 위험을 내포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단계적 일상회복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시기에 일상이란 어떤 이유로 특별한 것인지를 기억해보고 싶다.
여행의 '여(旅)'는 나그네를 뜻하는 한자라고 한다. 돌아다니는 나그네. 사람들이 많은 곳은 반짝이는 도시겠지만, 그곳을 목적하거나 거기에 머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나그네. 세상 전부를 나의 일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여행이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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