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짐나게 - 2] 겨울 장터의 불 인심

사위는 아직 깜깜하다. 새벽 5시 순창장(1·6일). 두런두런 사람 말소리 발자국 소리 하나둘 섞여든다. 가게마다 좌판마다 출근하자마자 화르르 불을 지펴올린다. 그 불빛들이 어둠과 추위를 한꺼번에 물리치며 장터의 새벽을 연다.

“장사라는 것은 첫새복에 문을 열어야 혀.”

오래된 약속을 지키듯 맹추위에도 따순 이불속 꽃잠을 떨치고 일찌거니 장에 나선다.

“장사라는 것은 첫새복에 문을 열어야 혀.” 가게마다 좌판마다 출근하자마자 화르르 불을 지펴올린다. 그 불빛들이 어둠과 추위를 한꺼번에 물리치며 장터의 새벽을 연다.
“장사라는 것은 첫새복에 문을 열어야 혀.” 가게마다 좌판마다 출근하자마자 화르르 불을 지펴올린다. 그 불빛들이 어둠과 추위를 한꺼번에 물리치며 장터의 새벽을 연다.

서둘러 불 지핀 자리마다 “불 잔 쫴”라는 말들이 돌림노래처럼 피어오른다.

“뭣 사가시요”가 아니라 그 말이 먼저다. 겨울 장터의 ‘아랫목’인 화로 곁. 그 ‘아랫목’에 오가는 누구든 당겨 앉힌다. 장터의 화로는 공용이다. 한 화로에서 여럿여럿 불기를 나눈다. 네 손과 내 손이 그 온기 위에서 만나 손바닥꽃을 피운다.

“이거는 여런이 나놔써도 졸아들지를 안해.”

“나만 따수문 쓰가니. 다른 사람들도 같이 따솨야 좋제.”

널리 이롭게 하려는 그 정신에 충실하다.

“함께 쬐문 좋제. 애쓰고 불 피와놓고 혼자만 쬐문 아까와.”

밥솥이거나 찜통이거나 냄비이거나 깡통이거나…. 모양새도 출신성분도 가지가지.

장터의 화로는 재활용의 의지와 자작(自作)의 개성으로 뭉쳐져 있다.

“오오래 되얏어.”

찌그러져도 못나도 따순 불기를 담고 있는 이상, 겨울 장터에서 더없이 요긴한 존재.

그 온기에 기대어 장터가 열리고 저문다.

“오일장은 겨울이 힘들제.”

이기고 건너는 대처법이란 마음에도 있다.

“지난 장은 아조 춥더니 오늘은 푹하구만.”
“오늘은 바람기가 없어서 따솨.”

어제에 비하면 늘 ‘오늘은 푹하다’는 셈법.

“섣달인디 안 춥겄어. 추울 줄 알고 나와.”
혹석 떨지 않고 ‘긍갑다’ 하는 의연함.

서둘러 불 지핀 자리마다 “불 잔 쫴”라는 말들이 돌림노래처럼 피어오른다.
서둘러 불 지핀 자리마다 “불 잔 쫴”라는 말들이 돌림노래처럼 피어오른다.

“얼까시픈게 해 뜨문 펴야제”

불만 피워놓았을 뿐 늘어놓은 보따리 보따리 풀 생각은 아예 없는 듯 느긋한 할매.
“시방 내노문 얼어불어. 얼까시픈게 해 뜨문 펴야제. 한참을 기다려야 혀.”

깜깜한 장바닥에서 해 뜨길 기다린다. 내가 추운 것보다 보따리속 ‘내야 물견들’ 걱정이 먼저다.

“농사지은 거 몇 가지, 도라지도 까갖고 오고.”
“쩌어어 인계면에서” 오셨다. 올해 85세.

“눈 펄펄 와도 나와. 요참에 첫눈 올 때도 장사했제. 감기 안 들어. 감기 생전 안걸려. 울 애기들은 나가지마라그런디 한번 히봐놔서 휘딱 못 그만두고 계속 해.”

“옛날에 살아온 거시기로 보문 고생 아녀”라고 단언하는 할매는 “포는 것도 포는 것이제만 사람 귀경하러 나와. 코로나땜에 회관에도 못 가. 혼자 앙겄으문 적적한디 장에 나오문 사람 소리 듣는 그 재미가 있제”라고 말한다. 겨울 내내 할매의 요긴한 벗은 촛불 한 자루 켜 넣은 깡통의자. 장터의 고수들이 낳은 적정기술의 대표작으로, 빈 깡통에 초 한 자루면 1인용 난로가 탄생한다. 바람 찬 날의 든든한 의지처다.

“우리 작은손지가 할무니 할무니 장에 나가문 안 추와 맨나 물어싸. 어느새 커갖고 아파트랑 사갖고 산당게. 째깐한 것들이 우솨죽겄어.”

그 대견함을 ‘우솨죽겄어’라고 말하며 웃음 벙그러지는 할매. 장터의 시린 바람속에서도 ‘우리 손지들’의 온기가 할매를 웃게 한다.

“우리 손지들 이뻬. 항 얼매나 다 이뻬. 우리 손지들이 커피를 대줘. 인자금방도 여그 사람들한테 일고 야달 잔 싹 돌렸어. 뭐시 아까와. 장에 나갈 때 따숩게 자시라고, 우리 손지들이 커피고 과자고 맨나 사와. 떨어지들 안해.”

“함께 쬐문 좋제. 혼자만 쬐문 아까와.”
“함께 쬐문 좋제. 혼자만 쬐문 아까와.”
오래된 약속을 지키듯 맹추위에도 따순 이불속 꽃잠을 떨치고 일찌거니 장에 나섰다.
오래된 약속을 지키듯 맹추위에도 따순 이불속 꽃잠을 떨치고 일찌거니 장에 나섰다.
“요 스댕통에 물 뎁히는 것은 저그 생선전 갖다줄라고. 생선전은 더운 물이 많이 필요한께.” 건어물전 어매가 이웃한 생선전에 건네는 ‘뜨신 인심’.
“요 스댕통에 물 뎁히는 것은 저그 생선전 갖다줄라고. 생선전은 더운 물이 많이 필요한께.” 건어물전 어매가 이웃한 생선전에 건네는 ‘뜨신 인심’.
바람 찬 날의 든든한 의지처.
바람 찬 날의 든든한 의지처.

“춥고 손시럽고 땡땡 어는 일이여”

어물전 어매의 손은 겨우내 항시 곱은 손이다.
“겨울엔 만지는 것들이 다 얼음덩어리들이여. 어물전은 그래. 오만 것이 다 꽝꽝 얼어 있어.”

다라이 다라이 채운다.

“다 채려 놀라문 아직 멀었어.”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두 할매가 느릿느릿 장중하게 어물전을 편다. 순천 주암면에서 온 돌산댁(81)과 용동댁(85).

곁을 지켜주고 맞들어주는 이의 온기로 겨울 장터를 건너간다. 어물전의 돌산댁과 용동댁.
곁을 지켜주고 맞들어주는 이의 온기로 겨울 장터를 건너간다. 어물전의 돌산댁과 용동댁.

“낙자는 추우문 죽어불어. 바닷물 뎁혀서 얼른 부서줘야제.”
불 일운 화로에 급하게 물을 데우는 이유다.

“어지께는 석곡장. 나는 석곡 순창 주암장 옥과장 네 간디 댕개. 원래 다섯 간디였는디 일년 전부터 네 간디만 댕개.”

돌산댁의 일을 거들어주는 용동댁은 이웃지간.

“시집와서부텀 보고 살았응게 이 언니랑은 60년을 알고 살제. 나 혼자 못한께 모시고 와.”
용동댁은 “요사람땜시 나와. 너모 춥고 고상하고. 내가 아니라 요사람이”라고 말한다.
“맨나 보고 같이 일한께 자식들보다 더 잘 알제, 그 고생을.”

곁을 지켜주고 힘든 일 맞들어주는 이의 온기로 겨울 장터를 건너간다.

“나는 이 손이 뭔 일을 하고자와. 일을 해야 맘이 씨언허제 안하문 못살아”란 맘으로 평생 일해온 돌산댁이지만 “올해만하고 인자 안할라고”라고 선언한다.

“못해. 허리가 아프고 골벵 들어서. 인자 놀아야제. 마을회관에 가서도 놀고. 나는 장으로만 돔서 일하고 살아갖고 회관이 어찌고 생긴 줄도 몰라. 근디 인자 내가 놀란께, 회관이 문을 닫아불었네. 코로나때매. 인자 좋아질 테제.”

평생 “인자 좋아질 테제” 그 맘으로 살았다.

“항, 부자도 못되고 시방 이러고 살제만, 그 맘이 있었응께 이만치 산 거제.”
용동댁이 “돌산떡은 주기를 좋아한 사람이여”라고 말한다.
“코로나때매 같이 못 묵은께 글제 그전에는 오만사람 다 믹여. 새복부텀 일어나서 밥도 반찬도 일부러 많썩 해와서 지내는 사람 모른사람도 다 믹이고.”
‘춥고 손 시럽고 땡땡 어는 일’을 하면서 내내 다숩게 지켜 온 인심이다.

“추울 땐 속이 뜨셔야 워넌히 덜 추와.” 국수라는 온기를 말아낸다.
“추울 땐 속이 뜨셔야 워넌히 덜 추와.” 국수라는 온기를 말아낸다.
밤새 내린 눈 정갈히 쓸고 훈짐 피어올린다.
밤새 내린 눈 정갈히 쓸고 훈짐 피어올린다.

“놈 존일 해야 좋제”

“옛날 다라이를 갖고 이러케 맨들았어. 오래 되았제.”
유난히도 큼직한 화로다. 주전자며 큰 통을 올려놓고도 넉넉하다.
“요 스댕통에 물 뎁히는 것은 저그 생선전 갖다줄라고. 생선전은 더운 물이 많이 필요한께.”

건어물전 어매가 이웃한 생선전에 건네는 ‘뜨신 인심’이다.

“놈 존일 해야 좋제. 놈 존일 해야 내 맘이 후북하제.”
시방 그 불기 덕을 보고 있는 단골 김옥남(77) 어매는 집에 돌아갈 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차가 일곱시 차배끼 없어. 근게 장 볼라문 빨리 나와. 그 다음 차는 한참 뒤에야 있어. 돼지족발 하나 살라
고 나왔어. 우리 영감님이랑 묵을라고. 겨울에 국물 내서 묵으문 따시제. 반찬 벨 거 있가니. 요새는 맨맛한
짐장짐치만 묵고 살아.”

채소전 어매도 잠시 불 쬐러 건너왔다. “코로나때매 너모 안돼. 사람들이 안와. 모도 김장들을 해불어서도

손님이 더 없어. 그래도 행이나 하고 나오제.” ‘행이나’라는 마음으로 힘을 낸다.
“아무리 추와도 우리들은 물견 잘 폴리문 봄날이여.”
봄날을 바라는 그 마음으로 저물도록 겨울 장터를 지킨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